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1. 장기적인 자연재해와 전란의 피해
  • 3) 자연재해와 전란의 피해
  • (1) 자연재해의 피해

(1) 자연재해의 피해

 조선왕조 500년의 기간 중 소빙기 현상이 일어난 1480년 무렵부터 1750년 무렵까지의 기간에는 자연재해의 피해가 장기적으로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기간에는 큰 규모의 외침으로 임진왜란(1592)·정유재란(1597)·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 등이 있었다. 자연재해는 기근과 전염병을, 전란은 전쟁 희생자를 초래하여 사회적으로 큰 타격을 입히기 마련이다. 종래 이 시대의 자연재해와 전란에 대한 이해는 양자를 서로 별개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시대 연구자들은 연대기의 자료를 따라가면서 이 시대에 자연재해가 심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와 관련하여 구황정책으로 진휼·환곡·納粟 등의 문제를 다룬 연구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시대의 자연재해를 소빙기 현상의 결과로 묶어서 파악한 연구자는 없었다. 오히려 자료상 250년이 넘는 긴 기간에 재해가 연속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자연재해는 언제나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 시기 자연재해 문제가 이런 식으로 이해됨에 따라 전란의 피해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경향도 있었다. 17세기에 많은 인명의 손실을 수반하는 기근과 전염병도 순수한 자연재해의 결과라기 보다 전란으로 경제적 여건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나타난 가승적 결과로 여기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장기적 재난으로서 소빙기현상의 실체와 규모가 드러난 상태에서는 전란 자체도 소빙기 현상 속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왜이든, 여진족이든 기상의 이상이 물자의 부족을 초래해 침략 전쟁을 일으켰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상정할 수 있다.

 자연재해의 원인이 무엇이든 인간생활에 최종적으로 미쳐오는 것은 한재·수재·충재·기근·전염병 등이다. 소빙기 현상의 전모를 전하는≪조선왕조실록≫은 이에 관한 기록들도 수없이 많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앞의 천문현상들과는 달리 祭儀的, 사상적 인식이 시대마다 다른 가운데 대응의 빈도도 이에 좌우되어 이를 적은 기록의 빈도가 반드시 재이의 강약을 대변하기 어렵다. 예컨대 한재의 경우, 초기에는 유교적 대응방식에 충실하여 한차례의 가뭄에 대해서도 祈雨祭·감선·正殿 피하기·寬刑 등의 여러 조치를 잦게 실행하여 관련 기록이 수다하게 많다. 반면에 16∼17세기에는 祈雨祭 보다는 君臣 모두의 恐懼脩省이 강조되어 이에 관한 논의를 곧 한재에 관한 기록인 것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 그리고, 같은 1회의 한재라도 16∼17세기의 것의 강도는 15세기 것에 비해 훨씬 크다.0586)이태진,<고려∼조선중기 天災地變과 天觀의 변천>(≪한국사상사방법론≫, 翰林科學院叢書, 小花, 1997). 이런 조건에서 관련기록의 빈도에 관한 통계적 처리는 의미가 없다. 수재의 경우도 대개 비슷하다. 그러므로 이 기록들에 대한 분석은 특별한 처리 방법이 강구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그런 각종 재해의 최종적 귀착이라고 할 수 있는 田結數의 감소와 전염병(疫病) 발생 상황을 통해 소빙기 자연재해의 피해를 개관하는 데 그치기로 한다.

 소빙기에 한재와 수재가 어느 시기보다 심했다면 田地의 결수가 감소되기 마련이다. 먼저 조선시대 전결수에 관한 기록들을 통해 16-18세기 전기간의 전결수의 감소 상황을 보기로 한다.

