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5. 중앙 군영제도의 발달
  • 4) 붕당정치와 군권
  • (3) 탕평론과 군권

(3) 탕평론과 군권

 숙종대의 환국정치는 종래의 양당공존체제인 붕당정치체제가 무너지고 붕당간의 배타적 대립이 심각하게 전개되어 숙종 자신도 이를 탕평론으로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숙종때의 탕평론은 붕당간의 세력조정 보다도 붕당 그 자체를 깨어서 왕권강화에 집중되도록 하려 했다. 즉 숙종대에도 몇 차례 탕평의 諭示가 있었으나 이는 종척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집권 붕당을 환국으로 교체하는 등의 방식을 택함으로써 붕당간의 분쟁을 가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에 따라 숙종 중기 이후에는 사실상 정치 주도세력은 서인으로 넘어가고 이들은 다시 노론·소론으로 분리되면서 군권 경쟁도 주로 군액감축·양역변통을 통하여 자기 주장을 구체화시키면서 서인 내부에서의 정치세력의 부침으로 일관되었음을 볼 수 있다.

 탕평론이 정책으로 추진된 것은 영조대였다. 이때도 기왕에 있어온 정치세력의 뿌리가 워낙 깊어 탕평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왕권 강화에 있었으나 각 정파의 세력을 조정하는 이른바 ‘調劑保合’에 힘쓰는 형편이었다. 특히 정파간의 권력 쟁탈은 숙종 20년의 갑술환국으로 남인세력은 거의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지고 이후의 정국은 서인의 노·소론의 대립과 갈등으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숙종 중기 이후 영조초에 이르는 동안의 정국의 흐름은 노·소 양파의 정권 유지나 주도를 위하여 왕세자 책립의 지지여부에 관심이 집중되어 정쟁이 가열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위에 나아간 영조는 탕평책을 앞세워 노·소론의 聯政체제를 구축하여 인사상의 불만을 해소하는 데 힘쓰는 한편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에 주력하였다.0552)李泰鎭, 앞의 책.

 이러한 조제보합적 탕평책은 상대적으로 노·소론의 정치적 갈등을 가열시켰다. 마침내는 영조 4년(1728) 소론 과격파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이인좌의 난(戊申亂)을 야기하게 되어 소론세력이 약화되는 동시에 노론세력이 사실상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정치정세를 이용하여 영조는 왕권 강화의 배경이 되는 군권 장악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즉 이인좌의 난 이후 守城綸音을 발표하여 3군문의 도성수비체제를 한층 강화하고 금군을 용호영으로 일원화하는 동시에 병조판서로 하여금 모든 군영대장의 위에 서게 하는 체제를 확립하는 등 왕권 강화의 의지를 적극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탕평정국은 왕권이 강화되는 한편 서인의 노·소론에 의하여 정국이 주도되었다. 그러나 영조 31년 羅州의 掛書사건을 계기로 노론의 결정적인 승리로 돌아가 사실상 붕당정치의 실효를 거둘 수가 없었다. 더욱이 37년의 思悼世子사건 이후에는 다시 時派·辟派로 나누어지고 노론 중심의 벽파에 의하여 정국이 주도되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왕권 강화의 절정기를 이룬 시기는 정조대였다. 정조는 붕당정치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붕당을 깨고 편파가 없는 中正의 길인 皇極의 탕평을 실현하려 했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정치 실현의 구심체로서 奎章閣을 설치 운영하고 壯勇 內·外營을 신설하여 국왕중심의 새로운 군권 운영체계를 갖추어 갔으니 후기 사회에서 국왕으로서 군영 설치를 직접 주도한 군주는 정조가 처음이다. 이는 국왕이 군권과 정치권을 겸하여 장악하고 왕권 강화의 실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는 장용영의 운용을 통해 척신들의 군영대장직 체제를 지양하여 무반 군영대장직 체제로 바꾸는 등 종래의 관례를 깨뜨려 나갔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그의 친위군영인 장용영의 대장을 거침으로서 그의 신임을 얻은 무장을 다른 군영의 대장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체계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왕권이 지극히 약화되고 이른바 세도정치기에 접어들면서 중앙정치는 세도 일족이 비변사를 정치의 중심체로 삼아 당상직의 수를 늘려 독점하면서 다른 官署의 견제 기능을 약화 내지는 마비시켰다. 이에 따라 중앙 군영들도 전반적으로 비변사의 직접적인 통제속에 들면서 군사력의 실제적인 보유 및 가동은 훈련도감 하나에 한정시켜 그 대장직을 세도 일족의 핵심이 확고하게 장악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로서 보면 세도정치는 역사적 역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군권을 떠나서 국방력 면에서 보면 더욱 약체성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약체성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興宣大院君의 섭정기에 있어서는 비변사를 폐지하는 동시에 의정부권을 부활하고 5군영에 무반출신 군영대장직을 두려했으나 근 60년에 걸친 세도정치기의 군정의 문란을 하루아침에 강화할 수는 없었다.0553)위와 같음.

<車文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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