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4. 붕당정치의 동요와 환국의 빈발
  • 2) 환국의 실상
  • (9) 정미환국

(9) 정미환국

 을사환국으로 등장한 노론은 임인옥사의 주역인 준소 김일경 일파의 나머지 인물들에 대한 처벌을 줄기차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노론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며 자신의 뜻대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노론의 요구를 수용하면 정국 운영의 주도권까지 노론에게 내어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즈음에 소론 완론계의 趙文命과, 노론계의 외척 閔鎭遠 등이 자주 탕평론을 개진하였다.0371)≪英祖實錄≫권 8, 영조 원년 10월 기묘·갑진. 조문명은 붕당을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나누어 보면서 시비를 혼란시켜 분별할 수 없게 만드는 당론을 부정하여 ‘破朋黨(붕당을 타파할 것)’을 으뜸가는 목표로 내세우는 탕평론을 제기하였다. 민진원은 겉으로는 시비의 분별을 우선하는 붕당론을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온건한 입장을 취하였다.0372)박광용, 앞의 책. 영조는 이러한 緩論 蕩平論을 받아들여 여러 차례 붕당을 경계하는 전교를 내렸다.0373)≪英祖實錄≫권 10, 영조 2년 12월 을해. 영조 자신이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렇게 영조가 정국을 주도한 지 2년 만인 영조 3년(1727) 7월에 영조는 다시 노론을 내치고 소론을 불러들이는 조치를 단행하였다.0374)정미환국 전후의 정국의 추이에 대해서는 박광용, 앞의 책 및 鄭萬祚,<英祖代 初半의 蕩平策과 蕩平派의 活動>(≪震檀學報≫56, 1983) 참조. 영조 자신의 特旨로 준소 유봉휘의 관작을 追復시키고, 노론 정호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출송하였다. 이어서 준소 5인의 처벌을 요구하던 영부사 민진원, 판부사 이관명, 우의정 이의현 등 노론 주요 인사 100여 명을 일거에 파직하고, 유배되어 있던 소론 인물들을 대거 석방하여 등용하였다. 다시 이광좌가 영의정, 조태억이 좌의정이 되어 정국을 이끌게 되었다. 이러한 정국 주도 붕당의 교체와 함께 노론과 소론 사이의 시비, 충역의 근거를 뒤바꾸는 조치도 이루어졌다. 노론 사대신은 다시 罪案에 들게 되었고 임인옥이 逆獄으로 규정되어 김용택·이천기 등 관련자들은 다시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상의 조치는 영조의 뜻에 따라 단 4∼5일 사이에 신속하고도 단호하게 이루어졌다. 이를 흔히 丁未處分이라 하는데, 정국 주도 붕당의 교체와 그에 따른 정국의 전환이라는 환국의 정의에 비추어 보면 이는 분명히 하나의 환국으로서 정미환국이라고 불러 마땅할 것이다.

 정미환국으로 이광좌를 중심으로 하는 소론계열이 정국을 이끄는 상황에서, 영조 4년(1728) 3월 李麟佐·鄭希亮 등이 戊申亂을 일으켰다. 무신란은 준소계의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 독살에 영조가 관련되었다 하여 密豊君 坦을 추대하여 일으킨 반란이었다. 영조로서는 왕권의 正當性을 부정당하는 심각한 문제였으나, 영조는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소론계를 앞세워 무신란을 진압하고서, 이를 계기로 좀더 강력하게 자신의 주장대로 정국을 이끌어갔다. 노론측에서는 討逆을 내세우며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소론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당론을 앞세우기보다는 왕권 앞에서 붕당은 타파되어야 한다는 종래의 완론 탕평론을 더욱 강력하게 제시하며,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함께 등용하는 調劑保合의 인사 정책을 추진하였다.

 무신란 이후 영조가 노론을 제어하는 논리는 “소론에 김일경과 같은 역적의 무리가 있다면 노론에도 鄭麟重의 무리처럼 역적의 성품을 가진 자가 있다”는 兩非論이었다. 이에 대해 노론측에서는 신임환국에서 처형된 노론 사대신에 대한 처분을 바꿔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 끝에 영조는 영조 5년 8월 13일에 ‘悖子逆孫’의 논리를 내세워 노론 사대신 가운데 자질들까지 연루되지 않은 趙泰采·李健命은 伸寃하고 김창집과 이이명은 그대로 죄안에 둔 이른바 己酉大處分을 단행하였다. 이는 노론과 소론이 함께 정국 운영에 참여할 계기를 제공하고자 하는 현실적 목적에서 나온 절충적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조치에 대해서는 노론과 소론 양측에서 불만을 갖기도 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영조 연간의 완론 탕평책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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