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4. 붕당정치의 동요와 환국의 빈발
  • 2) 환국의 실상
  • (6) 병신환국

(6) 병신환국

 경인환국 뒤 5∼6년간은 여전히 관료 성향의 노론과 소론이 함께 정국 운영에 참여하여 균형을 이룬 형세였다. 그러한 균형은 숙종 40년(1714) 정월 尹拯이 죽으면서 최석정이 지은 그의 제문을 둘러싸고 대립이 날카로워지면서 깨어졌다. 윤증은 숙종 초년 노론과 소론의 분립 이후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는 山林이었다. 최석정은 제문에서 송시열을 침해하여 배척하였는데 “空言은 몸소 실천하지 못하였고, 高論은 이루지 못하였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이에 대해 노론계의 성균관 유생들이 먼저 나서서 송시열이 내세운 청에 대한 復讎 大義를 공언과 고론으로 비방한 것이요, 효종을 무함한 것이라며 최석정을 극력 공박하였다.0332)≪肅宗實錄≫권 55, 숙종 40년 8월 신사. 이에 대해 숙종은 최석정의 제문은 공적인 문서가 아니므로 조정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답을 하였다. 그러나 노론측에서는 최석정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고, 소론에서도 이에 대해 반박을 함으로써 노론과 소론의 다툼이 격렬해졌다.

 이러한 노소간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킨 것이≪家禮源流≫의 저작권 시비였다. 병자호란 직후 兪棨가 윤선거와 함께 家禮에 관한≪儀禮≫및 제가의 禮書를 정리하여≪가례원류≫라는 책의 初本을 만들어 이를 제자인 윤증에게 맡겼다. 이를 숙종 39년에 유계의 손자인 兪相基가 당시 우의정이었던 李頤命의 후원을 받아 간행하고자 하여 윤증에게 가지고 있는 中本을 달라고 하였으나, 윤증은 자신의 부친인 윤선거와 함께 만든 것이며 자신도 일부 보완하였는데 갑자기 간행을 이유로 달라고 하는데 의문을 품고 내주지 않았다. 이에 둘 사이에 분쟁이 생겼고, 유상기는 다른 데서 초본을 확보하여 책으로 꾸미면서 權尙夏의 서문과 鄭澔의 발문을 실었는데, 이들은 그 글에서 윤증이 스승을 배반하고 책의 저작권을 고집함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유상기가 간행 작업을 마치고 숙종 41년 11월에 왕에게 올렸다. 이에 대하여 숙종은 儒賢인 윤증을 비난하였다 하여 정호를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그의 발문을 쓰지 말도록 명하였다.0333)≪肅宗實錄≫권 56, 숙종 41년 11월 정유.

 이 문제는 노론과 소론 사이에 광범위한 쟁점으로 부각되었고, 해묵은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懷尼是非 문제로 번져 갈등이 깊어졌다. 숙종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아버지와 스승 가운데 아버지가 重하고 스승이 輕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윤증을 옹호하면서 윤증을 비난하는 노론계 인물들을 처벌하고,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는 노론의 중심 인물이었던 김창집을 좌의정에서 파직시키는 등 소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편이었다.0334)≪肅宗實錄≫권 57, 숙종 42년 3월 정미 및 윤3월 임신. 이러한 숙종의 지지에 힘입어 소론은 노론에 대해 더욱 압박을 가하면서 정국을 독점적으로 주도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론의 행태는 숙종의 불만을 사서 숙종 42년 7월 2일에 숙종은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갈등의 단서가 되었던, 숙종 7년 윤증이 송시열의 무원칙한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여 보내려 했던 편지<辛酉擬書>와 송시열이 윤선거를 우회적으로 비난한 내용의 묘갈문을 모두 써서 들이라고 하였다.0335)≪肅宗實錄≫권 58, 숙종 42년 7월 기미. 숙종은 그 글을 검토한 결과 윤증의 말이 너무 송시열을 억누르는 것이 많으니 허물이 없다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여러 사람들이 이를 따지는 것이 괴이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렸다.0336)≪肅宗實錄≫권 58, 숙종 42년 7월 계해. 숙종의 지지의 방향이 그 때까지 기울었던 윤증에서 송시열 쪽으로 바뀌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숙종은 이러한 판결을 내림과 동시에≪가례원류≫에 권상하의 서문과 정호의 발문을 다시 넣으라는 조치, 송시열의 묘갈명에는 윤선거에게 욕을 끼친 바가 없다는 판결도 내렸다. 이어서 김창집을 좌의정으로 제배하는 것을 비롯해 노론계열의 인물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정국을 주도하게 된 김창집은 8월 24일에 이르러 노론과 소론 각 붕당의 朝臣과 鄕儒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윤선거 문집의 인쇄 원판을 헐어버릴 것을 청하였다. 윤선거가 남인 윤휴와 제휴하여 효종의 처사를 무함하였음에도 이 책이 소론측이 윤선거를 계속 비호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라는 논리였다. 숙종은 즉석에서 이를 받아들여 윤선거 문집의 인쇄판을 헐어 없애라고 승정원에 명하였다.0337)≪肅宗實錄≫권 58, 숙종 42년 8월 신해.
≪肅宗實錄補闕正誤≫권 58, 숙종 42년 8월 신해.
더 나아가 노론계 인사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윤선거와 윤증을 ‘先正’이라 부르는 것을 금하였고,0338)≪肅宗實錄≫권 58, 숙종 42년 10월 경자 및 12월 을묘. 윤증의 서원을 새로 세우는 일을 금지하였으며,0339)≪肅宗實錄≫권 59, 숙종 43년 정월 병인.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官爵을 追奪하는 데 이르렀다.0340)≪肅宗實錄≫권 59, 숙종 43년 5월 임오.
≪肅宗實錄補闕正誤≫권 59, 숙종 43년 5월 임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송시열이 엮고 그 제자 권상하가 수정한≪朱子大全箚疑≫17책을 校書館에서 간행하게 하였고,0341)≪肅宗實錄≫권 58, 숙종 42년 9월 경진. 송시열의 서원 華陽書院과 송준길의 興巖書院의 편액을 숙종이 직접 써서 내리기도 하였으며,0342)≪肅宗實錄≫권 58, 숙종 42년 10월 경자. 송시열의 문집을 교서관에서 간행하도록 허락하기도 하였다.0343)≪肅宗實錄≫권 60, 숙종 43년 7월 병진.

