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5. 중앙 군영제도의 발달
  • 4) 붕당정치와 군권
  • (2) 붕당정치 발전기의 군권

(2) 붕당정치 발전기의 군권

 인조반정은 서인에 의하여 주도된 것이었으나 서인세력과 남인세력 등이 공존하는 붕당정치의 발전기에 속한다고 보여진다.0543)李泰鎭, 앞의 책 참조. 어느 때나 쿠테타에는 군사력이 동원되는 것이 상식이다. 따라서 인조반정에 있어서도 주도세력인 李貴·金瑬·李曙·申景禛 등의 서인들에 의한 私募軍 1,200명 정도가 동원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 같이 그리 많지 않은 군사력으로 반정에 성공한 것은 당시 관군의 주력이었던 훈련도감군이 반정군에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음으로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정초기에는 왕권도 물론이지만 반정을 주도한 서인세력의 정치적 기반도 확립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따라서 왕권은 왕권대로, 서인세력은 서인세력대로 정치운용의 배경이 되는 군권의 장악이 필수적인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광해군때 소외되었던 남인세력과의 연립에 의한 서인 주도정권을 원했던 듯하다. 그러나 반정 주도세력이 동원했던 사모군의 처리라는 난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인 주도세력들은 인조의 여러 차례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왕권 수호라는 표면적인 이유를 들어 이들을 公兵化하는 데 성공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호위군관을 중심으로 한 호위청의 설치인 것이다.0544)李泰鎭, 위의 책 및 車文燮, 앞의 글(1981) 참조. 특히 반정에 공로가 컸던 4대장 2당상관들은 일정한 수의 자기 사모군을 공병화하는 동시에 이를 기반으로 사실상 정국을 주도했다. 이외에도 사적인 군사기반을 공인받은 자가 무려 12인에 달하고 있음을≪朝鮮王朝實錄≫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이는 남인과의 연립정권이라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호위군관을 거느린 서인에 의하여 정국이 주도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조정권은 광해군때와 달리 排後金 向明政策으로 일관함으로써 북방족에 대한 대비책으로 군사력을 강화해야 하는 필연성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조 2년(1624) 李适의 亂이 일어나게 되자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어영청·총융청·수어청 등의 중앙군영이 필요에 의하여 설치되기 시작하였고 이들 군영들은 호위군관들에 의하여 조직되고 훈련되었으니 여기서 같은 정파 안에서 군권 장악을 위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비록 남·서인의 연립정권이라고 하나 사실상 호위군관을 배경으로 서인세력에 의하여 군영체제가 이루어지고 같은 정파 안에서도 정국을 주도하기 위하여 필요한 군영설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남인세력은 제외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3군영 설치의 표면적인 이유는 왕권의 수호와 수도권 방어 및 후금과의 대립이란 국내외 정세를 내세웠음은 당연하다.

 이러한 이유를 바탕으로 이괄의 난 때 長湍軍을 통솔한 경험이 있던 李曙는 경기 군사를 재정비하여 총융청 창설을 주도했다. 또한 李貴는 새로운 국왕 수호 및 수도 방어군으로 어영군을 창설하였다. 특히 이귀는 沈器遠과 더불어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입수군을 조직하여 수어청을 설치하였는데 이들 신설 군영의 기간요원은 그들의 호위군관들이었다.0545)위와 같음.

 그러나 같은 반정의 핵심공신이면서도 중앙군영 창설에 참여하지 못했던 金瑬·金自點 등은 지방군에 대한 軍令權을 장악함으로써 정치세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즉 인조정부는 광해군대와 마찬가지로 북방의 후금에 대비하여 서북도의 산성 방위체제를 굳히는 등 도체찰부체제를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면서 김류·김자점 등이 이들 지방군에 대한 군령권을 확보하여 정치적으로 같은 정파이면서도 중앙군영의 군권을 장악한 이귀나 이서 등과 대립하는 처지에 섰던 것이다. 특히 김류와 이귀의 군권싸움은 정묘호란을 계기로 더욱 첨예화하였다. 이때 김류는 도체찰사 張晩의 휘하에서 부체찰사로 있었는데 下三道로부터 자원하여 인조를 江都로 扈駕한 私砲手를 중심으로 호위 군영을 창설하려 했다. 그러나 이귀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이들의 본영은 어영청으로 하되 體府衙兵이라 하여 김류의 體察府에 소속하도록 하였다.

