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3. 붕당정치의 운영형태
  • 1) 붕당정치의 전개와 붕당론
  • (1) 붕당 성립기의 붕당론

(1) 붕당 성립기의 붕당론

 조선 초기에는 붕당을 私黨으로 간주하여, 조정 문란의 요인이며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죄악시하였다. 그러나 중종대 趙光祖를 비롯한 사림세력이 중앙 정계에 적극 진출하면서 붕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선조의 즉위와 함께 사림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구양수와 주희의 붕당론을 수용하면서 붕당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다. 선조 5년 영의정 李浚慶의 遺疏에서 붕당의 조짐이 지적되면서, 붕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李珥의 붕당론이 제기되었으며, 선조 8년(1575) 붕당 형성 이후에는 정치 집단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붕당론이 제기되었다.0181)붕당 성립 이전의 붕당론에 대해서는 鄭萬祚, 위의 글 참조.

 선조 8년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자, 현실적으로 붕당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동인은 수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정국을 주도하면서 “동인이 옳고 서인이 그르다”고 인식하여, 소인당인 서인을 조정에서 완전히 축출하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의 붕당론은 자신을 군자당으로, 상대 세력을 소인당으로 규정하는 주희의 붕당론과 같은 것이었다. 이에 반해 분쟁 해소를 위한 새로운 붕당론도 제시되었다.

 이이는 동인과 서인이 기본적으로 같은 사류에서 갈라진 정치집단이라는 인식에서 調劑保合論을 주장하였다.0182)李 珥,≪栗谷全書≫권 7, 疏箚 5, 辭大司諫兼陳洗滌東西疏.
≪宣祖修正實錄≫권 13, 선조 12년 4월.
즉 동인·서인의 명목을 없애고 사류를 보합하기 위해, 양쪽에 다 是와 非가 있으므로(兩是兩非論) 당색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여 궁극적으로 ‘一朋’의 상태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동인인 金宇顒은 기본적으로 이이의 조제론을 인정하면서도, 군자와 소인의 조제는 불가능하며 公私와 是非를 분명히 밝힌 후에야 조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0183)≪宣祖修正實錄≫권 13, 선조 12년 6월.
金宇顒,≪東岡集≫권 7, 玉堂論朋黨箚 기묘 6월.

 선조 16년 이이가 서인을 지지하면서 서인이 붕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자 동인·서인이 공존하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더 이상 붕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각자의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붕당론이 제기되었다.0184)선조대 후반의 정국과 붕당론에 대해서는 具德會,<宣祖代 후반(1594∼1608) 政治體制의 재편과 政局의 動向>(≪韓國史論≫20, 서울大, 1988)에 주로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서인은 鄭汝立 옥사에 따른 명분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과의 전쟁 이후 재지적 기반도 약화되어 있었으므로, 엄정한 是非·正邪의 분별보다는 異論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다른 붕당과의 공존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다. 서인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견지했던 남인의 경우에도 金誠一·柳成龍·李德馨 등에서 보여지듯이, 기본적으로 다른 붕당의 존재에 긍정적이었고, 붕당간의 시비·정사의 분별을 엄히 하기보다는 朝廷의 진정을 위한 ‘同寅協恭’을 강조하였다.

 반면에 북인은 전쟁 기간의 의병 활동과 주전론의 견지를 통해 확보한 명분상의 우월성과 재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서인과 남인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이들은 미봉적인 조정의 진정보다는 엄정한 시비·정사의 분별을 강조하여, 상대 붕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광해군대에 나타난 大北 일당전제화의 추구는 이들의 붕당에 대한 인식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0185)광해군대의 정치 운영과 붕당론에 대해서는 韓明基,<光海君代의 大北勢力과 政局의 동향>(≪韓國史論≫20, 서울大, 198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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