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4. 붕당정치의 동요와 환국의 빈발
  • 2) 환국의 실상
  • (3) 기사환국

(3) 기사환국

 경신환국으로 경쟁자인 탁남이 제거된 뒤 김석주를 중심으로 하는 훈척이 병권을 거의 독점하게 되었다. 훈척은 서인으로부터도 남인 퇴치의 공을 인정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이 무렵 정치적 역량이 크게 신장되어 있던 숙종으로부터도 신임와 비호를 받고 있었다. 훈척은 정치적으로 그 지위가 크게 부상되어 거의 독주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김석주는 군제 변통을 주관하면서 精抄廳과 訓鍊別隊를 합하여 禁衛營을 창설하였다. 이러한 훈척의 독주에 대해서 三司의 연소한 관료들이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반훈척적 사류 집단의 움직임은 숙종 8년 8월 南九萬이 병조 판서가 되면서 활발해졌다.

 이러한 시기에 10월에는 전병사 金煥과 出身 金重夏의 고변사건이 일어난다. 김환의 고변 내용은 남인 許璽 등이 군비를 갖추고 역모를 꾀한다는 것으로서, 閔黯·權大運·吳始復·吳挺緯 등 남인 주요 인사 16명이 이에 참가하여 福平君 木垔을 추대하고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케 한다는 것이었다. 김중하의 고변 내용은 민암이 權瑍, 洛西令 秀胤, 尹惟中 등과 ‘浮雲’이라는 死生契를 맺고, 南斗北·金錫冑·朴斌 등을 제거함으로써 대사를 도모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고변이 있은 지 6일 후에는 어영대장 金益勳이 승정원 兒房에 나아가 密啓를 올린다. 김환이 고변하기 전에 자기에게 와서 허새의 모역 내용을 다 말했고 이에 덧붙여서 哨官 全翊戴와 柳命堅 사이의 수상한 낌새 및 낙서령 수윤이 임금을 원망하는 부도한 말을 전했기에 전익대를 잡아두었으니 조사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조사 결과 허새는 모역을 생각한 것은 사실이나 李德周에게 말했더니 그는 신중을 기하자고 했던 정도에 그쳤을 뿐이라 말하고, 나머지 혐의 사실은 전부 부정하였다. 이 사건 처리를 놓고 金壽恒·閔鼎重·金壽興·鄭知和·김석주 등은 철저히 조사할 것을 주장했고, 李尙眞은 적당히 마무리지을 것을 주장하는 등 대신들간에 의견이 엇갈리다가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는 쪽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훈척과 ‘年少輩’의 대립은 더 심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정치적으로 그 여파는 매우 크게 되었다. 趙持謙·兪得一·安烒 등 연소배는 삼사의 언관으로서 훈척, 그 가운데서도 문제가 되었던 김익훈의 경력, 부정축재, 정탐에 근거를 둔 密啓 등을 집요하게 공격하여 마침내 숙종 9년(1683) 정월 김익훈을 어영대장직에서 해임시키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연소배는 하나의 정치집단으로 결집되었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기할 때 소론의 핵심이 되었다.

 이에 비해 남인들로부터 심하게 박해를 받은 후 이 시기에 재등장한 송시열은 연소배와 훈척의 대결에서 철저히 김익훈을 비호하고 나섰다. 이에 연소배들은 김익훈을 추가로 처벌하라고 더욱 공격을 가하였으나 숙종은 도리어 그들을 좌천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숙종 9년 5월 결국 김익훈이 門外黜送되기까지, 중앙 정계에 참여하고 있는 현직 관료는 물론 산림들까지 모두 훈척과 연소배의 대립에서 초연할 수 없을 만큼 이 문제는 큰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前輩로 불리는 의정부의 대신들은 김익훈을 비롯한 훈척에 타협적이고 우호적이었던 데 반해 後輩로 불리는 삼사의 연소 관료들은 훈척에 비판적이고 적대적이었다. 그리하여 전자는 노론으로, 후자는 소론으로 결집하여 서인은 소론과 노론으로 분립하였다.

