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3. 붕당정치의 운영형태
  • 4) 서원의 정치적 기능

4) 서원의 정치적 기능

 붕당정치기 중앙 정계에서 공론 정치가 이뤄지는 機制가 삼사의 언론 활동이라면, 지방 사림의 여론을 수렴하여 중앙 정계에 반영하는 각 붕당의 하부구조로서 기능했던 것은 서원이었다. 서원은 원래 중국에서 시작되어 先賢奉祀와 교육을 담당하던 기구였다. 우리 나라의 서원은 주지하듯이 중종대 周世鵬이 安珦을 봉사하기 위해 세운 白雲洞書院이 그 효시이다. 초창기의 서원은 일차적으로 사림의 講學所라는 기능이 강조되었지만, 선조 8년(1575) 이후 붕당정치가 전개되면서 정치적 의미가 강해졌다.

 선조대에 세워진 서원은 52개소이고 당대에 賜額된 것도 21개소이다. 사액 서원에 봉사된 사람은 사화기의 인물들을 비롯해 李滉·李珥·曺植 등이 망라되었다. 도덕과 학문이 높은 사람을 봉사한다는 원칙이 그대로 지켜져서 대개가 유학이나 성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택해지고 있었다. 특히 사화기의 인물이 다수 대상이 된 것은 그들의 강한 출자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0269)이하 서원의 건립 추이에 대해서는 李泰鎭,<士林과 書院>(≪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朝鮮儒敎社會史論≫, 지식산업사, 1989에 재수록)을 참조. 이 시기의 서원은 사림계가 획득한 정치적 지위와 집권세력으로서의 명분을 합리화·정당화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오직 사림 전체의 정치명분을 뒷받침해 주는 데 그치고 있었다.0270)鄭萬祚,<조선조 서원의 정치·사회적 역할-사림 활동의 전개와 관련하여->(≪한국사학≫10,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9).

 광해군대의 서원 건립은 선조대의 형세가 유지되었지만, 정치적 역할이 더욱 강화되었다. 집권세력이던 북인은 그 학연상의 취약점을 만회하기 위하여 조식의 문묘종사운동을 추진하였는데, 북인계 서원이 그 儒疏 작성의 거점이 되었다. 鄭仁弘은「晦·退卞斥」후 진주 德川書院의 유생조직을 활용하여 100여 명의 유생으로 하여금 조식의 문묘종사를 요구하는 연소를 올리게 했다. 덕천서원≪院生錄≫에 따르면 광해군 원년의 경우 진주·함양·합천 등 진주권에 거주하는 조식문도가 주축을 이루며, 특히 정인홍과 사우관계에 있던 인물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0271)李樹煥,<書院의 政治·社會的 考察>(≪嶠南史學≫1, 1985), 26∼27쪽.

 또 북인세력 확장의 전초기지로서 조식을 배향하는 서원의 건립과 사액이 적극 추진되었다. 덕천서원과 三嘉의 龍巖書院·김해의 新山書院에 사액을 내리게 하고, 白雲書院과 강진의 南冥書院 건립을 추진하였다.0272)광해군대 북인의 학통 강화 노력은 韓明基,<光海君代의 大北勢力과 政局의 動向>(≪韓國史論≫20, 서울大, 1988) 참조. 더 나아가 북인정권은 이황 문인의 본거지이며 남인이 압도적 우위를 지키던 경상도의 안동·예안 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서원을 활용하기도 했다.0273)정만조, 앞의 글(1989), 102쪽. 서원은 점차 학연상의 정통성 부여와 자파세력의 확장에 이용되는 정치적 역할을 서서히 강화해 나가고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붕당정치의 전개는 서원의 발전에도 반영되었다. 서원의 건립 추이를 보면 인조대에 30개소, 효종대에 27개소가 건립되어 전 시기의 추세를 잇고 있다. 서원의 疊設에 대한 폐단의 지적과 그 금지 대책이 주장되기 시작하는 것은 인조 말년 경상도 지역에 국한되었으며,0274)≪仁祖實錄≫권 45, 인조 22년 8월 기미, 慶尙監使林潭啓. 서원제도 문란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 중의 하나인 정치적 대립의식의 발동도 효종 말년 무렵에 이르러 비로소 그 뚜렷한 예가 찾아진다. 鄭介淸을 봉사하는 무안의 紫山書院의 훼철과 복설은 서인·남인간의 대립의식이 가장 날카롭게 작용한 예의 하나였다.0275)金東洙,<16∼17世紀 湖南士林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특히 鄭介淸의 門人集團과 紫山書院의 置廢事件을 중심으로 하여->(≪歷史學硏究≫7, 1977). 이 서원은 광해군 8년(1616)에 설립되었는데, 인조 8년(1630) 서인의 훼철 주장이 있었지만 관철되지 못했고 효종 8년(1657)에 처음 훼철되었다. 그 사이에는 인조 8년 이 지역에 서인계인 金權의 松林書院을 신설하여 견제의 입장을 취하는 정도였다.0276)李泰鎭, 앞의 글(1977), 197쪽.

