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2. 붕당정치의 전개
  • 3) 제2차 예송과 남인정권의 등장
  • (2) 제2차 예송의 발단과 전개

(2) 제2차 예송의 발단과 전개

 현종 15년의 제2차 예송에서 논의의 핵심은 仁宣王后가 조대비의 장자부에 해당하는가, 중자부에 해당하는가를 판가름하는 문제였다. 제1차 예송에서는≪경국대전≫에 장자와 중자에 대한 복이 구별없이 기년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굳이 효종의 지위를 판별하지 않아도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자부복에 대해서는 고례인≪儀禮≫에는 長子婦 大功, 衆子婦 小功으로 분별되어 있었고,0170)≪儀禮注疏≫권 11, 喪服篇 大功·小功.≪경국대전≫에는 각기 기년과 대공으로 나뉘어 있었다.0171)≪經國大典≫권 3, 禮典 五服. 고례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에서도 장자부와 중자부의 복이 다르게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제 효종의 장자·중자 지위를 판별하는 일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송시열계가 중심이 된 조신들은 효종을 중자의 지위로 볼 수밖에 없었고, 현종이나 청풍 김씨 등 왕실측에서는 장자의 지위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다만 이 논쟁에는 남인들이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허목·윤휴·홍우원·오정창 등은 폐고되어 있었고, 윤선도·권시·조경 등은 이미 작고한 뒤였다. 또 영의정 허적은 서인의 탄핵을 받아 가족을 데리고 충주에 낙향해 있었다.

 현종 15년 2월 24일 인선왕후가 훙서하자 예조에서 성복절목을 마련하면서 조대비의 복제를 재최 기년으로 정하여 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 때 예조판서는 趙珩, 참판은 金益炅, 참의는 洪柱國으로 모두 서인이었고, 특히 김익경은 金萬基의 숙부이며 송시열의 제자였는데도 그들은 당초에 기년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곧 같은 서인이었던 朴世堂이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의 주장은 효종의 상에 조대비가 이미 중자를 위한 기년복을 입었으므로, 효종비에 대해서는 중자부복에 해당하는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0172)≪顯宗改修實錄≫권 27, 현종 15년 2월 임술. 물의가 일어나자 예조에서는 사유를 왕에게 아뢰거나 대신들에게 품의하지 않고 곧장 절목 중의 기년을 대공으로 고쳐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것은 사소한 실수로 인정되어 예관들은 잠시 법사에 넘겨졌다가 직위해제의 가벼운 징계를 받고 풀려났다. 그후 조정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곧 잊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5개월 후인 7월 6일에 이르러 비로소 대구 유생 도신징이 상소하여 대왕대비 복제의 과오를 지적하였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첫째 효종상의 복제에서는 대비가≪경국대전≫에 의해 장자를 위한 기년복을 입었는데, 지금의 대공복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하는 점, 둘째≪의례≫의 장자부 대공복은 의심스러운 것으로서 이미 唐 太宗 때 魏徵의 건의에 따라 기년으로 고쳤고, 이것은 이미 만세의 정론이 되었는데 구태여 三代의 고례를 따를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점, 셋째 만약 국제의 대공복을 써서 인선왕후를 중자부로 대우한다면 왕은 대왕대비의 衆庶孫이 될 것이니 뒷날 대왕대비가 죽었을 때 왕은 嫡長孫의 承重者로 자처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대통을 이어 종사의 주인이 되고서도 적장자가 되지 못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하는 논리였다. 요컨대 그는 기해년의 기년복이 국제의 장자를 위한 복이라고 우겼다. 따라서 지금의 대공복은 중자부복이므로 전후의 복제가 모순된다는 것이었다. 인선왕후가 중자부에 해당할 경우 현종이 인조의 중서손에 해당할 것이라는 지적은 매우 예리한 것이었다.

 현종은 이 疏를 본 후 승정원에 내리지 않고 몇 일간 수중에 쥐고 있었다. 이 기간에 왕은 여러 번 이 소를 읽어보고 문제점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7월 13일 경연석상에서 영의정 김수흥과 예조판서 조형에게 이 문제를 하문했을 때 왕은 이미 심중에 그 개정을 작정하고 있었다. 왕은 먼저 당초에 기년으로 정한 복제를 대공으로 고친 이유, 기해년에는 국제에 의해 기년으로 정하였는데 지금의 대공 역시 국제에 의한 것인지를 물었다. 이에 김수흥 등은 기해년의 효종상에 기년복을 입었으므로 이제 대공으로 고쳤으며, 기해년에는 국제와 고례를 참작하여 겸용하였다고 변명하였다. 왕은 또 장자부에 대한 복이 고례와 국제에 각기 어떻게 규정되었는지, 지금의 대공이 어떻게 국제와 다르게 되었는지 질문하였다. 김수흥과 호조판서 閔維重은 고례(≪의례≫)의 장자부복은 대공이며 국제의 장자부복은 기년으로써, 기해년에 고례와 국제를 병용하였기 때문에 지금 대공으로 고쳤다고 설명하였다. 즉 그때 고례의 중자복을 입었기 때문에 지금 강복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례에 의하면 중자부복은 소공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도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왕은 신하들에게 기해년에 과연 차장자에 대한 복을 쓴 것인지 물었다. 이 때 승지 김석주가 “그것은 송시열이 수의에서 효종이 인조의 서자가 되어 해로울 것이 없다고 하여 허목이 상소를 하게 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0173)위와 같음. 이에 자극된 왕은 그날 중으로 六卿·三司·大臣·原任大臣·參贊·判尹·禮曹堂上 등을 소집하여 복제를 재심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빈청에 모인 의례제신들은 서인 일색이었고, 특히 김수흥·김수항·김만기·민유중 등 송시열의 직계제자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그들의 지론인 중서자설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3일간에 걸쳐 네 번씩 啓聞과 下敎를 반복하며 왕과 제신들은 격렬한 논쟁을 계속하였다.0174)≪顯宗實錄≫권 22, 현종 15년 7월 을해∼정축. 왕은 김수흥 등을 불러 타이르기도 하고 질책하기도 하면서 복제를 번복시키도록 종용하였으나,0175)≪顯宗實錄≫권 22, 현종 15년 7월 병자. 그들은 듣지 않고 대공설을 고수하였고, 마침내는 송시열의 ‘體而不正’설을 인용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격분한 왕은 회의를 중지시키고 독단으로 복제를 개정하였다. 당일로 예관들을 하옥시키고 영의정 김수흥을 ‘남의 의논에 빌붙은’ 죄로 춘천에 정배하였다.0176)≪顯宗實錄≫권 22, 현종 15년 7월 무인. 이렇게 되자 온 조정의 서인들이 일어나 변명하고 신구하였으나 왕은 그들마저 차례차례 처벌함으로써 일대 파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현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전면적인 서인의 축출이나 급격한 정국변화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이 지나 사태가 안정되면 그는 김수흥 등을 다시 서용하여 사태를 진정시킬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0177)≪顯宗改修實錄≫권 28, 숙종 15년 8월 계사. 그러나 현종은 복제개정 후 한달이 지난 8월 18일 갑자기 훙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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