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4. 붕당정치의 동요와 환국의 빈발
  • 2) 환국의 실상
  • (2) 경신환국

(2) 경신환국

 숙종 초년 제2차 복제논쟁에서 승리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된 남인은 그 내부에서 淸南과 濁南으로 분립하였다.0303)이하 경신환국과 기사환국에 대한 서술은 洪順敏, 앞의 글을 참조. 탁남은 허적·權大運 등을 영수로 하는 집단으로 현종조부터 고위직에 있었던 자들이 많으며 그 세력이 크고 당시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에 비해 청남은 허목·윤휴 등을 중심으로 탁남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청남·탁남과 함께 이 시기 주요한 정치집단의 한 부분을 형성하였던 것이 勳戚이다. 淸風 김씨가와 光山 김씨가 그리고 驪興 민씨가가 이른바 ‘三戚’으로 지목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兵權을 비롯하여 국정 전반에 걸쳐 깊숙이 관여하며 막강한 실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이들과 이질감을 갖고 있던 일반 士類들은 이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 이들을 공격하는 형국이었다. 특히 현종비 명성왕후의 동생인 金錫冑는 군사 전문가로 인정을 받으면서, 숙종 초년부터 숙종 10년(1684) 그가 죽기까지 정국의 변동을 주도하였다.

 숙종 초년 청남과 탁남 그리고 훈척 사이의 관심의 초점은 예론보다는 병권에 있었다. 병권은 정치 권력의 물리적 기반을 이루는 것이며, 구체적인 경제적 이해관계가 집결되어 있는 초점이기도 하였다. 당시 병권을 구현하는 부서는 軍門으로 나타났다. 군문은 군역가의 징수, 막대한 屯田의 경영, 화폐의 발행과 통용, 점포의 설치와 경영 같은 적극적 영리행위 등으로 경제 부서보다도 막강한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정치집단으로서는 군문을 장악하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숙종 초년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창설되었던 訓鍊都監·御營廳·摠戎廳·守禦廳의 네 군문이 있었다. 이러한 군문들은 대체로 김석주를 비롯한 훈척들이 장악하고 있는 형세였다. 이에 남인은 都體察使府를 복설하여 탁남의 허적이 체찰사가 되었다. 특히 탁남은 도체부를 통하여 병권을 좀더 많이 장악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이러한 병권을 둘러싼 훈척과 특히 탁남의 움직임에 대하여 청남계의 인물들은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이렇게 청남과 탁남의 대립이 격화되고 탁남으로 권력이 편중되자 숙종은 이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서인계 인물들을 遠竄에서 해제하도록 명하고, 인사권을 좀더 강력히 행사하려 시도하였으며, 붕당을 없앨 것을 강조하였다. 숙종은 6년 3월에는 훈련대장을 남인 柳赫然에서 ‘國家之親 位高之人’, 곧 훈척인 총융사 金萬基로 교체하고, 서인계 인물들을 진출시키고 남인을 축출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체찰사도 허적에서 김석주로 바뀌었다. 숙종은 남인의 독주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서 국왕 자신이 인사권을 행사할 의지를 천명하기도 하였다.0304)≪肅宗實錄≫권 9, 숙종 6년 3월 무오. 환국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더라도 환국이 발생하는 데 숙종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환국의 직접적인 계기는 숙종 6년 4월에 鄭元老와 金萬鐵이 올린 종친 福善君 柟과 허적의 서자 許堅이 역모를 꾸몄다는 내용의 고변이었다. 이 역모의 실상은 그리 심각하지 않은 듯하나 김석주가 탁남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확대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 고변으로 허견은 陵遲處死, 복선군은 교수형을 당하였으나, 허적은 관작을 삭탈당하고 田里로 放歸되고, 吳挺昌·윤휴·李元禎은 圍籬安置되고, 閔熙는 放送되고, 유혁연은 사형을 면하여 유배되었다. 반면에 이 사건을 계기로 훈척이 두드러지게 진출하여 이후 정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남인이 축출된 자리를 서인이 대거 차지하였다. 이것이 경신환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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