 현종대에 서인·남인 사이의 대립이 가열되기 시작하면서 서원의 수적 증가 추세가 뚜렷해진다. 현종대에 신설된 서원은 43개소로서 그 증가율은 이제까지의 배에 이르렀다. 서원의 질적 저하도 뚜렷하였으니 후대에도 끝내 사액을 받지 못한 서원이 21개소로서 전체의 반에 가까워 전대에 비해 현저하게 늘어났다. 또한 현종대에는 봉사 인물의 追配가 훨씬 많아졌고, 봉사 자격에도 의심이 가는 인물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이러한 새로운 징후의 발생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시기에 가열되기 시작한 서인·남인간의 세력 경쟁이 주된 원인의 하나였다.0277)위와 같음.

 현종대 서인·남인세력간 정쟁은 숙종대로 이어져 더욱 심화되었다. 숙종 6년(1680) 이후에는 붕당간의 공존이라는 붕당정치의 기본원리가 부정된 채,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고 상대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換局政治가 나타났다.0278)洪順敏,<肅宗初期의 政治構造와 ‘換局’>(≪韓國史論≫15, 서울大, 1986). 집권세력은 집권의 명분 합리화와 자파 정론에 대한 공감대의 확산을 위하여 일반 사림의 광범한 지지를 필요로 하였다. 이에 자파 인물을 봉사하는 서원을 경쟁적으로 건립하고, 기존의 서원을 포섭하기 위한 물질적·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숙종대에 설립된 서원은 140여 개에 달하는데, 그 중 사액을 받은 것은 겨우 40여 개에 불과했다. 봉사 대상 인물도 학문인이라 보기 어려운 인물, 儒化를 남긴 수령, 行誼있는 士子까지 선정되는 실정이었다. 정상적으로 봉사 인물이 모셔진 서원에 문중 인물을 새로 추배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인물들은 대개가 자격이 되지 않는 경우로서, 곧 서원의 기능을 봉사 일변도로 치우치게 하여 마침내는 서원과 祠宇를 혼동하여 동일시하는 결과를 낳기까지 하였다. 숙종 초반에서 말년까지의 정치변동에 따른 사액의 추이를 보면 남인 집권 시기에는 남인계 인물에, 서인 집권시에는 서인계 인물 제향처의 서원에만 사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각 정파가 자파계 서원에만 지원을 보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환국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사림의 공론은 사실상 노론·소론·남인 삼당을 지지하는 향촌사림의 당론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후 서원은 겉으로는 사림공론의 수렴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私黨 정론의 소굴, 곧 당론의 淵藪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와 동시에 서원은 정쟁의 와중에서 화를 당한 黨人에 대한 신원과 이를 통한 특정 정파의 정치적 도덕성을 합리화해주는 도구로 점차 변모하게 되었다. 특히 노·소 분기후 尼山書院의 치폐와 宋時烈의 道峯書院 竝享·配享문제는 이러한 성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0279)李樹煥, 앞의 글(1985), 33∼34쪽.

 붕당정치기의 서원은 중앙 정계와 지방 사림간의 연결 통로였다. 특히 조선의 붕당이 학파적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이러한 경향은 심화되었다. 각 붕당은 집권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자파 정론의 정당성에 대한 일반 사림의 광범한 지지를 얻어야 했다. 戚臣의 전권 행사나 대북 일당전제의 폐해를 경험한 인조 이후의 정치세력은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의 권력 독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사족층에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言路가 개방되어 있던 상황에서 일반 사림의 지지는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지방 사림의 거점으로서 지방의 여론이 결집되던 서원과의 연계를 중시하게 되었다. 한편 지방 사림들은 일본·청과의 전쟁 이후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향촌질서의 재건을 위해 서원에의 결속을 강화하고 중앙 고위 관료의 지지를 필요로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 정계와 지방 사림은 서원을 통해 서로 연결될 수 있었다.

