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3. 천거제의 시행과 관료 충원방식의 변화
  • 2) 붕당정치기의 천거제와 산림

2) 붕당정치기의 천거제와 산림

 선조대에 들어서 사림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천거제는 활성화된다. 사림은 자신들의 정치 이념에 따라서 자신들의 모집단인 재지사족을 공론 형성층으로 하여 간접적인 정치 참여를 허용하였고, 천거제를 통해서 사림의 직접적인 정치에 참여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이미 정치의 주도권을 사림이 확보한 만큼 천거제의 목적은 초기의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인사에 인품을 중시하고 이를 공론을 통해서 확인하여 서용한다는 기본 이념은 동일하였으나, 처음 천거제를 추진할 때 가장 중요한 목적이던 사림세력의 확대라는 목적은 해소되면서, 천거제는 사림정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목적에서 추진되었다. 즉 이를 통해 재야 사림을 수용하여 붕당정치가 사림을 모집단으로 하는 것임을 보이면서, 천거제는 집권 당파 나아가 붕당정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로 이용되었다.

 이 시기에도 천거제는 학생천거·유일천거제로 시행되었다. 학생천거는 성균관 유생들의 공론에 의해서 재덕이 있는 유생이 천거되었고, 유일천거는 지방의 사림들을 鄕論에 의해서 선발하여 수령과 감사를 통해서 중앙에 천거하였다. 당시의 遺逸은 遺逸之士 혹은 隱遁之士로 표현되기도 하였으나 山林之士라는 표현이 더욱 자주 이용되었다. 山林이라는 용어는 성종대 사림이 진출하면서 士林이라는 명칭과 같이 혼용되어 나타났다.0428)≪成宗實錄≫ 권 246, 성종 21년 10월 계해조에 보이는 山林이라는 용어는 그 한 예이다. 산림이나 사림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지방의 선비를 지칭한다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산림이라는 용어가 在地的인 성격이 더욱 강하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재지의 사류들이 중앙에 진출하여 관직을 가지면서 이를 지칭하는 용어로 재지성이 약한 사림이 더욱 선호되면서 산림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사림이 중앙에 진출하여 훈구나 권신과 싸우는 과정에서 일부 훈구가문의 관료들도 사림의 이념에 동조하여 사림파가 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사림이라는 용어는 在地 혹은 地方의 의미가 더욱 약해졌고, 특히 선조대 이후 중앙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사림이라는 용어는 전혀 지방의 선비라는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붕당정치기에는 재지사림이 그 재지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였고, 山林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지방의 선비는 모두 산림이었고, 천거를 통해서 중앙에 나아간 이들도 역시 산림으로 지칭하였다.0429)≪宣祖實錄≫ 권 7, 선조 6년 12월 정미·무신조에 보이는 ‘山林之士 本無資級’, ‘山林操行之士’, ‘山林行誼之士 非科目之比’라는 표현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시기 특이한 것은 학생천거와 유일천거 외에 이조낭관이 주도하여 실시한 郎薦制도 천거제의 일환으로 운영된 것이다. 낭천제는 낭관이 學行之士를 6품 이하의 관직에 천망한 제도로 선조대부터 나타난다. 낭관이 직접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은 서울 거주 유생이었고, 주로 성균관의 학생이었으므로 이를 ‘學生公薦’이라고도 불렀다.0430)≪宣祖修正實錄≫ 권 9, 선조 8년 7월. 낭천제가 실시된 직접적인 원인은 먼저 음서제의 문란에 있었다. 음서제는 고위 관료의 자녀에게 관직을 허용하는 제도였으나, 관료제가 정비되면서 관직을 주기 전에 일정한 시험인 取才를 치루어 일정한 자격을 심사하였다. 그러나 점차 취재가 형식화되어 문란해지면서 사림은 문음출신의 진출을 제한하고 새로운 인선 방식인 천거제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학생천거나 유일천거가 비정기적인 것이면서, 공론을 수렴하는 과정이나 이를 중앙에 올려 임명하는 과정이 번거로워 자주 실시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인사에 직접 관여하고, 낭관권의 형성 이후 공론을 수렴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낭관이 복잡한 절차없이 산림을 천거할 수 있는 낭천제가 실시되었다. 낭천제의 실시는 천거제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낭천제는 붕당의 와중에 정치적 쟁점이 되어 폐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낭관권이 강화되고 천거제가 활성화되는 상황에서 일정하게 유지된 것으로 생각된다.0431)위와 같음.

 천거제가 활발하게 시행되면서 이들 중 유능한 이들에게 6품직을 주는 것도 일반화되었다. 천거된 자에게 6품을 주는 관례는 중종대 이래 나타나고 있으나 붕당정치기에 들어서서 더욱 활발하게 나타난다. 선조 6년(1573) 李之菡·鄭仁弘·崔永慶·金千鎰·趙穆 등이 隱遁之士로 천거되어, 喪中에 있었던 조목을 제외하고는 모두 6품에 제수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0432)≪宣祖實錄≫ 권 7, 선조 6년 6월 신해·계측. 물론 일률적으로 6품을 주는 것은 과거에 급제한 이들보다 더욱 우대하는 것이어서 논란도 있었으나 일단 ‘특이한 자’는 선별하여 6품을 주는 것은 일반화되었다.0433)≪宣祖實錄≫ 권 7, 선조 6년 12월 정미·갑자.