 뒤에 김류가 도체찰사가 되면서 또 한 사람의 소외자였던 김자점과 더불어 유사시에 동원되는 지방군의 군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서인 내부에서 이 같이 양분된 군권은 병자호란때 후금을 방어하는 데 실패하였고 淸의 간섭에 휘말리게 되었다. 특히 김류·김자점세력은 反淸에 젖어 있던 사림의 지지를 상실하고 현실 긍정의 미봉책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호란 이후의 정국은 반청의식이 더욱 고조되어 현실 긍정의 미봉책은 金集·宋時烈 등의 신진사류와 남인계열의 사류인 許積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김류계열의 현실 긍정 세력과 사류의 지지를 얻은 李貴의 아들 李時白·李時昉 형제와 심기원 등의 반청세력의 군권과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러한 군권의 장악을 중심으로 정치국면도 친청·반청의 양대세력으로 나뉘었다.

 인조 말기 친청·반청세력의 정국주도를 위한 갈등은 심기원의 獄, 昭顯世子의 早死, 姜嬪의 獄 등으로 나타났다. 군권도 청의 징병에 동원되었던 어영군은 친청파인 김자점세력이 장악하였고 수도권 방어를 위하여 강화되었던 수어·총융청은 반청파인 이시백·시방 등에 의하여 장악되었던 것이다.

