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4. 붕당정치의 동요와 환국의 빈발
  • 2) 환국의 실상
  • (1) 갑인환국

(1) 갑인환국

 현종 즉위년(1659) 효종이 승하하였을 때 母后인 인조의 繼妃 莊烈王后 趙氏의 상복을 三年服으로 하자는 남인의 주장과 朞年服으로 하자는 서인의 주장이 대립하였다. 許穆으로 대표되는 남인의 주장은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여, 효종이 인조의 장자는 아니지만 嫡子로서 장자의 지위를 이어받은 것으로 보아 장렬왕후가 적장자복에 해당하는 무거운 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宋時烈을 필두로 하는 서인의 주장은 天下同禮를 내세워, 효종은 인조의 적자이기는 하지만 장자가 아닌 衆庶子이므로 이에 해당하는 가벼운 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0292)鄭玉子,<17세기 思想界의 再編과 禮論>(≪韓國文化≫10, 서울大, 1989).
李迎春,≪朝鮮後期 王位繼承의 正統性論爭 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94).
현종 즉위년의 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서인이 계속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의 입지를 고수하였다. 하지만 남인도 허목이 현종 8년에 좌의정, 12년에 영의정이 되는 등 현종대 중반부터는 중앙 정계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현종 15년 2월 23일에 현종비 仁宣王后 張氏가 승하하였다. 예조에서는 장렬왕후가 입을 복제를 처음에는 기년복으로 정했다가 다시 그보다 한 단계 낮은 大功服으로 정정하여 올렸다.0293)≪顯宗實錄≫권 22, 현종 15년 2월 임술.
≪顯宗改修實錄≫권 27, 현종 15년 2월 임술.
이 문제는 인선왕후의 장례가 끝난 직후인 7월초 대구에 사는 幼學 都愼徵이 상소하여 그 전거를 따짐으로써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0294)≪顯宗實錄≫권 22, 현종 15년 7월 무진.
≪顯宗改修實錄≫권 28, 현종 15년 7월 무진.
이 문제를 강력하게 추구하여 서인 관료들을 공박한 사람은 현종이었다.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서인측 신료들은 인선왕후를 장렬왕후의 衆子의 아내로 보아 대공복을 입도록 해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하였고, 현종은 次子로서 長子의 지위를 계승한 아들의 아내로 보아 기년복을 입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현종은 일찍이 송시열 등 서인측에서 내세웠던, 효종이 인조를 “繼體는 하였으나 嫡統은 아니다”라는 ‘體而不正’설을 효종을 貶降한 것으로 비판하며,≪儀禮≫나≪周禮≫등 중국의 古禮보다는 ‘時王의 制’, 곧 國制를 적용할 것을 고집하였다. 현종은 복제문제를 담당하였던 예조판서 趙珩 등을 하옥하고 당시 영의정 金壽興을 춘천에 付處하도록 명한 뒤에0295)≪顯宗實錄≫권 22, 현종 15년 7월 무인.
≪顯宗改修實錄≫권 28, 현종 15년 7월 무인.
기년복으로 고쳐 成服하도록 최종 판결을 내렸다.0296)≪顯宗實錄≫권 22, 현종 15년 7월 기묘.
≪顯宗改修實錄≫권 28, 현종 15년 7월 기묘.
그로부터 열흘 뒤에는 남인 許積을 영의정으로 삼고 서인 金壽恒을 좌의정으로 결정하여 정국의 주도권이 서인으로부터 남인으로 옮겨갈 단초를 열었다. 이러한 조처를 취한 지 한 달이 못 된 8월 중순부터 현종은 병세가 위독해져 8월 18일에 승하하였다.

 숙종 즉위초에는 송시열에게 현종의 陵誌를 지어 올리게 하기도 하였으나 송시열이 극구 사양하여 김석주가 이를 대신하는 등 서인계의 입지가 위축되었다.0297)≪肅宗實錄≫권 1, 숙종 즉위년 9월 계해 및 10월 병신. 숙종은 복제문제에 대한 현종의 처분을 옹호하는 주장을 고수하여 서인을 공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제문제는 이제 구체적인 실행 측면을 넘어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치적 이념 논쟁으로 비화하여 갔다. 대사헌이 된 허목을 비롯하여 남인 언관들은 복제논쟁에서 서인측의 중심 인물인 송시열을 파직하고 귀양보내라는 쪽으로 비판과 공격을 집중하여 마침내 숙종 원년(1675) 정월 송시열을 덕원으로 귀양보냈다.0298)≪肅宗實錄≫권 2, 숙종 원년 정월 임신. 이로부터 현종 말년부터 허적이 영의정을 맡고 김수항이 좌의정을 맡고 있는 체제는 유지되면서도 점차 남인들이 관직을 차지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갔다. 특히 허목과 尹鑴 등 허적과는 성향이 다른 부류들이 진출하여 송시열을 죽이라고까지 공격하여 熊川에 위리안치하게 하였다.0299)≪肅宗實錄≫권 4, 숙종 원년 윤5월 을미·기해·임인·무신. 서인으로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던 閔鼎重·李端夏 등도 관작이 삭탈되어 문외로 출송당하고, 김수항도 원주에 부처되었다가 영암으로 귀양갔다.0300)≪肅宗實錄≫권 4, 숙종 원년 윤5월 임인 및 7월 임인·갑진. 서인이 퇴조함과 함께 숙종 원년 6월에는 남인 허목이 우의정이 되는 등 남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거의 독점하였다.0301)≪肅宗實錄≫권 4, 숙종 원년 6월 경진.

 이상 현종 15년(1674) 7월 인선왕후의 장례 직후부터 시작되어 숙종 원년 7월까지 약 1년에 걸쳐 서인과 남인 사이에 이루어진 제2차 복제논쟁의 결과 서인이 퇴조하고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 정국의 전환을 갑인환국이라 한다. 갑인환국은 인조반정 이후 유지되어 온,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견제하면서 유지되어 오던 붕당정치의 균형을 깬 첫번째 환국이다. 갑인환국의 주요 쟁점은 복제문제였다. 복제논쟁은 단지 繁文縟禮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행동 규범인 예의 구체적인 적용문제였고, 따라서 사회를 이끄는 지도이념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의 승패는 사회를 이끌 지도력의 當否, 좀더 구체적으로는 정국 주도권의 장악 여부로 연결되는 문제였다. 복제논쟁은 다른 한편으로는 왕가의 특수성, 다시 말하자면 왕권의 우월성 인정 여부에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남인은 대체로 왕권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쪽이었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열세에 있던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내포하는 측면도 있다. 왕가의 복제논쟁은 이렇게 왕의 위상과 관계되는 문제이므로 왕의 위상이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 자체도 그렇거니와 더구나 그것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은 왕으로서는 달가울 바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이에 숙종은 숙종 5년 3월 국왕으로서 이 문제에 결론을 내린 다음 “이후 다시 예론을 陳疏하는 자는 역률로 논단하겠다”는 하교를 내려 논란을 봉쇄하였다.0302)≪肅宗實錄≫권 8, 숙종 5년 3월 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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