 효종대 이후 거의 전국적 유림이 동원되다시피 한 서인계의 이이·성혼 문묘종사 요구와 그에 대한 남인 사림의 반대 상소는 개인적인 것도 있지만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의 연명 상소였다.0280)金相五,<黨爭史의 立場에서 본 李珥의 文廟從祀問題>(≪全北史學≫4, 1980). 이러한 연명 상소의 논의나 작성은 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즉 서원은 지방 사림의 여론을 수렴하여 중앙 정계에 반영하는 창구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현종대 예송 과정에서 나타난 영남 유생 柳世哲 등의 상소는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일차예송시 서인의 주장이 관철되자, 안동 중심의 영남 유림세력은 의례에 대한 상세한 辨正과 고증 작업을 진행하고, 그 결론을 상호 검토한 후 열읍에 통문을 돌려 의견을 수렴·조정하여, 드디어 현종 7년(1666) 유세철을 疏首로 한 영남유생 천여 명의 聯疏를 올렸다. 이 과정에서 의견의 발의·수렴과 통문에 의한 도내의 여론의 결집은 서원조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0281)정만조, 앞의 글(1989), 111쪽 참조. 이외에도 구체적인 분석은 못했지만 이 시기에 활발했던 지방 사림들의 연명 상소들은 여론의 취합 과정을 거쳤을 것이고, 그 조직은 서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붕당정치기의 서원은 지역·당색의 차이와 정국 주도 집단의 변화에 따라 성격을 달리 한다. 붕당이 강한 학연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경상좌도와 우도, 기호지방의 서원은 각각 남인·북인·서인의 宗師的 인물을 봉사하는 곳이 많았다. 또한 중앙 정부에서의 주도 붕당의 변화에 따라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받고 향촌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지방 사림과 자파 세력의 확장을 꾀하는 중앙 정치집단의 관계에서 서원의 운영 방식도 다르게 나타난다.0282)이하의 서술은 李樹煥, 앞의 글(1985)과<朝鮮時代 書院의 內部組織-院任, 院生을 중심으로->(≪嶠南史學≫2, 1986)를 주로 참조하였다.

 경주의 玉山書院과 안동 陶山書院은 남인의 학문적 연원으로 인식되는 李彦迪과 李滉을 봉사하는 서원으로서 남인세력의 재지적 기반이었다. 옥산서원≪尋院錄≫에 따르면 서원 방문 인사의 거주지는 대체로 경주·안동·상주권 전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특히 안동권 인사는 인조반정 이후 약 50% 이상을 차지한다. 반면 진주권을 중심으로 하는 북인계열 인사의 방문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서울출신 인사의 방문은 인조반정 이후 급격히 감소한다(9.4%) 이들 서원이 영남 남인의 재지적 기반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 이후에도 서울출신 인사의 방문이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었다. 이것은 이 지역 서원이 許穆·蔡濟恭 등 기호남인의 정치적 명분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0283)李樹煥, 위의 글(1985), 3∼7쪽.

