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2. 언관권·낭관권의 형성과 권력구조의 변화
  • 1) 언관권·낭관권의 형성
  • (2) 낭관권의 형성

(2) 낭관권의 형성

 사림은 성종대에 강화된 언론권을 바탕으로 중앙 진출을 확대하고 留鄕所 復立 등을 제기하면서 활동을 강화했다.0411)李泰鎭,≪韓國社會史硏究≫(지식산업사, 1986). 그러나 이러한 사림의 세력 확대를 꺼리는 왕과 훈구대신들은 사림을 탄압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사림은 사화로 그 세력이 위축되었으나 홍문관을 중심으로 하는 언론의 체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고, 中宗反正 이후에는 다시 세력을 확대하면서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0412)金 墩,<中宗代 言官의 성격변화와 士林>(≪韓國史論≫ 10, 서울大, 1984).
李秉烋,≪朝鮮前期 畿湖士林派硏究≫(一潮閣, 1984).
그러나 무오사화를 당하면서 사림은 정책이나 인사 등의 사안이 결정된 이후의 견제 장치인 언론권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새로운 대응 방향을 모색하였고 그 방향이 郎官權의 형성으로 나타났다.0413)崔異敦,<16세기 郎官權의 형성과정>(≪韓國史論≫ 14, 서울大, 1986).
金宇基,<조선전기 사림의 銓郞職 진출과 그 역할>(≪大丘史學≫ 29, 1986).

 조선 초기부터 낭관들은 정책을 입안하는 고유의 권한이 있었으나 그것은 실무자로서 행정적 기능에 국한된 것이었고, 사안의 결정에 가부를 논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종 말기에서 중종초에 걸치는 사림의 노력으로 낭관들도 부서내의 사안 결정에 참여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즉 낭관이 해당 부서의 일을 당상관과 같이 논의해서 결정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한다. 이러한 변화에 의해 확보된 낭관의 권한을 낭관권이라 지칭할 수 있다. 낭관권은 낭관 품계를 가진 5품 이하의 관원으로 그 정치적 비중이 큰 의정부와 육조 낭관들이 핵심이었다. 이는 宰相權의 핵심이 의정부와 육조의 재상인 것과 대응되는 현상이었다. 특히 인사를 다루는 銓曹郎官의 경우는 그 정치적 비중이 큰 까닭에 銓曹郎官權 혹은 銓郞權으로 별도로 칭하기도 하였다.

 낭관권 형성을 가능케 한 계기는 自薦制에서 찾을 수 있다. 자천제는 자기 후임을 자신이 천거할 수 있는 관행이다. 이러한 관행의 형성은 중종 19년(1524) “낭관의 薦望은 낭관이 하고 당상관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기록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0414)≪中宗實錄≫ 권 51, 중종 19년 6월 갑진. 자천제가 시행될 수 있었던 배경은 인사 이념의 변화 즉 능력보다 덕을 중시하는 인선의 강조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당시 잦은 사화를 통해서 德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덕은 같이 지낸 동료들에 의해서 잘 알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므로, 인선 방법이 동료들의 천거인 자천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자천제의 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시사를 주는 것은 조선 초기부터 시행된 藝文館의 자천제다. 예문관의 자천제는 直書한 史草의 내용을 비밀로 하기 위해 자신이 후임을 선발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관행이었다. 이러한 관행은 확대되어 성종대에는 이조·병조·예조의 낭관과 승정원의 낭관인 주서의 경우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성종대의 자천제는 훈구들의 세력이 강한 상황에서 낭관권의 형성에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각 부서에서 재상들이 낭관의 인사에 직접 관여하는 인사 비리의 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성종대에 언관권이 강화되어 재상을 견제하면서 낭관의 지위에 변화가 야기되었다. 특히 성종 25년(1494) 무렵에 홍문관원이 이조와 병조의 낭관으로 임명된 것은 중요한 변화였다. 홍문관원은 고유 기능을 위해서 처음에는 다른 부서의 진출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서서히 대간 낭관으로의 진출이 허용되었다. 이러한 허용은 당시 홍문관을 중심으로 하는 언관과 낭관이 긴밀히 연결되는 관행을 제공하였고, 긴밀한 관계로 언관의 지원을 받게 된 낭관은 그 지위를 상승시키면서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아갔다. 중종대에 이르러 자천제를 통해서 인사 영역을 확보하게 되면서 낭관권을 형성하는 데에까지 나아갔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 중종 3년(1508)에는 郎官家에 奔競禁止의 조치가 취해지는데, 이는 당상관만 분경금지의 대상이던 것과 대조되는 현상으로 낭관의 지위가 그 사이에 상승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중종 12년경에 이르면 이조낭관이 직접 인사에 간여하여 당상관과 대립하면서 자신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례가 보인다. 이는 이미 이 시기에 이르면 낭관권이 형성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현상은 육조의 낭관들과 의정부의 낭관들에게서 공히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들은 자기 부서에서 결정해야 하는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형성된 낭관권은 언관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낭관들은 언관들과 같은 품계를 가지고 있어 상호 이동하면서 밀접히 연결될 수 있었고, 또한 낭관은 언관의 인사를 장악하여 언관을 보호하였고, 언관은 낭관이 각 부서에서 당상관과 의견이 달라 다툴 때에 낭관의 입장에서 언론을 행하여 낭관을 지원하여 주었다. 그러므로 낭관들과 언관들은 강하게 결속하여 상호 지원하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결국 낭관권의 형성은 기존의 권력구조를 크게 변화시키는 것이었고, 사림은 이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세력과 활동 영역을 확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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