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4. 붕당정치의 동요와 환국의 빈발
  • 2) 환국의 실상
  • (7) 신임환국

(7) 신임환국

 숙종 말년에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이 세자의 즉위를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결정적인 사유가 없는 한 세자의 즉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숙종이 죽고 세자-경종이 즉위하게 되자 소론은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노론에 대해서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경종은 숙종과는 달리 노론과 소론의 대립 구도에서 소론을 지지하면서도 각각의 사안들에 대해서 분명한 처결을 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교리 趙文命이 올린 붕당의 폐해를 논하며 임금이 표준을 세워 정국을 주도하라고 한 조언은 경종에게는 별반 실효가 없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0348)≪景宗實錄≫권 3, 경종 원년 5월 을축. 이러한 상황에서 정언 李廷熽의 상소를 빌미로 노론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던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이 경종 원년(1721) 8월에 儲嗣를 정하기를 청하여,0349)≪景宗實錄≫권 4, 경종 원년 8월 무인. 延礽君 昑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다.0350)≪景宗實錄≫권 4, 경종 원년 8월 기묘 및 9월 갑인·을묘. 이에 대해 소론측에서는 行司直 柳鳳輝가 경종의 나이가 아직 젊으므로 시기상조라고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0351)≪景宗實錄≫권 4, 경종 원년 8월 신사. 노소간의 쟁론의 대상이 되는 데 그쳤다.

 노론측은 세제를 책봉한 데서 그치지 않고 경종 원년 10월에 집의 趙聖復이 나서서 왕세제를 庶政에 참여시킬 것을 상소하였다.0352)≪景宗實錄≫권 5, 경종 원년 10월 정묘. 경종이 비록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는 하나 이 때 경종의 나이가 34세로서 아직 젊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경종의 왕권을 무시하는 주장으로서 무리가 없지 않았다. 노론의 의도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왕세제의 후계구도를 확고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대리청정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경종은 이러한 상황을 수습하기는커녕 대리청정을 시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함으로써 대립을 심화시켰다. 10월 17일에는 영의정 김창집,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趙泰采, 좌의정 李健命이 聯名으로 箚子를 올려 숙종 43년(1717) 당시 세자였던 경종의 대리청정 전례에 따라 대리청정에 관한 절목을 마련하였다. 이날 밤중에 대간의 탄핵을 받아 성밖으로 물러나 있던 소론계 우의정 趙泰耈가 궁궐에 들어와 왕을 만나 뵙기를 청하니 경종이 허락하였다. 노론과 소론의 주요 관료들이 함께 인견하는 자리에서 조태구는 대리청정을 극력 반대하여 경종의 결정을 번복하게 하였다.0353)≪景宗實錄≫권 2, 경종 원년 10월 갑술.
≪景宗修正實錄≫권 2, 경종 원년 10월 갑술.
이날의 결정을 계기로 소론은 노론에 대해서 공격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12월 6일에는 司直 金一鏡·朴弼夢·李明誼·李眞儒·尹聖時·鄭楷·徐宗廈 등 7인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를 ‘四凶’으로 지칭하면서 노론 일당을 역적으로 몰아 처벌을 주장하였고 경종은 이를 嘉納하였다.0354)≪景宗實錄≫권 5, 경종 원년 12월 임술.
≪景宗修正實錄≫권 5, 경종 원년 12월 임술.
그 날 이조판서 權尙游를 파직하고 남인 沈檀을 이조판서로, 소론 김일경을 참판으로 特除하는 등 주요 관원을 대폭 노론에서 소론으로 교체하였다. 9일에는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을 면직시키고 대리청정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우의정 조태구를 영의정에 제배하고 그의 추천을 받아 崔奎瑞를 좌의정, 崔錫恒을 우의정에 제배하였다.0355)≪景宗實錄≫권 5, 경종 원년 12월 을축.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이 노론에서 소론으로 급격히 바뀌면서 노론에 대한 소론의 정치적 숙청이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 무렵 인사문제를 비롯한 정국 주도 행태와 노론에 대한 처벌의 강온에 따라 소론은 온건한 성향의 緩論-緩少와 강경한 성향의 峻論-峻少로 분기하였다.0356)≪景宗實錄≫권 6, 경종 2년 정월 무신. 경종 연간에 정국을 주도하며 노론에 대한 공격을 가한 것은 준소계열이었다.

 경종 2년 3월 27일에 睦虎龍이 告變을 하였다. 鄭麟重·金龍澤·李器之·李喜之·沈尙吉·洪義人·金民澤·白望·金省行 등 노론 4대신의 子姪과 추종자들이 숙종 말년에 세자 곧 경종을 칼이나 독약으로 해하고, 또는 축출하기를 꾀하니, 이는 나라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로 적도들을 급히 토벌하여 종사를 안정시키라는 내용이었다. 또 말하기를 적도 가운데는 동궁을 매수하여 씻기 어려운 욕을 끼치려고 하는 자도 있으니 적도의 정상을 조사하여 누명을 신설하여 국본을 안정시키라고 하였다.0357)≪景宗實錄≫권 6, 경종 2년 3월 임자.
≪俟百錄≫권 5, 壬子 春.
이 고변으로 그로부터 약 두 달에 걸쳐 준소계열에서는 노론을 집요하게 공격하였고, 결국 고변에 거명된 노론계 인물들 상당수가 처벌을 받았다.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이명, 우의정 조태채, 좌의정 이건명 등 노론 4대신이 賜死되는 것을 비롯해 사형이 20여 명, 杖斃 30여 명, 絞殺 13명, 유배 114명, 自盡 9명, 연좌 173명에 이르렀다.0358)≪辛壬紀年提要≫彙考. 이에 반해 윤선거와 윤증 부자가 復官이 되고, 숙종 연간 소론을 이끌었던 南九萬·朴世采·尹趾完·崔錫鼎 등이 숙종 묘정에 배향되는 등 병신환국에서 부정되었던 소론의 정치·사상적 이념이 다시 회복되었다. 옥사에 관련된 인물들을 扶社功臣으로 錄勳을 하였다. 고변을 한 목호룡 역시 녹훈되어 東城君이라는 훈작을 수여받았다.

 경종 2년(1722)에 발생한 이 대규모 옥사를 壬寅獄事라고 부르는데 경종 원년 12월 김일경 등의 노론 4대신에 대한 공박에서부터 이 임인옥사까지를 辛壬換局이라 할 수 있겠다. 신임환국은 붕당 사이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아 나타난 결과이다. 복수의 붕당이 공존의 토대 위에서 서로 비판과 견제를 하며 균형을 유지하던 붕당정치의 정치운영 형태가 환국으로 부정되어 가는 추세에서 붕당 사이의 대립의 쟁점이 점차 是非와 正邪를 다투는 데로 옮겨 가다가 숙종 말년에는 왕에 대한 義理-忠逆을 다투는 데로 나아가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에는 염탐과 고변, 모함과 숙청, 살륙 등 이전의 유교 윤리와 행위 규범을 넘어서는 행태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붕당 사이의 시비를 가리는 처분을 통해 환국을 유도하며 정국을 이끌던 국왕이 이러한 붕당 사이의 싸움을 조정 통제하지 못하게 되자 붕당 사이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과 급격한 정국의 전환이 나타났다. 경종 연간의 신임환국은 그 절정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