 영남 남인계 서원의 운영 체제는 院長·有司체제, 또는 上·下有司체제로 정비되었다.0284)이하 서원의 운영체제에 대해서는 李樹煥, 앞의 글(1986)에 의거하여 서술했다. 상유사는 다른 서원의 원장과 동일한 의미에서 쓰여진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원장·유사체제라고 할 수 있다. 원장은 인맥·학맥관계로 道內 人士가 임명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鄕中 人士였다. 紹修書院의 경우 약 180년간(1542∼1718)에 181명 중 90명(52%)이 생원·진사·문과합격자·하급관료이고 나머지는 幼學이었다. 玉山·陶山·屛山書院도 동일한 경향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인조반정 이후 영남 남인이 중앙정계에서 점차 배제되면서 재야세력으로 밀리고 있는 정치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경상우도 지역은 북인의 재지적 기반이 강한 곳이었고, 藍溪書院·德川書院 등 이 지역의 서원은 북인 정치 활동의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남계서원에의 재정적 지원 내용을 기록한≪裒寶錄≫에 따르면 인조반정 이전에는 경상감사와 함안군수가 당색을 불문하고 부임시 서원 소용의 현물을 제공하였고, 진주권·상주권·전라도 지역의 지방관도 보인다. 감사·함양군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방관이 경상우도 및 曺植과 직접·간접으로 관계되는 인물이며 남인계열 인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지방관의 경우 함양군수를 제외하면 서원 인근의 몇 지역만 나타나는데, 이것은 반정 이후 북인의 몰락을 보여주는 것이다.0285)李樹煥, 앞의 글(1985), 23∼24쪽. 덕천서원도 남계서원과 비슷한 경향을 보여주는데, 다만 인조반정 이후 친남인계의 성향을 띠는 인물들이 서원을 주도하여 향촌사회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북인계 서원은 원장·유사체제로 운영되었으나, 중앙의 정치 변동에 따라 원장의 성격이 변화하였다. 인조반정 이전에는 원장이 재지세력을 대표하는 一鄕士夫로 임명되고 현직 관료는 제외되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지역 사림들의 자치기구로서의 역할 범위가 축소되어 덕천서원의 경우 정인홍과 무관하거나 그 이탈세력이 원장을 역임하였다. 숙종·영조 연간에는 노론 전제하에서 관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계서원의 경우 함양군수나 노론의 대표적 인물이 원장을 역임했다. 향촌사회에서의 실세를 만회하고 지위 향상을 꾀하려 했던 서원 측의 입장과, 남인의 입장을 견지하려는 영남의 사족을 견제하고 여당세력을 부식하기 위해 북인계열을 포섭하려고 했던 집권 노론의 입장이 결부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반면에 덕천서원에는 친남인계열의 중앙관료들이 원장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차이는 실세 상태의 북인계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이었다.

 서인계 서원은 인조반정 이후 자파세력이 계속 집권세력으로 유지되었으므로 중앙 또는 지방 권력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모색하면서 향촌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에 있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가 서원의 운영 체계나 인적 구성원에 일정하게 반영되었다. 서원의 운영은 인조반정 이후 院長·掌議·有司체제로 확립되었다. 장의·유사·色掌은 원생 중에서 선출하고 임기는 2년이었으며, 장의가 논의를 주관하고 경제적인 문제는 유사가 담당했다. 특히 京掌議·京有司 등 京齋任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원장은 石室書院에서 “공경 대부로서 賢德이 있고, 사림의 신망을 얻은 자로 한다”0286)金元行,≪渼湖集≫권 14, 雜著 石室書院學規.고 규정되었듯이 중앙정계의 핵심 관료들이 차지하였다. 임기는 종신이었고, 노론계의 중앙 고위 관료들은 다수의 자파 서원 원장직을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다. 당시 집권 노론은 서원을 통하여 향촌사회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했고, 서원은 노론 대신을 원장으로 추대하여 서원의 제문제를 해결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장의는 서원 소재 또는 인근 지역의 지방관이 많았다. 경재임은 자파 현직 관료들로 임명되었고, 중앙 및 지방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것은 전라도 노론계 서원에서도 보편적인 현상이었다.0287)鄭汝立 사건을 계기로 향촌사회에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결집되지 못했던 대부분의 전라도 사림은 중앙권력과의 연결을 모색하였고, 집권 노론세력은 자파세력 확보를 위해 이 지역 서원 원장직에 취임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은 자기들의 집권적 명분과 도학적 정통론의 확립을 위해 조광조·이이·성혼·김장생 등의 서원을 계속적으로 설립하고 사액을 받았다. 서원 설립에는 서인계 중앙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이것은 이황 이후 영남 남인계 서원이 향촌사회에서 기반을 잡고 있었고, 서원제도 운영방식이나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림의 수도 서인계 서원이 밀리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즉 서원을 통해 자파 사림의 기반을 확대하고, 남인계와 대등한 학문적 연원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17세기 붕당정치가 전개되는 시기의 서원은 각 붕당의 재지적 지지 기반이었고, 지방의 여론을 수렴하여 중앙 정계에 반영하는 창구의 구실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앙 정계의 주도 집단이 변화함에 따라 향촌사회에서의 서원의 위상도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 사림들은 서원의 자치적인 운영을 강화하거나 중앙 정계와의 연결을 시도하여 향촌사회에서의 지배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具德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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