 노론과 소론은 각각 송시열과 尹拯을 중심으로 하여 세력이 커져 갔다. 송시열은 윤증의 스승이자 아버지 尹宣擧의 친구였다. 윤선거가 죽자 윤증이 송시열에게 墓碣銘을 부탁하였는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구한 것에 대한 비판을 우회적으로 표명하였다. 이에 윤증은 스승 송시열에게 반감을 가지고 불만을 표시하였다. 이러한 송시열과 윤증 사제지간의 알력을 이른바 ‘懷尼是非’라고 한다. 숙종 10년에 이르러 이 두 사람의 관계가 노론과 소론의 반목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각각을 하나의 붕당으로 硬化시키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소론의 공격에 대해 훈척과 노론은 병권을 좀더 강력히 장악함으로써 응전하려 하였다. 그러나 훈척은 그 지주적 존재인 김석주가 숙종 10년 9월에 급작스럽게 죽음으로써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된다. 그 이후에는 노론과 소론이 중요 정치집단으로 남게 되어, 정국은 이 두 정치집단 간의 상호 작용에 의해 운영되었다. 자연히 이들은 상호 비판과 견제를 활발히 하게 되었고 이러한 노·소론의 대두와 대립은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훈척의 퇴조로 인하여 불안을 느끼고 있던 숙종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숙종은 붕당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소론을 배척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숙종은 왕권 본연의 속성상 자신의 의지가 관철되는 정국 운영을 원하였다. 숙종은 측근 세력이던 훈척이 약화되자 훈척을 지원하는 한편 왕실의 종친을 옹호하였다. 이에 대해 서인은 노론 소론을 막론하고 이를 지적하고 나섬으로써 왕권 대 서인의 상호 작용이 정국의 주요 대립축을 형성하였다.

 숙종 14년 10월에 후궁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장씨는 남인과 연결되어 있는 역관집안 출신으로 궁녀로 들어와 이 무렵 위계가 내명부 정3품 昭儀였다. 왕자 출산을 계기로 장씨 주변의 인물들은 더욱 두드러지게 행동하였고 이에 비례하여 臺諫의 비판도 거세졌다. 숙종 15년 정월 숙종은 낳은 지 두 달 된 왕자의 名號를 ‘元子’로 정하고자 하였다. 원자는 단지 첫 아들이란 뜻을 넘어 世子가 될 아들이란 뜻으로서 정치적으로 차기 왕위를 승계할 후계자로 정한다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 남인과 연계되어 있는 후궁 장씨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있던 서인 신료들은 왕비 인현왕후의 나이가 아직 젊으므로 시기 상조라고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후계자를 확정해 놓음으로써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숙종은 이를 고집하여 결국 원자로 정하고, 장씨를 승격하여 禧嬪으로 봉하였다. 이 때 소론의 呂聖齊가 다시 우의정이 되고, 남구만이 판중추부사가 되어 정국이 소론 중심으로 재정비되는 듯하였다. 그러던 중 그 해 2월 노론계의 영수요 산림으로 인정받던 송시열이 원자 정호가 시기 상조라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이에 대해 즉각 그를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출송하도록 명하였다. 이를 계기로 노론·소론을 막론하고 서인은 모두 급속히 파직되고 睦來善이 좌의정, 金德遠이 우의정, 그리고 權大運이 영의정, 閔黯이 좌참찬이 되는등 남인계의 인물들이 대거 관직에 등용되었으니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기사환국은 남인이 실세하고 훈척도 퇴조한 뒤 노론과 소론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바탕에서 국왕 숙종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역학 구도 아래서 발생하였다. 환국 발생의 직접적인 계기는 숙종의 후계자를 미리 확정짓는 문제에 대해 노론과 소론을 포함하는 서인의 반대를 국왕 숙종이 물리친 것이었다. 붕당 사이의 역학 관계나 이념적인 대결보다는 숙종의 개인적인 의지가 크게 작용하였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등장하였지만,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숙종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그 기반은 허약하였다. 이러한 허약성으로 남인은 기사환국 뒤 5년만에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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