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4. 붕당정치의 동요와 환국의 빈발
  • 2) 환국의 실상
  • (4) 갑술환국

(4) 갑술환국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서인 전체의 이념적 근원이 되는 栗谷 李珥와 牛溪 成渾을 문묘에서 黜享하였다.0305)≪肅宗實錄≫권 20, 숙종 15년 3월 을유. 양인의 문묘 從享이 경신환국 직후인 숙종 7년에 이루어졌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서인이 현실적으로 패퇴하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그와 함께 원자 정호에 반대하였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賜死하라는 숙종의 명에 따라 잡혀 오는 길에 정읍에서 죽었다.0306)≪肅宗實錄≫권 21, 숙종 15년 6월 무진. 金壽恒·洪致祥·李師命 등 노론계 인물과 金益勳 등 훈척 그리고 그 관련자 18명이 죽고, 노론·소론을 막론하고 서인계 인물들 다수가 유배되거나 파직 등의 처벌을 받았다.0307)李熙煥,≪朝鮮後期黨爭硏究≫(국학자료원, 1995), 106∼111쪽. 이어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투기를 일삼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왕비에서 폐하여 庶人으로 삼아 친정으로 내치고,0308)≪肅宗實錄≫권 21, 숙종 15년 5월 정유·기해. 희빈 장씨를 왕비로 승격시키기로 결정하였다.0309)≪肅宗實錄≫권 21, 숙종 15년 5월 신축·무신;권 22, 숙종 16년 10월 기묘. 책봉례는 장렬왕후의 장례 절차가 마무리된 뒤인 숙종 16년 10월에 가서 행했다. 그와 함께 숙종 16년(1690) 4월부터 남인 신료들이 세자 책봉을 거론하여 6월에 책봉하였다.0310)≪肅宗實錄≫권 22, 숙종 16년 4월 갑술 및 6월 을해. 그 때 세자의 나이가 3세밖에 되지 않았던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성급한 일로서 숙종이 기사환국을 일으킨 근본 저의가 자신의 후계자를 조기에 확정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데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사환국으로 중앙 정계에 다시 등장한 남인은 權大運·睦來善·金德遠·閔黯 등이 중심이 되어 정국을 이끌어 갔다. 노론과 소론이 함께 중앙 정치무대에서 패퇴하여 견제 집단이 없는 상황에서 남인은 서인에 대한 처벌을 강화시키는등 정국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남인과 당시 왕비 장씨의 친정가가 연결되었다. 왕비 장씨의 오빠인 張希載가 환국 직전부터 민암·閔宗道·李義徵 등과 연결되었으며,0311)≪肅宗實錄≫권 20, 숙종 15년 정월 계미. 숙종 18년에 가서는 관례를 뛰어 넘어 총융사로 발탁되었다.0312)≪肅宗實錄≫권 24, 숙종 18년 3월 을묘. 역관출신으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던 장씨가의 인물들은 서울 중심부에 거대한 누각을 짓는 등 두드러진 행위를 하였다.0313)≪肅宗實錄≫권 25, 숙종 19년 6월 병술. 남인과 장씨가의 이러한 행태는 숙종에게는 달가운 일일 수가 없었다. 이러한 터에 숙종 19년 무렵에는 폐위된 인현왕후전 소속 궁인출신의 최씨가 새로 후궁이 되었고,0314)≪肅宗實錄≫권 25, 숙종 19년 4월 기해. 숙종과 최씨 사이에서는 낳은 지 두 달만에 죽기는 하였지만 왕자가 생산되기도 하였다.0315)≪肅宗實錄≫권 25, 숙종 19년 10월 병자 및 12월 임오. 남인과 장씨의 진출이 숙종 개인의 의지에 크게 힘입었던 만큼 또 다른 후궁에게로 숙종의 총애가 옮겨간 것은 이들의 지지 기반을 위협할 수 있는 요인이었다.

