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4. 공론정치의 형성과 정치 참여층의 확대
  • 3) 공론정치의 활성화

3) 공론정치의 활성화

 선조대 이후 사림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공론정치는 활성화된다. 사림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언관권과 낭관권이 확고해졌고, 이를 통한 공론의 수용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또한 사림이 공론 형성층으로 인정되어 성균관이 공론의 소재이며 재야사림이 공론 형성층이라는 것, 즉 공론이 草野에 있다는 것0454)≪宣祖實錄≫ 권 3, 선조 2년 6월 신사.이 분명하게 공인되었다. 특히 붕당정치가 형성되면서 각 당파가 공론을 정통성을 부여하는 존립 근거로 삼았으므로 공론은 붕당정치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정치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러므로 공론은 대신이나 왕조차도 따라야 할 것이라는 대전제가 형성되어, 모든 정치 사안이 당연히 공론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하였다. 이러한 전제가 표방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왕이나 대신이 사안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선조 21년(1588) ‘卜相’의 문제가 있자 선조는 재상들에게 공론이 어떤 사람을 뽑기 바라는가를 물었고, 재상들 역시 이에 대한 回啓에서 공론을 참작하여서 재상을 뽑겠다고 말한 사례0455)≪宣祖實錄≫ 권 22, 선조 21년 5월 계사. 당시의 대화에는 外議가 어떠한가 묻고 있다. 여기서 外議는 조정 밖의 공론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공론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를 볼 때 공론정치가 실제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공론의 활성화 상황은 일일이 사례를 들어서 거론할 수 없는데, 그 대강의 추세를 짐작케 해주는 현상이 朝報와 通文의 활성화였다. 조보는 정치에 대한 소식지로 공론의 형성을 위한 정보 전달의 역할을 하였다. 조보가 언제부터 나타났는지 분명치는 않다. 그러나 초기의 조보의 기능이 주로 정부에서 결정한 일을 언론기관에 알리는 역할을 하는 데서 출발한 것으로 보아 언론기관이 활성화된 성종대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발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공론이 활발하게 형성되면서 중종대부터는 중앙 정치의 논의가 조보를 통해서 외부로도 나가서 공론 형성을 위한 정보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정은 중종 10년(1515) 대사헌 權敏手가 국가의 비밀을 점거하지 않아 외인이 먼저 안다고 지적하면서 조보를 금할 것을 요청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즉 공론이 활성화되면서 정치 결정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하게 되었고, 조보를 빌미삼은 비공식적인 정보의 유출이 드러나자, 국가 비밀의 누설이라는 차원에서 문제로 제기된 것이었다. 그러나 공론이 활발해지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조보를 금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권민수의 발언에 대해서 사림은 비난하였고, 중종도 “조보의 일은 예로부터 있어 왔으니 비밀히 해야할 일은 승정원에서 알아서 비밀로 하는 것이 가하다”고 조보의 금지를 허락하지 않았다.0456)≪中宗實錄≫ 권 22, 중종 10년 5월 무자.

