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3. 천거제의 시행과 관료 충원방식의 변화
  • 1) 천거제의 실시와 사림세력의 확대

1) 천거제의 실시와 사림세력의 확대

 권력구조가 변화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관료 충원방식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사림이 권력구조의 변화를 통해서 추구하였던 정치 주도권의 장악은 결국 사림세력을 정치권 내에 얼마나 진입시킬 수 있는가에 의해서 그 성패가 좌우되었다. 그러므로 사림은 재야 사림을 중앙 정치에 진입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미 진출해 있는 사림들은 과거제에 의해서 진출하였고, 재야 사림도 과거제를 통해서 진출할 수도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진출시킬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였고, 이것이 천거제로 구체화되었다.0425)이하 서술은 崔異敦,<16세기 士林派의 薦擧制 강화운동>(≪韓國學報≫ 54, 1989)를 참조.

 사림은 천거제의 기본적인 구상을 士 주도의 향촌 통치라는 사림의 정치이념에서 찾고 있었다. 사림들은≪周禮≫에서 그 이상형을 찾았는데,≪주례≫에는 士에 의한 향촌의 자치를 이상시하고, 이를 위해서 향촌을 교화시킬 것과 인재를 중앙에 천거하는 것을 士에게 권리와 의무로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 자치제의 운영이 향촌의 교화와 인재의 천거라는 양면에서 논의된 것이 주목되는데, 이는 지방의 인재를 중앙에 천거함으로써 지방의 의견을 중앙 정치에 반영시킬 수 있었으며, 또한 천거된 관원을 통해서 지방 자치를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천거제는 향촌 자치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일 방편이었다.

 천거제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는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도 가지고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집권자들은 천거를 통해 사류를 수용하겠다고 표명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장악한 이들은 중앙집권적인 정치 운영에 집중하였으므로 천거제는 실제의 의미대로 시행될 수 없었다. 천거의 이념은 유능한 관료들을 천거하는 保擧制로 운용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러 가지 폐단을 야기하면서 그 의미를 점차 상실해 가고 있었다.

 성종대에 사림이 언관직을 통해서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자, 지방 교화에 대한 관심을 유향소 복립을 통해 표명하면서, 동시에 천거제의 실시를 제기하였다. 천거제의 추진은 遺逸薦擧와 學生薦擧로 진행되었다. 사림은 보거제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유일천거의 실시를 먼저 추진하였다. 유일천거는 성종 9년(1478) 李深源에 의해서 그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성종 13년 曺偉에 의해서 거듭 제안되면서 유향소 복립운동과 같이0426)李泰鎭,≪韓國社會史硏究≫(知識産業社, 1986). 사림의 운동으로 본격화된다. 사림은 음서제나 보거제의 한계와 운영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방식인 천거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천거제의 실시는 훈구의 입장에서 볼 때 사림 세력의 강화로 연결되는 것이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훈구들은 같은 맥락에서 추진된 유향소의 복립은 허용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정치 세력의 변화에 영향을 줄 천거제의 실시는 계속 거절하였다. 사림은 연산군대에도 계속 노력하였으나 사화의 와중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이 들어서자 중종과 공신들은 정권의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사림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중종 2년(1507)부터 유일천거가 시행되었다.

 유일의 천거는 지방의 자치적 운영의 한 방편으로 추진되었으므로 향촌의 자치적 운영의 성숙에도 크게 영향을 준 것으로 이해된다. 지방의 선비와 학생들이 합의를 통해 향촌의 德望之士를 선발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향촌의 공론을 수렴하는 능력이 확대될 수 있었고, 특히 지방 수령에 준하는 관료를 직접 추천할 수 있게 되면서 향촌 자치기구의 영향력 역시 크게 신장되었다.

 유일의 천거제와 같이 학생의 천거제도 중종대에 들어서 실시된다. 학생천거제는 이미 세종대부터 그 비슷한 유형이 시행되고 있었다. 즉 세종대에 성균관 유생들이 적어지자 학생들을 유인하기 위한 방안이 여러 가지 시행되었는데, 그 중 한 방법이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천거하여 등용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당시 성균관의 주된 구성원이었던 고위 관직의 자제들이 蔭敍나 特殊兵을 통해서 관직에 진출하고 있었으므로 여전히 성균관은 비어 있었고, 그러한 사정은 성종 초반까지 동일하였다.

 그러나 성종 중반기부터 사림이 중앙에 적극 진출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사림이 진출하면서 성균관을 채우는 방안이 새로운 발상에서 제기되었다. 즉 성종 20년(1489) 趙之瑞의 건의에 따라서 지방의 사림으로 성균관을 채우는 방식이 건의되었다. 이 방법이 수용되어 시행되자 성균관은 활성화되었고, 사림들이 성균관의 주된 구성원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천거는 사림의 진출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으나, 아직 학생의 천거가 성적에 따르는 것이어서 능력보다 덕망을 중시하는 천거제의 이념과는 달라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종대에 들어서 유일천거제가 시행되면서 학생천거제도 시행된다. 이때에는 선발 방식도 유생들의 합의에 의해서 재덕을 겸비한 학생을 선발하여 정부에 천거하는 ‘成均館 議薦’의 방식으로 바뀌었다.0427)≪中宗實錄≫ 권 14, 중종 6년 6월 임인.

 유일천거와 학생천거는 그 시원은 달랐지만 성균관의 주구성원이 지방의 유생으로 바뀌면서 천거 대상이 유일천거와 다르지 않았고, 천거 방법도 공론에 의한 선발이라는 동일한 형태였으므로 이 양자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간이 흐르면서 이 양자는 같은 의미를 가졌고, ‘薦擧制’로 같이 지칭되었다.

 사림은 천거제의 실시를 확보했으나, 피천인들의 관직 서용은 새로운 문제로 남게 되었다. 그것은 피천인의 서용이 문음출신 서용과 대립되는 것이어서 재상들이 단순한 표방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피천인의 서용에 냉담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사림들은 천거제의 타당성을 피력하면서 언권과 낭관권을 추진력으로 문음출신의 진출을 견제하는 한편 피천인의 활발한 서용을 확보해갔다.

 그러나 피천인의 서용은 문음출신의 처우와 같이 非文臣이라는 지위에 머물러 소위 淸要職이라고 일컫는 중요한 직책에는 나아갈 수 없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림들은 이를 과거제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먼저 孝廉科의 제의로 나타났다. “孝하는 데서 군주에 대한 忠이 나온다”는 이념을 내세우면서 科目을 설정해 보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祖宗의 일이 아니다”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재상들의 반발이 강력하여 과목의 설치가 불가능하였다. 사림들은 이에 “祖宗朝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재상들의 반대 명분을 피하기 위해 別試의 양식을 빌어서 薦擧別試를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서도 재상들은 반대하였지만 논리적 명분이 약하였고 사림의 추진력에 밀려 결국 천거별시는 賢良科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천거별시의 자격 심사는 사림인 낭관들이 담당하였기 때문에 주로 사림들이 선발되었고, 특히 기존 관료로 선발된 이들은 천거로 관직에 나아간 이들이었다. 이것은 천거별시가 천거인들의 청요직 진출을 위한 자격 추인 절차였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己卯士禍를 통한 재상권의 반격에 의해서 천거제는 폐지되었다. 사화 이후에도 사림들은 낭관권과 언권을 유지하면서 천거제의 복치를 추진하였으나 중종 말기와 명종대에 걸친 권신의 등장으로 치폐를 거듭하였다. 선조대에 이르러 사림이 집권하면서 천거제는 복치되었고 ‘郎薦制’와 연계되어 정치 충원의 새로운 방법으로 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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