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1. 장기적인 자연재해와 전란의 피해
  • 2) 16∼18세기초 장기적인 자연재해의 실상

2) 16∼18세기초 장기적인 자연재해의 실상

 자연이상현상에 관한 기록은 서양에 비해 유교 문화권의 한국·중국 등이 훨씬 더 풍부하다. 두 나라 역사에서 자연이상현상에 관한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겨진 것은 전적으로 유교의 독특한 災異觀 때문이었다. 유교는 생명이 있는 것들이 살아가는 것을 하늘의 큰 뜻(天道)이라고 풀이하여 많은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도 하늘의 그러한 뜻을 본받아 실현시키는 것을 최대 임무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天道觀은 하늘에서 나타나는 천문·기후 및 기상의 이상현상은 곧 군주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 하늘이 그에 대한 譴告로 표시하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따라서 이상현상으로 재이가 나타나면 군주는 자신의 정치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기(恐懼脩省)를 요구받았다. 이상현상에 대한 관찰과 기록 자체가 곧 하늘에 대한 공경의 뜻을 담은 것으로 인식하였다.

 유교문화권에서는 이처럼 독특한 재이관으로 천변재이에 관한 자료가 많이 남겨졌지만, 이러한 기록의 조건이 반드시 자연이상현상에 대한 더 많은 과학적 연구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많은 기록들은 오히려 이상현상을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범상한 것으로 보아 넘기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기록 빈도에 대해서도 순수하게 자연현상의 시대적 차이로 보이지 않고 특별한 정치적 고의의 소산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즉 어떤 기존의 권력을 무너뜨리거나, 폄하하기 위해 이상현상을 과장하거나 조작했을 수도 있다는 해석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지나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유교정치사상 아래서, 있는 기록을 의도적으로 빼는 경우는 있어도 기록을 조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정치적 갈등이 심한 상태에서 연대기를 편찬하게 되면 평소에 관측된 이상현상의 반영에 가감이 생길 수 있지만 기록의 조작은 있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현전하는 기록들에 대한 지나친 의심은 모든 전래 기록들의 가치를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삼가야 할 것이다.

 유교문화권의 천변재이에 대한 기록 가운데서도 조선왕조의 실록은 비공개 원칙이 끝까지 지켜졌기 때문에 기록의 신빙도가 대단히 높다. 중국에서도 거의 같은 정치사상 아래 같은 기록제도가 있었지만 明代 이래로는 실록 起居注 등의 공개 원칙으로 인해 이상현상의 찬입 기피가 심하게 작용해 실제 반영도가 크게 낮아져 있다.0581)李泰鎭,<소빙기(약 1500∼1750년) 현상의 천체현상적 원인-≪朝鮮王朝實錄≫의 관련자료 분석->(≪國史館論叢≫76, 國史編纂委員會, 1996), 92∼93쪽.
고병익,<東아시아 諸國에서의 實錄의 編纂>(≪學術院論文集≫인문·사회과학편 제34집, 1995).
중국의 연대기 자료는 소빙기 현상의 중간 시점에서 왕조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는 대혼란이 있어 기록의 충실도가 더 떨어진다. 이에 반해 조선왕조는 소빙기 전체를 왕조의 존속기간 속에 포함시키고 있어 기록의 일관성이 지속되어 자료로서의 가치가 더 높다. 소빙기 현상 연구에서≪조선왕조실록≫은 세계사적으로 거의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호조건의 문헌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관련 기록들에 대한 필자의 조사 작업은 태조에서 철종까지의 실록들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1920년대에 편찬된≪高宗實錄≫·≪純宗實錄≫은 편찬과정과 체제면에서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이 조사의 결과로, 각 현상별 기록의 건수는 다음<표 1>과 같이 집계되었다.0582)자료 조사 결과는 처음에≪國史館論叢≫ 제76집에<소빙기(약 1500∼1750년) 현상의 천체현상적 원인-≪조선왕조실록≫의 관련 자료 분석->이란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발췌 자료는 워낙 방대하여 재확인 작업을 한 결과 현상별,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가 나타났다. 그러나 논지를 바꿔야 할 정도의 오차는 아니었다. 여기서는 재확인된 수치를 사용한다.

