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3. 붕당정치의 운영형태
  • 2) 비변사 중심의 공존체제

2) 비변사 중심의 공존체제

 왕정체제에서 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권과 인사권은 형식상 왕이 행사하였지만, 실질적인 책임은 백관을 대표하는 대신에게 위임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이래의 사회 경제적인 발전과 새로운 정치세력의 성장은 전문 관료의 필요성을 증대시켰고, 소수의 대신에 의한 국정 주도마저 어렵게 하였다. 특히 일본·청과의 전쟁과 그 후의 복잡한 대외관계 속에서 다수의 의견을 종합하여 최선의 정책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또한 정치적 성격이 다른 복수의 붕당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정국 주도 집단은 자신들의 정책에 대해 상대세력으로부터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공론정치를 표방하게 되고, 이를 위해 여러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일본과의 전쟁 기간에 기구의 확대와 기능의 강화를 가져온 備邊司가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다.

 비변사는 대신을 비롯한 문무 고위 관료들이 합좌회의를 통해 정책을 심의하였는데, 대신 중의 선임자가 회의를 주도하였고 유사당상이 실무를 맡았다. 비변사에서 심의된 사항은「備邊司啓」나 차대 자리에서 왕에게 보고되었고, 왕의 재가를 받으면 이것은 곧 명령으로 인식되었다.0202)≪孝宗實錄≫권 5, 효종 원년 12월 병인, 領議政李敬輿·右議政李時白啓. 따라서 17세기 이후 비변사는 최고 정무기구로 인식되었고, 붕당정치의 운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비변사 구성원의 붕당별 구성은 붕당정치기 비변사의 정치적 기능을 보여준다. 인조 이후 숙종 5년(1679)까지≪備邊司謄錄≫의 매월초 座目에 나와 있는 비변사 都提調와 당상 역임자는 176명이다. 이들의 붕당별 구성은 서인 111명(63.07%), 남인 46명(26.14%), 소북 15명(8.52%), 미상 4명(2.27%)0203)당색의 구분은 편의상≪名世譜≫,≪南譜≫,≪北譜≫를 참조했다.으로 서인이 남인과 소북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중 소북 인사들은 인조반정 이후 독자적인 정치 집단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서인이나 남인에 흡수되었음을 고려하면, 서인이 남인 일부를 포용하면서 정국을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좀더 세분하여 각 왕 즉위초의 비변사당상 이상 역임자의 붕당별 구성을<표 1>로 정리하였다.

시기 인조 2년 2∼6월 효종 원년(12개월) 현종 원년(12개월) 숙종 원년(13개월)
서인 20명(80%) 20명(83.3%) 17명(80.9%) 12명(46.2%)
남인 2명(8%) 3명(12.5%) 3명(14.3%) 13명(50.0%)
소북 3명(12%) 1명(4.2%) 1명(4.8%) 1명(3.8%)
25명(100%) 24명(100.0%) 21명(100.0%) 26명(100.0%)

<표 1>각 왕 즉위초 비변사당상 이상 역임자의 붕당별 구성

 인조초의 상황은 반정을 주도한 서인이 중심이 되어 일부 남인과 소북계 인사들을 포용하여 정국을 주도한 사실을 보여준다. 소북계가 남인에 비해 많은 것은 이들이 광해군 정권에 부분적으로 참여하여 관직이 높아졌고 실무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데 비해, 남인은 광해군대의 정국에서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반정 후에도 아직 고위 관직에 오른 사람들이 적었기 때문이다. 현종대까지도 이러한 서인의 비변사 장악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소북계가 거의 없어지고 남인이 약간 증가한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숙종 원년(1675)에는 남인이 부쩍 늘어나 반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현종말 남인의 정국 주도가 숙종초로 이어졌음을 반영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현종대까지는 서인이 비변사를 주도하였고, 남인은 소수가 비변사에 참여하다가 숙종 즉위초에 이르러 대거 비변사에 진출하여 반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소북은 인조대를 지나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숙종 즉위후 5년까지 비변사에 처음 들어간 사람은 총 30명인데, 이 중 7명만이 서인이고 나머지 23명이 남인으로 분류되어 숙종초 남인의 정국 주도를 보여준다.