 인조말∼효종초에는 김자점 등 친청파에 의하여 정국이 주도되었으나 효종 3년(1652) 이후 청의 간섭에서 서서히 벗어나면서 친청파들이 숙청되고 이후의 정국은 사림의 崇明思想과 결부된 반청세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것이 북벌계획의 강력한 추진으로 나타났던 것이다.0546)車文燮,<孝宗朝의 軍備擴充>(≪朝鮮時代軍制硏究≫, 檀國大 出版部, 1973). 북벌정책을 본격적으로 착수한 단계에서는 서인·남인을 초월한 무신의 등용이 추진되었다. 서인계열의 李浣, 남인계열의 柳赫然 등의 무장으로 하여금 어영군·훈련도감·금군 등의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등 군비확충에 서인과 남인들이 당색을 초월한 초당적 입장에서 대처하였다. 효종의 이 같은 군비확충 내지는 강화책은 중앙군영이나 금군의 증강으로 왕권 강화에는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국가재정을 돌보지 않은 것으로, 당시 청에 대한 ‘城下之盟’의 굴욕을 씻는 데에 사실상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따라서 효종이 죽고 현종이 뒤를 이으면서 사실상 북벌정책의 포기 내지는 후퇴를 가져오는 형세로 발전하고 다만 왕권 강화에 역점을 둔 군권의 향방이 주목되었다. 현종은 이른바 禮訟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는 인조반정 이후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던 서인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예송을 이용하였다.0547)李迎春,<服制禮訟과 政局變通>(≪國史館論叢≫ 22, 國史編纂委員會, 1991). 즉 현종은 2차 예송에서 서인 대신들이 효종을 끝내 衆子로 고집하는 것은 왕실을 무시하는 처사로 받아들여 도승지를 비롯한 近侍職에 남인을 다수 등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현종이 죽고 나이 어린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서인세력이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숙종초에는 비록 서인계열이기는 하나 비주류에 속했던 宗戚 金錫冑 등을 등용하여 군사문제를 맡겨 왕과 왕실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다.0548)李泰鎭, 앞의 책. 김석주의 등용은 인조 이래로 서인세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왕실이 믿을 수 있는 종척세력과 제휴할 수밖에 없었던 왕권의 제약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같은 현실에서 남인은 북벌을 명분으로 한 都體察府의 復設로 권력 장악을 적극화시켰다. 숙종 즉위초 남인인 尹鑴가 당시 중국에서 吳三桂의 난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城下의 盟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도체찰부의 복설을 요청하였다.0549)위와 같음. 그러나 이러한 윤휴의 주장은 서인에 의하여 권력장악을 위한 의도라고 비난되었다. 실제 도체찰사는 영의정이 겸하도록 되어 있어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인 許積이 도체찰사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서인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듬해인 숙종 원년(1675) 정월에 도체찰부가 복설되어 영의정 허적이 도체찰사를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체찰사에는 이의 복치를 강력히 주장했던 윤휴 대신 서인 비주류의 종척인 수어사 김석주를 임명함으로써 정치권력을 분산시키려고 기도하였다. 이러한 권력 분산의 현상은 중앙군영에 대한 통제권에도 엿볼 수 있다. 즉 남인은 현종때의 2차 예송에서 승리한 후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그 영향아래 두었으나, 수도외곽 방위군영인 수어청과 총융청은 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남인은 도체찰부의 설치를 계기로 도성 밖의 군사력인 수어청과 총융청까지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開城의 大興山城을 축조하여 북방비어의 出陣處로 삼는 동시에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군관을 동원하여 그 곳의 屯軍을 훈련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조처는 서인의 중진들은 물론 서인 비주류인 김석주 등도 크게 반발하여 한때 도체찰부가 폐지된 일까지 있었다. 이는 한 마디로 서·남인간의 군권 경쟁이 치열했음을 말해 준다. 이 사이 부체찰사 김석주는 수어사에서 어영대장으로 옮기면서 남인이 대흥산성을 근거로 역모를 도모하였다고 고변하고 숙종 6년 庚申大黜陟을 주도하여 남인세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김석주는 이후 대흥산성의 管理使가 되어 사후 처리를 전담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강화도에 墩臺를 쌓아 방어시설을 강화하고≪璿源錄≫의 편찬을 주관하여 이를 강화도에 비치하였다. 이와 같이 김석주가 강화도의 邊備를 강화한 것은 남인의 대흥산성 축조와 때를 같이 했으며 여기에다≪선원록≫을 비치한 것은 남인세력에 대한 견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서·남인의 군권을 둘러싼 권력 장악의 소용돌이에 숙종이 직접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경신대출척 이후로 생각된다. 숙종은 13세에 즉위했기 때문에 실제 정치적 판단력을 갖추게 된 것은 이 이후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후 숙종은 여러 차례 換局의 정치 정국을 이끌면서 왕권 강화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정국의 추이에 따라 창설된 군영이 숙종 8년에 설치된 금위영인 것이다.0550)車文燮,<禁衛營硏究>(≪朝鮮時代軍制硏究≫, 檀國大 出版部, 1973). 물론 금위영 설치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이는 당시 서인주류와 손잡고 숙종의 후원을 얻은 병조판서 김석주였다. 그는 종래의 정초청과 훈련별대를 통합하여 훈련도감의 長番兵을 감축한다는 명목 아래 遞番交代로 편성된 금위영을 탄생시켜 이른바 후기 중앙의 5군영체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금위영의 주력은 훈련별대였으나 그 임무와 지휘체제는 정초청의 것을 물려받아 병조판서가 대장을 겸하고 대궐 밖의 숙위를 주임무로 삼게 하였던 것이다.

 군권경쟁을 배경으로 하는 정국의 추이는 혼미를 거듭하였다. 즉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시대적인 상황은 숙종으로 하여금 경신환국(6년)·기사환국(15년)·갑술환국(20년) 등 환국정치를 이끌게 하였고 이 사이에 서인·남인 정파간의 권력 쟁탈이 이어졌다. 이러한 정세아래 군액의 감축과 양역부담의 견감 등을 토의의 대상으로 하는 良役變通의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오히려 군액은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양역의 부담도 가중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숙종 30년(1704) 12월에 있은 군제개편·軍布均一·軍額裁減 등의 소변통이 있기는 했으나 근본적인 대변통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0551)鄭萬祚,<肅宗朝 良役變通의 展開와 良役對策>(≪國史館論叢≫ 17, 國史編纂委員會, 1990).

 뿐만 아니라 금위영 창설 이후의 조선 왕조는 북방 의식이 서서히 약화되면서 상대할 적이 없어지는 국제정세로 인하여 지방 군사조직은 거의 유명무실화됨으로써 군권경쟁은 중앙군영을 중심으로 왕권과 정파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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