이상현상 종류 기록 건수 이상현상 종류 기록 건수
유성 3,431 大雨 187
有色天氣 1,052 대풍우 633
天中소리 10 대풍 232
혜성 1,214(65)* 대설 36
客星 265(9)* 有色눈비 90
日變 96 티끌 29
月變 20 어둠 54
햇무리 4,487 안개 651
달무리 2,370 지진 1,500
금성낮출현 2,006 해일 112
뇌전 2,370 水色變 33
우박 2,006 이상 고온 64
서리 605 이상 저온 87
때아닌 눈 377 총합계 25,670

<표 1>≪조선왕조실록≫ 천변재이 관련 기록들의 현상별 분포

혜성기록건수의 ( )는 출현 혜성수, 객성기록건수의 ( )는 출현 객성수.

 위<표 1>에 집계된 수의 기록들은 먼저 시기적인 분포를 파악해야 기후사의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편의적으로 50년을 단위로 나누어 각 단위 시기의 현상별 기록 건수를 배열해 본 결과<표 2>와 같이 되었다(단, 첫 번째와 마지막의 단위 시기는 각기 앞뒤의 자투리 해수를 합쳤다).

시 기 순 해 당 연 도 총 건 수
제 1 기 1392∼1450 2,117
제 2 기 1451∼1500 1,420
제 3 기 1501∼1550 6,109
제 4 기 1551∼1600 4,785
제 5 기 1601∼1650 3,300
제 6 기 1651∼1700 3,563
제 7 기 1701∼1750 2,716
제 8 기 1751∼1800 936
제 9 기 1801∼1863 724

<표 2>천변재이의 시기별 총 건수 일람표

 앞<표 2>에 정리된 것에 의하면, 25,670건의 기록들은 제3기에서 제7기 사이에 몰려 있다. 제3기에서 제7기까지 다섯 시기의 기록빈도는 각기 2,700건 이상 6,100건에 달한 반면, 제1기는 2,117여 건, 제2기·제8기·제9기는 1,500건 이하로 크게 떨어진다. 제4기의 경우 1592년의 豊臣秀吉軍의 침입으로 약 25년간의 자료가 소실된 결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건수는 4,700건을 넘어선다. 제3기에서 제7기까지의 기록건수는 모두 20,473건으로 전체의 79%를 차지한다. 위 건수를 현상별로 다시 풀어보면<표 3>과 같다.

재 해 제1기 제2기 제3기 제4기 제5기 제6기 제7기 제8기 제9기 합계
유성 103 69 422 387 766 740 695 239 10 3,341
有色天氣 48 9 333 325 211 61 61 3 1 1,052
天中소리 0 0 4 4 2 0 0 0 0 10
혜성 21 198 221 102 37 102 84 75 374 1,214
客星 0 0 0 127 102 0 14 22 0 265
日變 6 0 16 27 23 9 13 2 0 96
月變 0 0 1 10 6 1 0 2 0 20
햇무리 424 352 1,662 1,378 266 121 239 44 1 4,487
달무리 27 16 145 557 78 116 176 27 0 1,142
금성 252 339 1,186 397 829 1,141 388 116 239 4,887
뇌전 264 108 547 456 209 250 282 211 43 2,370
우박 177 68 578 260 223 295 262 108 35 2,006
서리 107 11 145 38 84 121 81 17 1 605
때아닌 눈 37 3 70 32 35 117 65 18 0 377
대우 63 1 38 13 5 22 21 17 7 187
대풍우 149 112 59 34 134 89 47 7 2 633
대풍 46 4 61 28 30 42 16 3 2 232
대설 2 7 7 0 2 14 4 0 0 36
有色 눈비 14 8 29 18 8 11 1 1 0 90
티끌 0 0 1 2 7 19 0 0 0 29
어둠 0 0 1 0 14 24 13 2 0 54
안개 144 20 45 280 91 22 48 1 0 651
지진 183 78 482 287 110 185 157 13 5 1,500
해일 4 1 7 5 14 33 38 7 3 112
水色變 14 0 1 0 1 12 5 0 0 33
이상 저온 8 1 28 3 11 9 4 0 0 64
이상 고온 24 15 20 15 2 7 2 1 1 87
합 계 2,117 1,420 6,109 4,785 3,300 3,563 2,716 936 724 25,670

<표 3>≪조선왕조실록≫ 천변재이 관련 기록들의 시기별 분포상황 (50년 단위)

모든 수치는 발생 또는 관측 기록의 빈도
** 한재·수재·충재·기근·전염병 등은 제외

 위와 같이 수집 정리된 결과를 통해 소빙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기온 강하와 직접 관련되는 현상들의 상황을 파악해 보는 것이다.<표 3>중의 여러 현상 중 기온 강하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는 우박·서리·때아닌 눈 등이다. 이것들의 발생에 관한 기록의 빈도를 검토해 보면 아래<표 4>와 같다.

