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2. 붕당정치의 전개
  • 3) 제2차 예송과 남인정권의 등장
  • (4) 제2차 예송의 성격

(4) 제2차 예송의 성격

 제2차 예송의 대부분은 왕과 빈청의 의례제신들 사이에서 진행되었고, 지난날 남인·서인의 예송의 대가들은 전혀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의례제신들은 모두가 서인으로서 대체로 송시열·송준길의 추종자들이었지만, 대부분의 남인들은 이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문제를 제기했던 도신징은 남인과 가까운 대구의 유생이었고 그의 논리도 종래 남인들의 지론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그가 남인세력을 대표하거나 대변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제2차 예송을 순전히 서인과 남인간의 당쟁적 전례논쟁으로 보았던 종래의 인식은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제2차 예송 이후 남인들의 득세는 서인들이 몰락한 데 따른 반사이득이었을 뿐, 그들 자신이 쟁취하여 얻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반대로 제2차 예송의 향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김석주로 보이는데, 그는 실상 당시 왕의 측근에서 경전적 전거를 해석해 올리는 등 현종에게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왕비와 환관, 종실 왕족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현종말∼숙종초의 정치상황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현종과 청풍 김씨 외척으로 대표되는 궁중(왕실)세력과 송시열 일파가 중심이 되었던 府中(신료)세력 사이에 있었던 오랜 갈등의 결과로 생각된다. 송시열 일파는 그 동안 왕권을 극도로 위축시켰고, 그들의 이상정치론과 현실적인 견제 때문에 외척은 오랫동안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통에 흠이 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서인들의 ‘孝宗衆庶子說’은 왕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이나 실제의 논쟁 전개 양상에서 제2차 예송은 전통적인 궁중과 부중의 갈등 양상의 하나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제2차 예송의 판결은 곧바로 서인의 정치적 패배와 남인의 득세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서인 남인간의 정권교체는 숙종 즉위년(1674) 7월 서인들이 예송에서 패퇴한 직후가 아니라 6개월 후인 숙종 원년 정월부터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종은 김수흥 등을 처벌하기는 하였지만 기타 의례제신들은 크게 나무라지 않았고 이후 한달간 대폭적인 정국변환의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서인들은 숙종 즉위초의 5개월간에도 역시 조정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문무관의 인사권을 포함한 주요 권한들을 양보하지 않고 있었다. 남인들이 인사권을 차지한 것은 바로 숙종 원년 정월부터였다. 이 때의 대대적인 정국변동에는 숙종의 즉위와 그의 개성이 큰 작용을 한 점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李迎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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