 비변사에서의 논의가 衆意의 수렴을 표방하면서도 도제조인 대신과 유사당상에 의해 주도되었고 다수의 당상들은 거의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비변사 당상 이상 역임자들의 붕당별 구성비는 정국 주도 집단이 비변사를 통해 집단의 이익을 보장받고 상대 세력을 포용하면서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정국 주도 집단은 비변사의 운영을 장악하고, 정치적 비중은 높으나 자파세력에 위협이 되지 않을 인물이나 실무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비변사로 끌어들여 중의의 수렴을 표방함과 동시에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변사 公事의 처리는 유사당상이 의정에게 품결하여 起草한 후 모든 제조에게 通議하여 논의가 일치된 후에 入啓하였다.0204)≪備邊司謄錄≫2책, 광해군 10년 4월 6일. 대신이 유고중이어서 오랫동안 開座할 수 없으면 비변사당상끼리 개좌하고, 回啓할 일이 있으면 유사당상이 대신의 집에 가서 의논하여 초안을 작성해 왕에게 아뢰었다.0205)≪備邊司謄錄≫5책, 인조 16년 2월 28일. 만약 呈告 중인 당상이 있으면 대신이 낭청을 보내어 의견을 들은 후 처리하였다.0206)李廷龜,≪月沙集≫권 31, 兼兵曹判書三度加給由後辭職兼陳時弊箚. 논의 결과는 비변사 전체의 집단적 견해임을 내세워 대신이나 유사당상에 의해 備邊司啓로 왕에게 보고되었고,0207)≪備邊司謄錄≫5책, 인조 16년 2월 28일. 경연석상이나 인견할때 다시 논의되기도 했다. 비변사에서의 안건 처리 과정은 회의때 비변사당상이 안건을 제기하면 대신이 참작하여 결정하고 왕에게 보고하여 확정짓는 절차를 밟았다.0208)洪宇遠,≪南坡集≫권 8, 辨閔宗道疏斥疏.

 비변사의 주요 관직 議薦權은 붕당정치기 인사 행정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인사 행정의 실무는 주지하듯이 이조와 병조에서 담당하고, 최종 인사권은 왕이 행사하였다. 그러나 비변사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지면서 주요 관직에 대한 의천권을 비변사에서 행사하였고, 이를 통해 붕당간의 이해 관계가 조정되고 정국 주도 집단의 안정적인 재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일단 비변사에 의천의 명령이 내려지면, 모든 당상들이 3명의 적임자를 추천하고 이것을 대신이 마감하여 3망을 갖추어 의망하였다.0209)≪備邊司謄錄≫1책, 광해군 9년 2월 3일. 숙종 5년까지≪備邊司謄錄≫에 실려 있는 의천 기록을 분석하여 대체적인 추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광해군대에는 의천 대상 관직이나 의천된 사람의 수가 많았고, 비변사에서 薦望할 때에도 3망을 갖추지 않고 7∼10명씩 천망하고 있었다. 이미 알려진 대로 광해군 9·10년(1617·8)경에는 왕권이 상대적으로 강했고, 정국을 주도하는 대신도 뚜렷하지 않았으므로 비변사의 의천에도 왕의 영향력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었다. 비변사에서 3망을 갖추지 않고 여러 명을 올린 것은 대신 부재를 이유로 ‘優數書啓’하라는 전교0210)위와 같음.에 따라 당상이 추천한 사람 모두를 의망한 것으로, 인사에서 왕의 선택 폭이 넓었음을 보여준다. 복수 붕당의 공존이라는 붕당정치의 원리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다음<표 2>는 인조 이후의 의천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감사 평안감사(24), 함경감사(22)
유수·부윤 강화유수(18), 광주부윤(26), 의주부윤(15)
부사 수원부사(23), 동래부사(14)
병·수사 평안병사(20), 북병사(20), 통제사(20)
군문대장 훈련대장(1), 총융사(13), 어영대장(12), 수어사(9)
군지휘관 함경북방어사(1), 경기우방어사(1), 하삼도관찰사(1), 충청관
찰사종사관(1), 경기관찰사종사관(1), 평북조방장(1), 총독군
문(1), 겸삼도통어사(2), 도원수(1)
기타 留將(1), 將令可合人(1), 不次擢用人(2), 堂下州郡可合人(1),
御使可合人(1)

<표 2>인조∼숙종 5년간 비변사의 의천 상황

( ) 안의 숫자는 의천된 횟수.

 대체로 인조 이후에는 지방관에 대한 비변사의 의천이 광해군대에 비해 많이 제한되고 있었다. 다만 새로운 군영이 설치되고, 군영대장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들을 비변사에서 의천하고 있었다. 의천 대상 관직은 광해군대에 비해 줄어들었지만, 실제로는 인사 행정에 대한 비변사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다. 비변사에서는 인사권을 행사하는 이조·병조판서를 천망하여 이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고, 호조판서0211)≪備邊司謄錄≫9책, 인조 23년 10월 15일, 吏曹啓.와 군영대장들을 의천함으로써 권력의 물리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비변사에서는 직접 의천하지는 않더라도 그 후보자를 선정하였고,0212)≪備邊司謄錄≫30책, 현종 12년 10월 7일. 이조에 적임자를 천거하거나 이조에서 비변사와 상의하여 의망하기도 했다. 이 때 이조에서는 비변사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였고, 만약 적임자가 아니어서 문제가 되더라도 비변사에 그 처리를 의뢰하였으며,0213)≪備邊司謄錄≫14책, 효종 원년 4월 12일, 吏曹啓. 대간도 비변사의 의천에 대한 비판에 제약을 받았다.0214)≪備邊司謄錄≫7책, 인조 20년 6월 4일, 憲府啓.