기 별 우박 서리 때아닌 눈 합계
제 1 기 177 107 37 321
제 2 기 68 11 3 82
제 3 기 578 145 70 793
제 4 기 260 38 32 330
제 5 기 223 84 35 342
제 6 기 295 121 117 533
제 7 기 262 81 65 408
제 8 기 108 17 18 143
제 8 기 35 1 0 36
합 계 2,006 605 377 2,988

<표 4>기온강하와 관련되는 현상들의 기록 빈도 시기별 비교표

 위<표 4>에 의하면, 제3∼7기의 다섯 시기의 기록 건수 합계는 2,406건으로 전체 2,988건의 80%를 차지한다. 각 시기별로 모두 330건 이상으로 나머지 네 시기에 비해 훨씬 높은 빈도를 보인다. 나머지 중 제1기가 321건으로 높게 나타나나 전자에 미치지 못한다. 단 제1기의 비교적 높은 빈도는 앞에서 언급한 ‘14세기 위기’의 끝에 해당하는 것으로 앞으로 별도의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제3∼7기의 높은 빈도는 이 기간 즉, 1500년 전후부터 1750년 전후까지 전반적으로 기온이 내려갔던 사실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자료이다.

 소빙기의 실재와 존속기간은 위<표 4>의 검증으로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러한 기온강하의 원인은 무엇일까.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지금까지 소빙기 현상의 원인에 대한 학설로는 미국의 존 에디가 제시한 태양흑점 활동 쇠퇴 내지 중지의 설이 유일한 것이다. 태양흑점 활동이 최소화되어 태양의 발열·발광이 감소함으로써 지구의 기온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19세기 전반기에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 태양과의 책임자였던 마운더(E. W. Maunder)가 수집한 1645∼1715년간의 흑점에 관한 유럽의 古기록들을 활용하여 이런 학설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조선왕조실록≫은 이 기간에 특별히 흑점활동의 쇠퇴와 관련한 현상들을 보고하고 있지 않다.≪조선왕조실록≫의 관련 기록들에 대한 필자의 분석 결과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이상현상의 근본 원인은 유성 특히 火球型 유성의 다수 출현과 낙하로 파악되었다. 천문학자들에 의하면,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는 2억 년이란 긴 시간 속에서 우에서 좌로 도는 이른바 은하회전을 하며, 태양계는 그 은하회전을 따라가는 한편으로 약 6,500만 년의 시간이 걸리는 자체 상하운동을 한다고 한다. 따라서 태양계는 상하운동시 수평으로 지나가는 다른 운석 또는 소혹성의 밀집군을 만날 수 있으며, 그 때 운석이나 그보다 큰 소혹성이 지구의 대기권으로 돌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화성과 목성 사이에 운석·소행성(asteroid)들이 떠도는 帶(belt)가 있어서, 그것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형으로 돌다가 지구대기권으로 돌입한다고 한다. 현대 천문학으로서도 관측이 가능한 것은 후자뿐이라고 한다. 어느 쪽이든 지구에 운석형 유성이나 소행성이 다량으로 돌입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달 표면에 무수하게 남겨진 크레타 흔적은 그 중요한 증거의 하나로 꼽힌다. 그 흔적은 곧 운석·소혹성에 맞은 자국으로서, 달은 지구와는 달리 대기권이 없기 때문에 돌입한 운석 또는 소혹성은 그대로 달 표면에 부딪혀 대부분 크레타를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대기권이 있는 지구의 경우, 운석·소혹성들은 일단 대기권에서 타서 없어지거나 크기가 작아진 상태로 땅에 떨어져 웬만한 크기로는 크레타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기권에 타서 남겨진 먼지의 양이 많아지면 태양의 발광·발열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 방면의 학설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미국의 루이 알바레즈(L. Alvarez)팀의 소혹성 지구 충돌에 따른 공룡 소멸설0583)Alvarez L.·Alvarez W.·Asaro F.·Michel H., June 1980, “Extraterrestrial Cause for the Cretaceous-Tertiary Extinction ; Experimental Results and Theoretical Interpretation”, Science Vol. 208, No. 4448,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1095-1108.이다. 이 팀의 연구는 이태리·덴마크와 뉴질랜드 해안의 백악기와 제3기 지층 사이의 암석에 이리디움이란 광물질이 상하 부위에 비해 백배나 두텁게 쌓여있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물질은 지구 표면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외계의 운석·소행성에 다량 함유되어 있는 것인데, 그런 물질이 이렇게 두텁게 쌓여있는 것은 외계로부터의 충격에 의한 것이 아니고서는 거의 상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팀은 정밀한 과학적 분석 끝에 일시에 그만한 크기의 이리디움이 쌓이려면 지름 10㎞의 소혹성이 떨어질 때 가능하다는 것을 산출해 냈고, 또 이만한 크기의 소행성이 충돌하면 지름 150∼180㎞의 크레타가 형성된다는 것도 함께 계산해냈다. 놀랍게도 과학자들은 인공위성 사진에 힘입어 1990년에 실제로 남미 유카탄반도에서 지름 180㎞ 크기의 크레타를 새로 발견했다.