 좁은 의미에서는 숙종 42년(1716) 7월 2일 숙종이 윤증의<신유의서>에 허물이 있고, 송시열의 묘갈명에는 윤선거에게 욕을 끼친 바가 없다고 판결하고≪가례원류≫에 권상하의 서문과 정호의 발문을 다시 넣으라고 한 조치를 丙申處分이라 하지만, 넓게 보면 그 이후 약 1년여 걸친 일련의 숙종의 조처를 아울러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병신처분으로 정국 주도 붕당이 소론에서 노론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정국 역시 급변하는 점에서 보면 이는 하나의 뚜렷한 환국으로서 이를 병신환국이라고 할 수 있다.

 병신환국은 해묵은 회니시비를 둘러싸고 심각해진 노론과 소론 사이의 대립과 분쟁에 국왕 숙종이 직접 관여하여 처분을 내림으로써 발생하였다. 이로써 소론은 그 학문적·정치적 이념과 명분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정국에서 소외된 반면 노론은 숙종의 인정과 지원을 받아 정국 주도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후 노론과 소론은 상대방을 중앙 정국에 공존할 수 없는 상대로 보게 되었다. 병신환국 단계에서는 이미 죽은 윤선거와 윤증 그리고 송시열 등에 대한 사후 평가를 숙종이 처분하는 형태였기에 노론과 소론 사이의 대립이 숙청과 죽음 등 극단적인 데로 치닫지는 않았다.

 윤증 부자의 관작을 삭탈한 지 두달쯤 지난 7월에 숙종이 관례를 무시하고 승지와 사관들도 배석하지 못하게 한 채 좌의정 이이명만을 불러 단 둘이 密談을 나누었다.0344)≪肅宗實錄≫권 60, 숙종 43년 7월 신미. 이른바 丁酉獨對이다. 이 때의 밀담 내용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독대 직후에 행판중추부사 이유,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이명 등 노론계 신료들만이 참여한 접견 자리에서 한 숙종의 언명에 따라 세자의 대리청정 문제였음이 알려졌다. 숙종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안질이 심해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해야겠는데 무언가 뜻대로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언표를 하였다. 이에 대해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당나라 및 세종이 문종에게 대리청정하게 한 조선의 고사를 들어 적극 찬성했고, 숙종은 그 날로 바로 하교를 내려 세자에게 대리정청을 명하였다.0345)위와 같음.

 독대라는 비상한 절차에서 비롯된 대리청정 조치에 대해서 소론측에서는 노론측에서 세자를 위태롭게 만들려는 모종의 음모가 있는 것으로 의심을 하였다.0346)≪肅宗實錄補闕正誤≫권 60, 숙종 43년 7월 신미.
≪俟百錄≫권 1, 숙종 43년 秋 7월.
갑술환국 이후 줄곧 세자를 보호하는 데 공이 큰 것으로 인정받던 관료적 성향의 소론 영중추부사 尹趾完이 이이명을 私人·私身이라며 독대를 공박하였으나, 숙종은 윤지완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물리쳤다.0347)≪肅宗實錄補闕正誤≫권 60, 숙종 43년 7월 기묘. 윤지완과 이이명 모두 성밖으로 물러가 대죄하였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독대와 대리청정을 둘러싸고 찬반 논의가 크게 일어나는 가운데 세자도 여러 차례 대리청정을 극구 사양하였으나 결국 대리청정은 실시되었다. 이후 숙종 46년 6월 숙종이 죽을 때까지 약 3년간은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에서 자신의 의지를 강력하게 투영하여 환국을 야기하며, 독대를 통해 대리청정을 하게 하면서까지 세자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한 숙종의 처사는 대단히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일으키게 되었다. 각 붕당들은 제각기 是非와 正邪를 분명히 하는 방향으로 정치운영론을 진전시켰고, 그 결과 상대방을 부정함으로써 대립과 갈등은 더욱 심각해져 갔다. 특히 숙종 사후에는 붕당 사이의 이러한 대립의 쟁점에 숙종의 뒤를 잇는 경종과 영조의 王位 승계문제까지 개입되어 忠逆을 다투는 상황으로 진전됨으로써 붕당 사이의 대립은 양보할 수 없는 싸움으로 발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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