 남인의 정국 주도는 숙종 20년(1694) 3월 두 차례의 연이은 告變으로 급격히 끝났다. 숙종 20년 3월 왕이 대신과 비변사 신료들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우의정 민암이 咸以完이란 자의 고변을 아뢰었다.0316)≪肅宗實錄≫권 26, 숙종 20년 3월 신유. 함이완의 고변 내용은 소론계열의 前 承旨 韓構의 아들 韓重爀등이 남인이 물러가고 서인이 재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돈을 모아 장희재, 東平君 李杭 등 실권자에게 접근하여 신료들과 궁중의 동정을 엿보아 살피려 했으며, 노론계열의 金鎭龜의 아들 金春澤과 兪命一의 아들 兪復基와 兪泰基 등도 무슨 움직임이 있는 듯하나 그 내용을 잘 모르겠다는 정도였다. 관련자들을 잡아 일차 문초하였으나 대체로 그 내용을 부인하여 앞으로 국청을 설치하여 더 조사를 할 참이었다.0317)≪肅宗實錄≫권 26, 숙종 20년 3월 갑자. 그 직후에 幼學 金寅 등이 또 다른 내용의 고변서를 올렸다. 장희재가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한다는 것, 또 信川郡守 尹憘와 訓局別將 成虎彬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는데 大將이 참여하였으며 閔黯·吳始復·睦昌明 등 남인이 결탁되었다는 내용이었다.0318)≪肅宗實錄≫권 26, 숙종 20년 3월 정묘. 국청의 조사 결과는 그 내용은 김인이 남인 이의징에게 배척을 받자 그를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지어낸 허구라는 것이었으며 숙종도 이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0319)위와 같음.

 그러나 다음날인 4월 1일에 상황은 급전하였다. 국청의 조사 내용이 폐비 인현왕후의 복위와 왕후 장씨의 폐위문제와 고변자 함이완이 남인의 중심 인물인 민암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는 등에 이르자 숙종은 한밤중에 갑자기 備忘記를 내렸다. “민암 등이 서둘러 고변을 아뢰고 獄事를 확대하여 공주가에까지 미치려 한다. 임금을 우롱하고 搢紳을 함부로 죽이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參鞫한 大臣 이하 모든 관련자들의 官爵을 削奪하여 門外로 黜送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모두 絶島에 安置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비망기를 즉각 시행하지 않았다 하여 입직한 승지와 홍문관원뿐만 아니라 모든 승지와 삼사 관원들도 파직하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숙종의 급박한 조치로 결국 남인계의 영의정 權大運, 좌의정 睦來善, 영중추부사 金德遠과 삼사 관원들은 관작이 삭탈되어 문외로 출송당하고, 우의정 민암, 판의금부사 柳命賢, 지의금부사 李義徵·鄭維岳, 동지의금부사 睦林一 등은 모두 절도에 안치되었다.0320)≪肅宗實錄≫권 26, 숙종 20년 4월 무진. 이어서 그 날로 바로 남구만을 영의정에 除拜하는 것을 시작으로 5∼6일 사이에 왕명으로 서인들을 대거 관직에 기용하였다.

 이렇듯 갑술환국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발생하였다. 갑술환국은 붕당 사이의 힘의 대결이나 어떤 이념적 쟁점을 둘러싼 대립보다는 전적으로 숙종의 뜻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 때의 인사가 대개 숙종의 의지에 따라 왕명이나 特旨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숙종은 朴世采의 주장을 받아들여 노론과 소론 사이의 균형을 이루게 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0321)朴光用,≪朝鮮後期 ‘蕩平’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4).

 갑술환국으로 그 때까지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던 남인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직당하였다. 그 규모는 기사환국 당시의 서인이 당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남인은 이후 정조 연간 탕평 정국에 가서 일부 인사가 정조의 지우를 입어 다시 등장할 때까지는 중앙 정계에서 배제되었고, 서인이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4월에는 송시열에 대해서 그가 효종의 특별한 대우에 보답하려는 뜻이 돈독한 것으로 보아 기사환국 당시 원자 정호에 반대한 것은 한때의 망발일 것이니 그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내리도록 명하였고,0322)≪肅宗實錄≫권 26, 숙종 20년 4월 계유. 또 기사환국 직후 문묘에서 출향되었던 이이와 성혼을 다시 문묘에 배향함으로써 서인의 정국 주도 입지가 확인되었다.0323)≪肅宗實錄≫권 27, 숙종 20년 6월 기미.

 갑술환국 직후 숙종은 폐위되어 사제에 있던 인현왕후를 별궁으로 옮겨 군사들로 호위케 하고 廩料를 지급하게 하는 조치를 거쳐 복위시켰다.0324)≪肅宗實錄≫권 26, 숙종 20년 4월 무자·신묘. 그에 맞추어 왕비 장씨는 왕비의 璽綏를 거두고 다시 옛 작호 禧嬪을 내려주었다. 다만 세자가 조석으로 문안하는 예는 폐하지 않게 하였다.0325)≪肅宗實錄≫권 26, 숙종 20년 4월 기묘. 세자의 생모로서의 지위는 유지시켜 세자의 입지에 손상이 가지 않게 하려는 조처였다. 하지만 희빈 장씨는 결국 숙종 27년(1701) 인현왕후가 죽었을 때 그가 죽도록 저주를 하였다는 혐의(誣蠱의 獄)로 사사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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