 알바레즈팀이 거대 운석의 지구 충돌시에 일어난 자연이상현상으로 밝혀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이만한 크기의 운석이 충돌하면 엄청난 양의 먼저가 하늘로 치솟아 태양을 완전히 가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급냉현상으로 우박과 눈이 쏟아진다고 하였다. 운석이 바다에 떨어질 때는 더워진 바닷물에서 솟은 수증기가 하늘을 가려 일시적으로는 온실현상이 생기나 태양열의 차단으로 곧 급냉현상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바닷속에 떨어진 운석은 많은 어패류를 절멸시키며, 하늘을 가린 먼지는 태양을 가려 초목의 광합성 작용을 중단시켰고 이에 따라 25㎏ 이상 크기의 초식동물은 수년 안에 모두 절멸할 수밖에 없었다고 풀이하였다. 이리디움이 두텁게 쌓인 암석의 지층이 바로 공룡이 소멸한 것으로 알려지는 백악기와 그 다음의 제3기층 사이이기 때문에 이 풀이는 그 후 공룡소멸 원인의 가장 유력한 설이 되었다.

 알바레즈팀의 거대 운석 지구 충돌설은≪조선왕조실록≫의 소빙기 관련 자료들을 풀이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설명체계이다.≪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태양 흑점의 이상에 대한 관찰보다 유성의 출현과 낙하에 관한 기록을 수 없이 많이 보여주고 있다. 유성에 관한 기록건수는 총 3,341건이며 이중 제3기에서 제7기 사이의 것이 3,010건으로 전체의 88%가 소빙기에 집중되어 있다. 당시의 유성 관측 기술은 오늘날처럼 망원경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작은 유성까지 모두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육안으로 관측된 것 가운데도 작은 크기의 보통 유성은 기록의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실록에 오른 것은 대부분 사발 모양, 병 모양, 큰 물동이 모양, 배 모양, 주먹 모양 등과 같이 육안 관측이 가능한 것으로 그 중에도 특별히 커 보이는 것들을 대상으로 했다. 색깔과 꼬리 길이를 가급적 밝힌 것도 크기를 의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소빙기 기간 중의 관측 대상 유성들 가운데는 출현시 특이한 현상을 수반한 것들이 많다. 예컨대 화살을 쏘는 火藥兵器인 神機箭 소리를 내면서 날아갔다던가, 출현시 하늘 가운데와 사방에 번개불이 크게 일어나고 우뢰가 치면서 비와 우박이 섞여 내렸다던가, 미약한 우뢰소리를 내면서 赤光이 땅을 한참 동안 비추었다던가, 실내를 환히 비추고 잠시 하늘이 흔들리고 은은한 소리가 났다던가, 색깔이 불같고 소리는 천둥 같았다고 하는 것들이 많았다. 이런 유성들이 보통 유성이 아니라 운석형(화구형) 유성이란 것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 유성은 하나만 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너댓 개, 10여 개, 수십 개씩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흐르는 작은 유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고 한 때도 있고, 유성·飛星이 비오듯이 내렸다던가, 하나가 둘로 갈라져 서로 다른 방향으로 횃불 모양으로 날아갔다던가, 10여 개가 나와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땅을 비추고 사라진 다음 다시 30여 개가 나타났다고 한 것도 있다.