시 기 전 결 수 전 거
태 종 4(1404) 931,835결 ≪증보문헌비고≫권 141, 田賦考 1
세 종 32(1450) 1,632,006결
1,709,136결
≪세종실록≫지리지, 각도 총론
≪세종실록≫지리지, 각읍 통계
임 란 이 전 1,515,591결 ≪반계수록≫권 6, 田制攷說 下
1,515,500결 ≪증보문헌비고≫권 141, 田賦考 1
1,708,000결 ≪증보문헌비고≫권 148, 田賦考 8
선 조 34(1601) 300,000결 ≪선조실록≫권 140, 선조 34년 8월 무인
광해군 3(1611) 542,000결 ≪증보문헌비고≫권 148, 田賦考 8
인 조 13(1635) 895,491결 ≪인조실록≫권 31, 인조 13년 7월 임신
숙 종 45(1719) 1,395,333결 ≪증보문헌비고≫권 142, 田賦考 2
영 조 2(1726) 1,220,366결 위와 같음
순 조 7(1807) 1,456,592결 ≪만기요람≫재용편 2, 田結

<표 5>조선시대 전국 전결수의 변천

출전:박종수,<16·7세기 田稅의 定額化 과정>(≪韓國史論≫30, 서울大, 1993).

 위<표 5>에 의하면, 조선 초기 세종대의 收稅 전결수는 160-170만 결 선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임진왜란 이전의 어느 시점까지 150-170만 결 수준을 유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수치들의 전거 가운데≪증보문헌비고≫는 당대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지만 전혀 근거없는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이 점을 받아들이면, 임란 전 16세기의 전결은 세종대 것에서 약간 감소한 상태이다. 그러나 자연재해의 피해가 이미 많이 누적된 명종대 이후에도 이 정도의 감소에 그쳤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34년에 처음 조사된 전국의 전결수는 30만 결로 급감하였다. 소빙기 대자연재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이 급감은 전쟁의 피해로만 간주되기 쉽지만, 실제로는 명종대에 이르러 이미 파탄지경에 이른 소빙기 현상의 피해가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후 광해군, 인조대를 거쳐서도 전결수가 쉽게 회복되지 않은 것도 계속된 소빙기현상 때문이었다. 숙종 45년에 이르러 비로소 세종대 것에 가까운 근 140만 결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재해로 영조 2년 조사에서는 다시 120만 결대로 감소하였다. 140만 결대는 소빙기현상이 끝난 영조대 후반, 정조대에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0587)총 전결수가 영조대 후반, 정조대에도 세종대의 160∼170만대에 미치지 못한 것은 생산력과의 비교 속에 별도로 검토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 시기에 국가는 농경지 복구, 생산인구의 확보 등에 진력하는 한편,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전세의 정액화(永定法), 공물의 田結稅化(대동법), 군역변통, 의무 노역제의 폐지와 雇役制 채택 등 부역체계에 일대 변화 조치를 취하였다. 이런 제도 개혁이 소빙기 기간 중에 제기되어 시행된 점은 이것들이 소빙기 대재난의 극복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업기술면에서도 소빙기 현상에 대한 대응의 측면이 확인된다. 申夙의≪農家集成≫은 주지하듯이 이 기간에 편찬된 대표적 농서이다. 이 책은 세종대의≪농사직설≫과 함께 편찬 당대의 새로운 농작법들을 소개하였는데, 그 신작법들이 대부분 한냉화에 대비한 早種에 관한 것들이다. 벼농사의 경우, 이앙법을 권장하되 조종의 볍씨를 파종하는 방법을 소개하였고 또 내한성이 높은 山稻 품종도 권장하였다. 겨울철을 나는 작물인 大小麥에 대해서는≪농사직설≫에 廣畝에 파종하던 방식 대신, 小畝를 密作하는 것으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추위와 바람에 이기는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0588)김 호,<16세기말 17세기초 ‘疫病’ 발생의 추이와 대책>(≪韓國學報≫71, 一志社, 1993), 143∼145쪽.