 그러나 아직 당시의 조보는 조정에서 결정된 일을 승정원에서 주관하여 의정부나 대간 등 정부기관에 알리는 기관과 기관 사이의 연락을 하는 것이 공식적인 기능이었다.0457)≪中宗實錄≫ 권 22, 중종 10년 5월 무자 및 권 38, 중종 15년 3월 갑인. 그러나 조보의 역할은 점차 활성화되었고, 중종 후반에는 조보의 역할이 기관 사이의 연락에 그치지 않고 재상 등 개인에게도 보내지게 되었다.0458)≪中宗實錄≫ 권 86, 중종 32년 정월 병신. 이러한 상황에서 조보를 통한 정보의 전달은 더욱 활성화되었고, 선조대에 이르면 지방에 거주하는 사림도 조보를 구해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0459)柳希春,≪眉巖日記草≫ 1책, 정묘 10월 9일조 기사에 의하면 전라도에 있는 유희춘이 5일자 조보를 받아보고 있으며, 동월 12일조의 기사에 의하면 6일자 조보를 받아보고 있다.≪宣祖實錄≫ 권 6, 선조 5년 5월 기묘조에 의하면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서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조보의 활성화 추세는 선조 12년(1579) 조보를 활자로 인쇄한 사례를 통해서 확인된다. 조보가 일반화되면서 필요한 수량이 늘자 일일이 붓으로 쓰는 것이 번거로웠고, 선조 12년 서울의 ‘識者遊食人’들이 조보를 인쇄하여 各司와 외방의 邸吏들에게 매매할 것을 계획하고, 의정부와 사헌부에 허락을 얻어 수개월간 판매하였다.0460)≪宣祖修正實錄≫ 권 12, 선조 11년 2월. 이러한 조치는 비록 수개월만에 중단되었으나, 인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수용되었던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사태는 조보를 인쇄하여 판매하는 것이 이득을 남길 만큼 조보를 보는 수효가 활성화되어 있음을 보여주었고, 또한 ‘식자유식인’이라는 특정한 자격을 가지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인쇄를 허용할 만큼 조보는 대중적으로 공개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보의 활성화는 정치의 문제와 현안을 널리 알게 하여 공론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조보가 중앙 정치의 정보를 전달을 통해서 공론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면, 通文은 지방의 공론을 수렴하는 장치로 작용하였다. 향촌에서도 역시 향촌의 공론인 鄕論을 바탕해서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공론 운영 체계가 뚜렷하게 형성되었다. 향론에 입각한 향촌의 운영이 구체적으로 향촌의 행정을 통해서 관철되었으며, 심지어 지방의 교육 관리인 訓導도 향론에 의해서 천거하고자 하였는데,0461)≪宣祖實錄≫ 권 7, 선조 6년 12월 정미. 이는 중앙의 고유 권한인 관리의 인사에 자신들의 의견을 직접 반영하겠다는 의도로 당시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수령의 유임을 요구하는 상소와 더불어 재야사림의 자치 운영 의식을 짐작케 한다.

 특히 재야사림들은 지방의 공론을 수렴하여 중앙 정치의 문제를 직접 거론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이 활성화되면서 나타나는 것이 통문이었다.0462)이하 서술은 다음의 글을 참조.
金東洙,<서원통문의 공론성과 서원의 정치세력화의 요인>(≪歷史學硏究≫10, 1981).
李樹健,<朝鮮後期 嶺南儒疏에 대하여>(≪斗溪 李丙燾博士 九旬紀念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7).
薛錫圭,≪16∼18세기의 儒疏와 公論政治≫(慶北大 博士學位論文).
향촌에서 조보를 통해서 입수한 중앙 정치의 현안에 의견을 표시하고자 할 때, 향촌의 대표들은 통문을 돌려서 의견을 수렴하였다. 통문을 발송하는 주체는 향교나 서원 또는 각 문중 등이 될 수 있고, 그것을 통보 받는 곳도 향교나 서원·문중 등이었다. 통문이 돌려지는 범위는 사안에 따라서 달랐는데, 적게는 읍 단위에서 그치는 것도 있었으나 크게는 도 단위까지 돌려졌다. 심한 경우는 성균관이 중심이 되어서 8도에 통문을 돌리는 경우도 있었다. 통문에서 거론되는 사안은 적게는 한 고을의 민폐의 시정을 촉구하는 내용에서부터 크게는 붕당정치의 중요 현안에 대한 의견의 개진까지 다양하였다. 통문을 통해서 연락을 받은 사림들은 疏會를 열어서 상소할 내용을 결정하고 상소문을 작성하여 연명하여 올렸는데, 사안에 따라서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렀고, 심한 경우는 만 명을 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통문은 활발하게 돌려졌고, 지방 향론을 수렴하는 정치로 정립되었는데 이는 공론 정치의 활성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조보와 통문의 활성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공론 정치의 활성화는 17세기말 붕당정치의 긍정성이 소진되면서 위축된다. 이미 사회경제적으로 성장한 民이 정치의 참여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士論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를 운영하는 공론정치는 그 긍정성을 상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이러한 요구를 외면하고 오히려 사론마저도 차단하는 탕평과 세도정치라는 반동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사회 세력이 정치 참여층으로 인정되고 이들의 의견이 공론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였다.

<崔異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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