 유성 출현과 관련되는 하늘의 이상현상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포를 쏘는 듯한 큰 소리가 나더니 꼴(蒭;짚단) 같이 생긴 불덩어리가 큰 소리를 내며 하늘을 지나가고, 지나간 곳은 하늘 문이 활짝 열려 폭포와 같은 형상이었다던가, 하늘가가 붉은 색이 낀 가운데 火氣가 있어 공중에서 떨어지는 형태가 기둥 같았는데 줄지어 선 것이 4개, 길이는 數丈으로 밝기가 낮과 같았다던가, 밤하늘이 이상하게 검어지더니 곧 낮처럼 불빛이 비추고 하늘이 갈라지면서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넓고 크기가 항아리만한 물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면서 대포 같은 소리를 세 번 내고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났으며 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고 하는 것과 같이 두려운 광경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성이 장기간에 걸쳐 다량으로 떨어진 사실은 알바레즈팀 학설에 따라 소빙기 현상의 근본 원인을 구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은하회전과 은하계 속의 태양계의 상하운동이나, 화성∼목성간의 소혹성벨트의 한 운석군의 지구중력권과의 만남으로 1500년경부터 지구대기권에 돌입한 운석들이 약 250년간 쏟아졌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이 때의 운석군은 알바레즈팀이 분석한 6,500만 년 전 백악기 말기의 것에 비해 운석들의 크기는 훨씬 작았지만, 운석 밀집군의 크기는 모두 낙하하는 데 약 250년이 걸릴 정도로 컸고, 따라서 그것이 지구의 기후에 끼친 영향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소행성에 비해 크기가 작은 운석이라도 지구의 대기권에 돌입할 때 타거나, 지상 가까이서 폭발하면서 발생하는 우주먼지(Cosmic dust)가 대기중에 장기간 쌓이면, 그것이 태양의 발열·발광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가벼울 수 없다. 소빙기 현상은 결국 운석들이 대기권에 돌입할 때 마찰 또는 폭발하면서 발생한 먼지가 태양열과 빛을 가림으로써 생긴 현상이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관련 기록 가운데는 실제로 태양이 먼지에 가려 생긴 이상현상을 전하는 것도 많다. 日變과 (유사)안개 현상에 관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黃氣가 사방을 막았다던가, 아침부터 巳時(9∼11시)까지 흐린 기운(濁氣)이 안개처럼 덮여 햇빛이 엷었다던가, 黃雲이 해를 가려 마치 일식이 있을 때와 같이 어두워졌고 북방에서 뇌성이 크게 일어났다던가 하는 기록들이 모두 운석 먼지와 관련되는 것이다. 태양에 관해서는 태양에 빛이 없다던가, 빛이 약해진 상태에서 색깔이 붉은색·보라색이 되어 제 모습이 아니라던가, 먼지에 둘러 쌓이거나 가려 굴절현상이 생김으로써 해가 둘로 보인다던가, 흔들리는 것 같다고 한 것까지 있다. 누렇거나 붉은 색깔의 눈이 왔다던가, 松花가루 같은 누런 가루가 내렸다던가, 누런 안개가 끼어 어두컴컴해지고 우박과 흙비가 내렸다던가, 저녁 무렵에 해에 빛이 없고 흰기운이 해를 가려 열렸다 닫혔다 하면서 해바퀴(日輪)가 움직이는 것 같다던가, 하늘에서 재가 내리거나, 흙비가 오거나, 풀씨비가 내렸다는 것도 모두 분진현상에 따른 것이다. 풀씨비는 별들이 떨어지면서 내린 것이라고 분명히 밝혀져 있기도 하다. 붉은 색깔 또는 황적색의 눈이 내렸다고 한 것은 분진이 눈에 묻어내린 것이며, 사방이 캄캄하고 누런 빛이 땅을 비추는 가운데 내린 눈에 티끌이 섞여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1661년 음력 3월 12일에서 4월 24일까지 서울 일대가 분진현상으로 어둠이 계속되면서 해와 달의 색깔이 자주 변하고 서리가 간간이 내리기까지 한 다음과 같은 기상상태는 규모가 적으나마 알바레즈팀의 학설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1661년

3월 12일 사방이 3일 동안 먼지가 떨어지는 것처럼 희뿌옇게 어두웠다.

3월 13일 종일 어두웠다. 해가 뜰 때 자색이었고 밤에는 달이 적색이었다.

3월 14일 서리가 내렸다.

