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2. 언관권·낭관권의 형성과 권력구조의 변화
  • 1) 언관권·낭관권의 형성
  • (1) 언관권의 형성

(1) 언관권의 형성

 성종초부터 士林은 중앙 정치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림의 정치진출에 대한 필요성의 제고와 성종의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요구가 맞물리면서 가속되었다. 사림의 중앙 진출은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정치 구조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이는 사림 진출의 가속화를 위해서 또한 사림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권력구조의 변화는 성종대 언관권의 강화와 중종대 낭관권의 형성으로 나타났다.

 15세기의 권력은 왕과 재상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 양자는 상호 보완적이었으나 길항관계에 있어 상호 갈등도 노출하였다. 갈등적인 모습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鄭道傳을 중심으로 하는 재상 중심 정치운영 입장과 이에 반대하는 李芳遠을 중심으로 왕실 중심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된 데서 잘 나타났다. 왕과 재상간의 권력을 주도하려는 노력은 여러 차례의 정변을 통해서 표현되었고, 제도적인 면에서 議政府 署事制와 六曹 直啓制의 대립으로 잘 나타났다.

 이 양자의 권력을 견제하는 제 삼의 권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간쟁과 탄핵의 임무를 하는 臺諫이었다. 조선 초기부터 대간의 활동은 적지 않았으나 그 실질적 기능은 많은 제한을 받아 언론의 방향이 당시 주도권을 장악한 측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향이 컸다. 이는 대간의 인사권이 왕과 재상에게 있어서 그 권력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간은 왕이나 재상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는 역할도 하였으나, 이는 독자적인 권력 기반이 없이 개별적인 忠義에 입각한 것으로 그 한계는 분명한 것이었다. 즉 재상이나 왕에 의해서 좌우되는 인사 이동이나 파직 등에 의해서 강력한 언사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였다.0402)崔承熙,≪朝鮮初期 言官·言論硏究≫(서울大 韓國文化硏究所, 1976).

 그러나 士林이 중앙 정치에 등장하여 성종의 지원을 받아 언론기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대간들은 부여된 임무에 상응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먼저 대간들은 箚子를 사용하는 방법을 확보하여 이를 통해서 격식을 간소화하면서도 자신들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었고, 圓議制를 관행화하여서 언론이 대간의 합의된 의견이라는 인식을 확보해가고 있었다. 또한 언론이 대신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 대간 발언의 근원인 言根을 캐물음으로 언사가 위축되기 쉬운 문제를 ‘不問言根’이라는 관행을 확보하여 언론의 토대를 확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0403)南智大,<朝鮮 成宗代의 臺諫言論>(≪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鄭杜熙,≪朝鮮 成宗代의 臺諫 硏究≫(韓國硏究院, 1989).

 이러한 성과를 통해서 兩司의 언론 기능이 강화된 위에 성종 중엽부터는 弘文館이 언론 기능을 하게 되었다.0404)이하 서술은 崔異敦,≪朝鮮中期 士林政治構造硏究≫ (一潮閣, 1994) 참조. 교육의 핵심은 君德을 輔養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왕의 정사가 이에 어긋날 때 홍문관원은 경연 중에 疏를 올려 의사를 표현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는 언론기관으로서가 아니라 경연의 연장선상에서 인정한 것이었다. 언론의 내용도 양사가 제안한 사항의 수용을 촉구하여 양사의 언론을 지원하는 데 그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홍문관은 양사 언론을 지원하는 데서 나아가 양사가 제기하지 못한 사안을 제기하기도 하였고,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양사의 언론의 태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는 홍문관이 언론기관이 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분명한 위치를 부여해준 것은 성종이었다. 성종은 재위 19년(1488)에 “나는 너희를 재상과 같이 대우하니, 대간과 같이 외부 일을 듣는 대로 말하라”고 홍문관의 적극적인 언사를 요구하였다.0405)≪成宗實錄≫ 권 223, 성종 19년 12월 계사. 이러한 성종의 요구는 파급 효과가 컸다. 대간들 역시 홍문관의 언사를 인정하였고,0406)≪成宗實錄≫ 권 223, 성종 19년 12월 갑진. 대신들도 홍문관에 淸議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제반 상황에서 성종 21년에는 대간이 홍문관을 ‘公論所在’라고 간주하였고, 성종 22년에는 “홍문관에 言責이 있다”는 지적까지 보이게 되면서 홍문관이 언론기관으로 인정되었다.0407)≪成宗實錄≫ 권 252, 성종 22년 6월 무신.

 홍문관의 언관화는 단순히 언론기관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양사 중심의 언론의 한계를 극복한 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는 홍문관의 인사가 弘文錄에 입각했기 때문이다. 홍문록은 재능있는 인사를 확보하기 위한 제도로, 과거에 합격한 인물들 중에서 재능있는 인사를 미리 선발해 홍문록에 올려놓고, 이들 중에서 홍문관원을 임명하도록 하는 특별 인사 방식이었다.0408)崔承熙,<弘文錄考>(≪大丘史學≫ 15·16, 1978). 이 방법이 주목되는 것은 홍문록의 선발이 홍문관의 參下官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는 점이다. 홍문관의 참하관들이 인사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으로 당시에 강조되기 시작한 능력보다 인품을 중시하는 인사 방식의 변화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인품을 중시해서 인사를 할 때 젊은 참하관들은 선후배 관계에 있는 후보자의 인품을 잘 알 수 있었으므로 선발에 참여할 수 있었다. 홍문록은 적절한 인사를 하기 위한 특별한 제도에 불과했으나, 홍문관이 언론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왕이나 재상들의 부당한 인사 관여에 대한 인사 보호 장치로 작용하였다. 이는 홍문관이 홍문록을 통해서 양사 중심 언론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인 인사 보호 장치의 부재를 극복하여 보다 강력한 언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위에서 홍문관은 양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삼사언론의 구심체 역할을 하게 된다. 언론이 활성화되면서 언관의 인사가 엄밀해졌고, 우수한 자원으로 인정받는 홍문관의 관원들이 성종 22년부터는 대간직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이것이 거의 일반화되면서 양자의 관계는 친밀하게 되었다. 또한 홍문관이 대간의 언사 태만을 탄핵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러한 탄핵이 인정되고 관행화되면서 홍문관의 ‘臺諫彈劾權’이 형성된다.0409)≪成宗實錄≫ 권 242, 성종 21년 7월 기사. 이로 인해서 홍문관이 양사를 지원하고 통제하는 삼사언론체제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홍문관을 중심으로 하는 언론체제를 형성케 하여 기존의 양사 중심의 언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한 변화 양상은 연산군 7년(1501)에 연산군이 “전에는 언론을 하는 자가 이렇게 지루하지 않았다. 대간이 비록 물러나고자 하지만 홍문관의 제약을 받아서 자유롭게 할 수 없다”라고 지적하거나 “근래의 대신의 행위는 대간이 논박하고 대간의 행위는 홍문관이 논박한다”라고 지적한 데서 잘 드러난다. 이는 홍문관을 중심으로 하는 언론체계가 형성되어 그 기능이 강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0410)≪燕山君日記≫ 권 41, 연산군 7년 11월 을유·갑술. 이러한 변화 위에서 성종 말기 이후에는 言官權이라고 칭할 만한 권력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권력구조의 변화는 새로운 정치세력인 사림의 등장과 확대, 정치 운영 방식의 변화 등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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