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2. 언관권·낭관권의 형성과 권력구조의 변화
  • 2) 권력구조의 변화와 사화 및 붕당
  • (1) 사화의 발생

(1) 사화의 발생

 사림에 의해서 추구된 일련의 권력구조의 변화는 기득권자인 훈구나 공신 재상들에게 상당한 위기감을 야기하였다. 그 결과 훈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림을 견제하였고, 전격적으로 배격할 수 있는 방법이 모색되어 폭력적 방법인 사화가 나타났다.

 연산군대의 戊午士禍는 홍문관의 언관화에 기초한 언권의 강화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성종은 유교의 이념에 충실한 왕이었고, 훈구의 견제라는 당면한 목적으로 사림을 지원하여 언권의 강화를 인정하고 협조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 훈구를 견제해야 하였던 것과는 달리 연산군은 사림의 견제로 상대적으로 훈구가 약해진 상황에서 즉위하였고, 유교적인 이념에 충실하지 않는 자신을 견제하는 대간의 언사를 귀찮은 것으로 인식하여 오히려 대간들과 대립하였다. 이로써 사림은 재상을 견제하면서 왕을 견제하여야 하는 이중적인 부담을 지게 되었고, 결국 왕과 재상의 결속에 의한 폭력적인 견제인 무오사화를 당하게 되었다.

 사화의 직접적인 단서는 金馹孫의 史草가 제공하였고 金宗直의 문인인 영남인들이 피해를 입었으나, 정치 구조의 면에서 보면 주로 언론권의 핵심 인물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는 사화가 왕권과 재상권을 견제하려는 사림의 언론권을 바탕하는 권력 강화에 대한 반동으로 야기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화 이후에 재상들은 언권의 강화를 문제삼아 홍문관의 언론 활동이나 홍문관이 가진 대간 탄핵권을 비판하였고, 홍문관이 중심이 된 삼사 언론 활동을 저지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언론의 기본 이념이나 덕을 강조하는 인사 이념의 타당성을 파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격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연산군 7년(1501)에는 “근래의 대신의 행위는 대간이 논박하고 대간의 행위는 홍문관이 논박한다”라고 지적될 만큼 홍문관을 중심으로 하는 언론 체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무오사화의 결과 언론직을 장악하고 있던 사림은 큰 피해를 입어 세력이 위축되는 형세를 보여주었고, 주도권은 왕과 재상에게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과 재상들은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하여 양자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왕과 재상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재상들은 궁중의 경비를 절약하고 왕의 방종을 견제하려 하였으나 연산군은 오히려 갑자사화를 야기하여 훈구재상들을 격퇴시켰다. 무오사화로 위축되었지만 언관직을 중심으로 왕의 방탕을 일정한 정도 견제하던 사림이 그 피해에 같이 연루된 것은 당연하였다. 그것은 권력의 집중이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과 권력 기반을 상실한 것이었다. 그 결과 연산군은 중종반정이라는 반격을 받게 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사림은 언론권을 회복하였으나 무오사화로 드러난 언관권의 한계는 극복되어야 했다. 이는 낭관권의 형성으로 나타났다. 중종대에 낭관권의 형성으로 권력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면서 사림의 권한이 확대되었고 그를 통한 사림의 진출이 강화되면서 훈구와 사림 사이에 새로운 긴장이 감돌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림의 개혁 독주에 위기 의식을 느낀 중종이 훈신들과 결탁하여 사림을 공격하자, 사림은 다시 사화를 당하였다. 己卯士禍 이후 공신세력은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사림의 권력 기반이었던 낭관권의 혁파를 기도하였다. 이들은 낭관의 인사 방식인 자천제나 낭관들의 정치적 결속을 문제 삼으면서, 낭관권을 규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일시적인 효과만 있었다. 광범위한 在地士族을 모집단으로 하는 사림의 중앙 진출을 막을 수도 없었고, 관행상 형성된 언론권과 낭관권을 쉽게 폐지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과 공신세력은 무오사화 직후에 보여주었던 주도권 장악을 위한 상호 대결을 피하고 지속적인 결속을 유지하려고 힘썼다. 그 결과 외척이 양자의 매개자로 등장하여 양자의 이해를 조정하면서 권신의 위치로 부상한다. 중종 말기의 金安老, 명종대의 尹元衡·李樑 등이 그 예였다. 권신은 당연히 언권과 낭관권을 장악하려고 노력하여 사림들과 갈등이 심하였다.

 명조초에 야기된 乙巳士禍는 이러한 정치 구조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인종과 명종의 즉위를 둘러싸고 외척간에 권신이 되기 위한 주도권 다툼이었다. 물론 을사사화에 직간접으로 사류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었지만 기본 대립 구도는 외척 대 외척의 갈등이었다. 싸움에 승리한 윤원형이 권신으로 등장하였고 정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낭관권과 언관권을 장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명종이 성장하면서 자신의 주도권을 위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량을 내세우자 윤원형이 물러가고 이량이 권신으로 등장하였다. 이량 역시 낭관권을 견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자 물러나게 되었다. 왕과 재상은 권신을 매개로 결합하여 사림을 통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계속 실패하였고, 오히려 사림세력이 더욱 강화되자 권신을 매개로 한 사림의 통제를 포기하고, 낭관권과 언관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사화는 정치 구조의 변화에 대항하여 기득권을 가진 이들의 반격으로 야기된 것이었다. 기득권자들은 사화를 통해서 사림이 정치를 주도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언관과 낭관들은 이미 확보한 권력구조를 유지하면서 선조대에 들어서 사림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결국 고유의 정치운영 방식인 붕당을 형성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