•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2. 붕당정치의 전개
  • 3) 제2차 예송과 남인정권의 등장
  • (1) 제2차 예송의 배경

(1) 제2차 예송의 배경

 제2차 예송은 예학적 논쟁으로서의 의의보다 그 정치적 의미가 더 중요한 사건이었다. 제2차 예송의 배경에는 왕과 서인세력, 청풍 김씨 일족과 송시열 일파의 갈등, 허적과 송시열의 대립, 남인과 청풍 김씨 외척의 밀착 등 여러 정치집단 사이의 갈등과 이합집산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의 이해는 甲寅禮訟의 정치적 성격을 파악하는 데 하나의 관건이 될 것이다. 제2차 예송은 외형상 현종과 賓廳의 儀禮諸臣들 사이의 논쟁으로 진행되었고, 왕의 독단에 의해 기년복으로 확정되었다. 왕의 뒤에는 김우명·김석주 등의 청풍 김씨 외척과 福昌君 楨 등의 종실 측근들이 지원하고 있었고, 빈청의 제신들은 대부분 송시열의 문인이었거나 그 추종자들이었다. 청풍 김씨 일가는 기해예송 때부터 허목·윤휴 등의 설을 좇아 ‘효종적장자설’을 고수하고 있었고 의례에 참여한 신하들은 송시열·송준길의 중자설을 지지하고 있었다. 宮中세력과 府中세력으로 대별할 수 있는 이들 두 집단의 논쟁은 예학적 견해의 대립이었다기보다, 오래 전부터 갈등관계에 있었고 이 무렵에 표면화된 정치투쟁의 일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종은 만년에 이르러 송시열 일파의 집권 서인들에게 여러 가지 일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왕은 이 무렵 건강이 악화되어 정사에 의욕을 잃고 있었는데, 그들은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 조정의 공론을 쥐고 왕권을 견제함으로써, 이른바 ‘主弱臣强說’이 중국에까지 유포되고 있었다.0166)≪顯宗實錄≫권 21, 현종 14년 10월 임진.
李肯翊,≪燃藜室記述≫권 34, 肅宗朝故事本末 吳始壽賜死.
차츰 현종의 송시열·송준길에 대한 존경과 예우도 시들하게 되었다. 송시열은 현종 10년(1669) 3월 대신 李景奭을 비방하는 상소를 올려 조야의 신망을 잃었고,0167)李肯翊,≪燃藜室記述≫권 31, 顯宗朝故事本末 溫行時李景奭箚忤宋時烈. 현종 14년에는 寧陵表石件과 閔愼代服件으로 국구 김우명과 심하게 싸워 물의를 일으켰다.0168)≪顯宗實錄≫권 21, 현종 14년 9월 을해. 특히 그 해 10월 寧陵 遷葬後 그가 올린 상소에는 왕이 심한 말로 힐책하기도 하였다.0169)≪顯宗實錄≫권 21, 현종 14년 9월 무신. 왕과 송시열 사이의 이러한 상호불신은 점차 두 사람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였다. 현종은 말년에 이르러 서인들의 전횡을 혐오하게 되었고, 특히 당파적 의논을 심하게 배척하였다. 대체로 1672년 이후부터 서인정권에 대한 현종의 불신과 불만은 표면화되었고, 이에 따라 남인의 등용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기에 현종 14년 영릉의 遷葬과 表石 논쟁 및 민신의 대복사건으로 송시열과 국구 김우명 사이에 심한 갈등이 일어나면서 정국변화의 조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무렵에 일어난 제2차 예송은 남인들이 별로 개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인 자신들의 당착으로 패배를 자초함으로써 인조반정 이후 초유의 정권교체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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