 이러한 상황에서 산림에게 대간직을 주는 문제도 논의되었다. 선조 6년 경연 중 柳希春이 이미 중종대에 金湜이 천거되어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는 며칠 뒤 선조에 의해서 南行之賢者는 대간에 임명하라는 명이 내려지고,0434)위와 같음. 다음날 구체적으로 성혼과 정인홍이 적격자로 거론되어 성혼이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면서0435)≪宣祖實錄≫ 권 7, 선조 6년 12월 병자. 실시되었다. 이후 산림이 사헌부의 관원으로 임명되는 것은 일반화되었다.0436)禹仁秀,≪17세기 山林의 세력 기반과 정치적 기능≫(慶北大 博士學位論文, 1992).

 천거제가 활발히 시행되었고 산림이 사헌부의 직에도 임명되었으나, 과거출신자와 대등하게 인정되지 못하였다. 산림은 여전히 청요직에 임명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즉 산림은 중요 낭관직에 임명되지 못하였고, 홍문관과 사간원의 직은 물론 성균관 등 과거출신이 임명되는 곳에는 임명될 수 없었다. 사헌부의 직에 임명이 가능하였던 것은 사헌부에는 문과출신이 아니어도 가능하다는≪經國大典≫의 규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산림을 문과출신자들과 같이 대우하는 것은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선조 29년 金宇顒의 홍문관이나 예조에 천거인을 임명하자는 요구는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0437)≪宣祖實錄≫ 권 72, 선조 29년 2월 임자. 이러한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으나 천거제가 크게 활성화되면서 산림의 중용은 계속 문제가 되었고, 인조대에 들어서는 새로운 방법을 통해서 일부 수용된다. 그 방법이 산림직의 설치였다. 산림직은 청요직에는 문과출신을 임명하는 원칙과 산림의 우대라는 두 가지를 조화시키기 위한 고심의 소산이었다.

 산림직의 설치는 인조 원년(1623) 성균관에 司業을 설치하면서 시작된다. 인조반정 직후 공신인 金瑬·李貴 등은 金長生·張顯光·朴知誡 등 당시 대표적인 산림을 천거하면서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자리로 사업이라는 직책을 만들었다. 결국 사업직의 설치는 산림에게 문과직을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천거제의 활성화가 필요하게 되면서 절충안으로 되어진 것이었다. 사업은 종4품직으로, 이전에 산림을 우대하는 경우 6품에 임명하였던 관례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우대였다. 이후 효종대에는 정3품 당상관인 祭酒를 두어 산림을 더욱 높이 대우하였다. 물론 이러한 직책은 상징적인 것이어서 산림이 성균관의 실무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0438)禹仁秀, 앞의 책.

 이와 더불어 世子侍講院에도 산림직이 설치되었다. 세자시강원은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곳으로 유교적 정치 이념을 다음대의 군주에게 교육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부서였다. 인조 24년 金尙憲의 발의에 의해서 비변사의 논의를 거쳐서 정3품 당상관직인 贊善, 종5품직인 翊善(進善), 종7품직인 諮議 등의 3관직이 만들어졌고 처음으로 찬선에 金集, 익선에 宋時烈, 자의에 權諰가 임명되었다.

 이러한 산림직의 설치는 천거제의 활성화를 위한 노력의 결과였고, 사림을 대표하는 중요한 사림이 임명되는 것으로 관행화되면서 매우 비중있는 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산림직의 설치 자체가 산림에게 문과의 직을 줄 수 없다는 기본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 설치 부서도 실권과는 거리가 있는 상징적인 자리여서 그 한계는 명확하였다.

 이러한 한계는 천거제 시행의 목적이 변한 것과 깊이 관련되는 현상이었다. 즉 천거제가 사림의 세력을 결집하는 데 이용되던 상황과는 달리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향에서 이용되면서 산림의 실제적 기능 역시 한정되었다. 앞에서 살핀 산림직의 설치 과정도 인조반정 이후 취약한 반정의 명분을 보완하는 일련의 노력과 밀접히 관련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붕당정치하에서는 천거제를 과거에 상응하는 현량과와 같은 제도로 만들려는 노력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과거제를 보완하는 한계 내에서의 활성화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인조 17년(1639) 대사성 李敬輿가 매년 각 지방에 일정 액수를 정하여 정기적으로 천거제를 시행하자고 제의한 것이나,0439)≪仁祖實錄≫ 권 38, 인조 17년 4월 임진. 숙종 19년(1693) 이조판서 李玄逸이 科擧와는 별도의 액수를 정하여 천거를 실시하자는 제의0440)≪肅宗實錄≫ 권 25, 숙종 19년 11월 임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제의는 천거제를 상설적으로 해보자는 수준의 제안이었지만 이 정도의 제안도 지속적으로 수용되지 못하였다.

 천거제는 기본적으로 과거제를 보완하는 수준에서 운영되었지만, 이것은 여전히 사림 정치이념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였고, 이를 통해서 많은 산림이 정치에 진출하였다. 또한 진출한 산림은 재야의 산림을 대표한다는 상징성으로 인해서 정치적 영향력도 적지 않았다. 대표성은 특히 산림직에 임명된 소수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고, 이들은 유교적 명분과 관련되는 정치 사안에 대해서는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선조대 성혼, 광해군대 정인홍, 인조대 김장생, 효종·현종대 송시열, 숙종대 許穆 등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정권의 정당성과 명분을 제공하는 한편 정치 상황에 따라서 막후 조정이나 정국을 주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산림의 정치적 역할은 사류를 대표한다는 명분에서 가능하였고, 이러한 대표성은 현실적으로 여론을 수렴하여 공론을 형성하고, 이를 붕당의 운영에 반영하는 과정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산림의 정치적 역할은 붕당정치 상황에서 유지되는 것이었고, 숙종대 이후 붕당정치 체제가 깨어지고 영조대 이후로는 공론의 수렴까지 불가능해지면서 축소 형식화되고 말았다. 이는 사회경제적으로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어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시대적 상황이 전개되면서 정치 충원 방식도 새롭게 마련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崔異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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