 인조 이후에는 비변사에서 직접 의천하던 관직은 줄어들었지만 핵심적인 관직의 의천을 장악하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였고, 비교적 덜 중요한 관직의 인사권은 이조와 병조로 환원하여 인사 행정의 정합성을 높이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분석한 비변사당상 이상의 붕당별 구성과 관련하여 보면, 의천권의 행사를 통해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의천의 실제를 보면 인조대에는 文武將令可合人·不次擢用人·州郡可合人 등의 일시적인 의천을 제외한 통상적인 의천 기록은 38회가 있었고, 이 중 落點이 표시된 것은 29회이다. 낙점의 내용을 보면 首望 낙점이 22회(75%), 亞望 낙점이 7회(24%)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변사의 천망이 별다른 이의 없이 왕에 의해 그대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효종 7년(1656)까지는 의망 내용만 기록되고, 8년 이후부터 제당상의 추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효종 7년까지 통상적인 의천 기록은 42회(加望 4회)이며, 이 중 낙점이 표시되지 않은 것이 5회이다. 37회의 낙점 내용을 보면 수망 낙점이 28회(75%), 아망 낙점이 6회(16%), 말망 낙점이 3회(8%)이며, 가망의 경우 수망 낙점이 2회(50%)이고 원망의 수망 낙점이 1회(25%), 원망의 아망 낙점이 1회(25%)이다. 효종 7년까지도 비변사의 의천이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효종 8년 이후 숙종 5년(1679)까지에는 152회의 의천 기록이 있다. 이 중 제당상의 추천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 30회인데, 단망이 4회(어영대장 3·훈련대장 1), 2망이 2회, 3망이 24회이며, 낙점자는 2망과 3망 26회 중 수망 낙점이 20회(76%)를 차지한다. 이들은 북병사(1), 동래부사(2), 수원부사(1), 의주부윤(1), 광주부윤(2), 훈련대장(1), 어영대장(7), 총융사(10), 수어사(5) 등으로 군영대장이 주류를 이룬다. 이것은 군영의 정치적 기능이 커진 상황에서 그 대장의 인사에 대신의 영향력이 컸음을 보여준다.

 비변사당상의 추천 내용을 기록한 것은 총 132회이며, 의천에 참여한 당상은 총 940명, 추천된 사람은 모두 2,367명이다. 평균 의천 참여 당상은 7.1명(930/132), 매회 의천된 사람의 평균은 17.9명(2367/132), 당상 1인의 평균 의천자는 2.5명(2367/940)이다. 이 132회 중 제당상이 추천하지 않은 사람을 의망한 것은 29회(5%)를 차지한다. 의망 내용을 보면 수망으로 올린 경우가 12회, 아망에 10회, 말망에 13회를 의망하고 있다. 한번에 2명이 낀 경우는 4회이며, 3망 모두를 대신이 독자적으로 의망한 경우도 1회 있고, 나머지는 1명씩을 의망하고 있다. 이 중 낙점을 받은 사람은 수망으로 올라간 사람 중 8회(27%)이며, 전체 132회에 대비해 볼 때에는 6%를 차지한다.

 대신이 제당상의 추천을 토대로 의망한 것은 113회이다. 이 중에는 제당상의 추천을 전적으로 수용하여 추천된 숫자의 다과에 따라 望의 고하를 결정한 경우도 있고, 이것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여 망의 순서를 정한 경우도 있으며, 추천된 숫자의 다과를 거의 무시한 경우도 있다. 이 113회의 의천은 망의 고하를 결정하는 데 어느 정도 대신의 영향력이 작용하기는 했지만, 대신이 제당상의 의견을 토대로 하여 의망한 것으로서 대신의 권한이 비변사에 근거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의 비변사 의천 결과를 종합해 볼 때 대신들이 제당상의 추천을 받아 이를 마감하여 의망하는데, 이 때 대신의 독자적인 의견을 강하게 반영하기 보다는 당상들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하여 의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에 대신의 국정 주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지만,0215)鄭弘俊,≪17세기 조선의 정치 권력구조와 대신≫(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4). 그 권력의 기초는 어디까지나 비변사에 두어지고 있었고, 비변사의 집단적인 힘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명종대 尹元衡에 의한 권력의 전횡과 광해군대 대북 집단의 독점적인 정국 주도를 경험한 17세기 중엽에는 왕을 포함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권력이 독점되는 것을 적극 견제하려 하였다. 그 결과 정치 권력은 개인이 아닌 집단의 차원에서, 다른 정치 집단과의 일정한 합의를 통해 행사되었다. 고위 관료들이 다수 결집하여 합의제를 표방한 비변사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붕당정치기의 존재 의미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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