3월 18일 서리가 내리고 사방이 어두운 것이 7일째이다.

4월 1일 가뭄이 심하다.

4월 8일 새벽에 서리가 내렸다. 해가 뜰 때 색깔이 매우 붉었다.

4월 9일 아침 6시에서 저녁 6시까지 마치 먼지가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사방이 희뿌옇게 어두웠다.

4월 11일 낮 12시에서 저녁 6시까지 마치 먼지가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사방이 희뿌옇게 어두웠다.

4월 12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방이 마치 먼지가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희뿌옇게 어두웠다. 저녁때 해의 색깔이 보라빛이었다. 밤에 달의 색깔이 붉고 빛이 없었다.

4월 13일 종일토록 사방이 희뿌옇게 흐렸다.

4월 18일 새벽에 서리가 내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방이 희뿌옇게 흐렸다.

4월 19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방이 희뿌옇게 흐렸다.

4월 21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방이 희뿌옇게 흐렸다.

4월 22일 아침부터 종일토록 사방이 희뿌옇게 흐렸다.

4월 23일 아침부터 종일토록 사방이 희뿌옇게 흐렸다.

4월 24일 아침부터 종일토록 사방이 희뿌옇게 흐렸다.

 실록 기록의 조사에 의하면, 하늘에 나타난 이상현상으로는 해와 달의 무리 현상, 금성(태백성)의 잦은 대낮 출현 등의 빈도가 가장 높다. 무리 현상은 어느 시기에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시기에는 장기적으로 빈도가 높을 뿐더러 모양새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많았다. 무리현상에 대한 관측은 단순히 햇무리가 졌다고 한 것에서부터 해에 고리모양으로 둥근테가 두 개 생겼다던가, 해의 위쪽에 흰무지개가 둘러진 상태에서 그 아래(해 바로 위) 冠(모자;태양의 윗 부분을 감싼 모양), 戴(윗 부분에 직선으로 뻗친 것), 背(윗 부분에 나타난 초승달 모양) 등의 형상이 생기고 해 아래로는 履 모양이 생겼다고 한 것까지 있다. 두 개의 무리가 겹친 가운데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경우도 흔하다. 그리고 그 안팎이 붉은 색, 푸른 색을 띠고 있다고 묘사된 것도 많다. 비가 오기 전에 공중에 습기가 많을 때 발생한다. 그러나 이 때의 무리는 해나 달의 둘레에 둥근테가 생기는 정도로 위와 같은 여러 가지 형상이 생기는 것과는 다르다. 겹겹의 무리에 여러 가지 현상이 현출된 것은 대기권에 두텁게 쌓인 우주먼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빈도가 높은 금성(태백성)의 대낮 출현의 경우, 당시의 천문가들은 태양의 빛이 약해진 것을 원인으로 지적하였다. 금성은 음성으로서 이것이 낮에 나타나는 것은 모든 陽(重陽)의 으뜸인 태양의 빛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0584)≪燕山君日記≫권 27, 연산군 3년 9월.. 이 해석이 틀리지 않는다면 16세기 이래 이 현상이 엄청난 빈도로 자주 일어난 것은 태양이 운석 먼지에 가려 발광·발열이 약화됨으로써 일어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250년간 1,744건, 연평균 7건으로 집계되는 천둥 번개(뇌전) 현상도 결코 심상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한 해에 7회 정도의 천둥 번개는 있을 수 있지만, 250년간 그 비율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시기 천둥과 번개는 여름뿐만 아니라 겨울철에도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당혹감을 주었다.

 지진은 우연찮게도 뇌전과 비슷한 발생 빈도를 보이고 있다. 총 1,500건의 지진발생기록은 81%에 해당하는 1,221건이 제3기에서 제7기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운석형 유성이 가장 가까이에서 폭발할 때는 높은 열과 압력을 지층에 가하게 되어 지진파를 유발하게 된다고 한다. 이 시기에 장기적으로 지진 발생도가 높아지는 것은 분명히 운석 낙하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0585)이태진,<小氷期(1500∼1750) 천변재이 연구와≪朝鮮王朝實錄≫-global history의 한 章>(≪歷史學報≫ 149, 1996), 221쪽.

 대기권에서 일어나는 기상의 이변 중 가장 빈도가 높은 것은 우박·수재·서리 등의 순서이다. 우박·서리 등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지만, 이 현상은 때아닌 눈과 함께 소빙기의 대표적인 기상현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박은 발생 빈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크기가 큰 것들이 많아 농작물에 주는 피해가 대단히 컸다. 그리고 서리와 눈은 대개 겨울철이 아니라 음력 2월에서 9월 사이에 내린 것으로 심지어 5∼8월에 눈이 내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서리는 霜隕이라고 하여 덩어리로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기온강하 현상의 원인이 운석형 유성의 낙하란 것은 앞에서 누차 강조한 것이지만,≪조선왕조실록≫의 자료 조사 결과 기온강하에 직접 관련되는 이 현상들의 약 250년간의 기록 건수가 총 2,406건(우박 1,618, 서리 469, 때아닌 눈 319)으로 같은 기간의 유성 출현 기록의 빈도 3,010건에 근접되어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아 넘기기 어렵다.

 소빙기 기온강하의 실제 모습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세 가지 현상의 예를 좀더 들어둘 필요가 있다. 다음의 예시들은 한냉화 현상의 심각 정도를 사실적으로 전해주는 예들이다.

① 선조 39년(1606) 9월 23일에 평안도에서 도내 여러 고을의 상황을 일괄적으로 올려보낸 8월 19일부터 23일간의 기상상태;8월 19일 오후 2시에 희천군 북리 읍내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서 검은 구름이 홀연히 일어나면서 천둥소리가 났다. 동시에 얼음과 우박이 섞여 일시에 쏟아졌다. 우박은 큰 것이 거위알만하고 중간 것은 오리알, 작은 것은 계란만했다.

② 인조 9년(1631) 10월 16일 서울;천둥과 번개치면서 우박이 내렸다.(하늘)서남쪽에서 바람과 물이 서로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나서 동쪽으로 옮겨갔다.

③ 인조 25년 9월 25일 평안도 의주;번개와 천둥치면서 우박이 내렸다. 우박이 큰 것은 사람 머리만하고 작은 것은 거위알만하여 산야의 짐승과 새가 많이 맞아죽고 미처 수확하지 못한 백곡이 모두 사라졌다.

④ 현종 즉위년(1659) 6월 2일의 평안감사의 일괄 보고;4월 19일 오후 4시에 삭주부에 북쪽 오랑케 땅으로부터 광풍이 불어닥치고 꿩알만큼 큰 우박이 쏟아졌으며 그것이 쌓여 얼음이 1척(30여 ㎝) 이상으로 얼어붙어 모든 곡식이 다 손실되고 전답이 텅비었다.

 위 예시들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상현상의 대부분이 겨울이 아닌 시기인 4·8·9월 등에 일어난 사실이다. 다음과 같이 여름철인 7·8월에 눈이 오고 얼음이 어는 경우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⑤ 인조 18년(1640) 8월 18일;충청도 전의 등 7개 읍에 눈이 내렸다. 직산은 냇물이 모두 얼었다. 8월에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린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⑥ 숙종 12년(1686)

8월 8일;지난 7월 인제현에 서리가 내리고 큰 바람이 불면서 비와 우박이내렸다. 철원부에 비와 계란만한 우박이 내렸다.

8월 16일;충청도에 찬바람과 찬비가 연일 내렸다.

8월 19일;경상도에 큰 비·광풍·우박·눈 등이 내렸다.

8월 25일;진주에 눈이 내리고 영해에 해일이 일었다.

 大風은 위의 예시에서도 확인되듯이 비나 눈·우박 등과 함께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우박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아 계절적인 태풍과는 다른 느낌을 강하게 준다. 이 경우는 운석이 떨어지면 그 먼지로 하늘의 태양이 가려 한냉화 현상이 생기면서 대풍과 우박이 동반된다는 알바레즈팀의 설명이 훨씬 더 적합성을 가진다. 계절적인 태풍보다 훨씬 더 많은 수치로 발생하고 있는 대풍은 이런 특수한 조건의 것으로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겨울철인데도 일시적으로 봄날같이 따뜻해져 꽃이 피고 얼음이 얼지 않는 난동 무빙현상은 빈도가 높지는 않으나 괴이한 일로 여겨 기록에 많이 올라 있다. 이 경우는 대부분 특정한 지역에서 국부적으로 발생한 현상으로, 이는 운석이 바다에 떨어질 때 바닷물이 증발함으로써 온실현상이 생긴다는 해석으로 이해할 문제이다. 발생 지역들은 실제로 바다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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