 농산물이 감소하여 기근이 들면 사람들의 신체의 면역력이 떨어져 전염병이 돌기 마련이다. 여기에 전쟁까지 겹친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 질 수밖에 없다. 아래<표 6>은≪조선왕조실록≫ 중 전염병(역병) 발생에 관한 기록들의 빈도를 앞의 시기구분(50년 단위)에 따라 집계한 것이다.

  제1기 제2기 제3기 제4기 제5기 제6기 제7기 제8기 제9기
전염병 22 7 133 15 37 100 108 35 8

<표 6>≪조선왕조실록≫ 중 전염병(역병)에 관한 기록 빈도 조사표

 위<표 6>에 의하면, 소빙기에 해당하는 제3·6·7기에 역질 발생의 빈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소빙기 중 제4·5기의 빈도가 낮은 것은 이 시기에 한해 전염병 발생이 낮았던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해당 실록의 기록상의 특별한 조건이나, 왜란·호란 등의 전시적 상황에 따른 문제일 뿐이다. 제4기의 경우, 선조 25년 이전까지의 기록이 임진왜란으로 모든 史草가 없어져 실록이 부실하게 된 결과이다. 제3기에서부터 시작된 전염병의 만연은 이 시기에서도 그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누적적인 조건으로 상황은 더욱 심각했을 것이다.

 제4기인 선조 20년(1587)부터 23년 기간에 일어난 전염병의 만연은 ‘近古에 없었던 것’이란 표현이 나올 정도로 심각했으며, 선조 22년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도망하거나 유리걸식하였고, 또 죽음의 구렁에 수없이 빠지기도 하였으며, 끝내 그들은 도적이 되어서 횡행하는 수밖에 없었다”0589)≪宣祖實錄≫ 권 23, 선조 22년 10월 임인.고 보고될 정도로 심각한 지경이었다. 제4기말과 제5기는 왜란·호란 등의 전란이 계속된 시기로서, 전시 중의 기록의 부실, 戰死와 病死가 잘 구분되지 않는 점 등으로 관련 기록의 빈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수 있다. 임란 중인 선조 26년 8월에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올린 다음과 같은 보고는 실제로 병사와 전사가 겹친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전라도에 여역이 크게 번지어 一陣中의 군졸이 태반 가량 전염되어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더욱이 군량이 부족하여 계속 굶던 차에 병에 걸리면 반드시 죽었습니다. … 신이 거느린 군사만해도 射手와 格軍을 합쳐 元數 6,200여 명 가운데 작년과 금년에 전사한 사람의 수와 2∼3월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병사한 자가 600여 명이나 되는데, 무릇 이 사망자들은 모두 건강하고 활을 잘 쏘며 배를 잘 부리는 자들이었습니다(≪壬辰狀草≫, 萬曆 21년 8월 10일 啓本).

 전쟁과 전염병 만연의 상황이 겹쳤을 때 양자를 분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기근과 전쟁으로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사람들의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져 한 번 발생한 역병(瘟疫)은 높은 이환율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소빙기인 제3기에서 제7기에 이르는 기간에 질병적 상황은 지속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임진왜란과 그후 약 20여 연간의 전염병 발생에 관한 한 분석적 연구는 소빙기 재해의 인명적 손실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살피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연구는 선조 즉위년(1567)부터 광해군말까지의 기간을 대상으로 하되, 선조 즉위년부터 32년까지(A기로 부른다)와 선조 33년부터 광해군 15년(1623)까지(B기)로 나누어 전염병(여역) 발생에 관한 실록 기록들의 계절별 분포를 조사하였다.0590)김 호, 앞의 글. 그 결과, A기는 봄∼여름철 발생율이 높고, B기는 겨울∼봄철의 발생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0591)A기:봄 30.7%, 여름 37.4%, 가을 11.4%, 겨울 18.2%. B기:겨울 48.5%, 봄 25.8%, 여름 17.1%, 가을 8.6%. A기의 경우, 임진왜란이란 전쟁이 여름철에 발발하여 장티부스나 이질과 같은 水因性 전염병이 주를 이룬 것으로 분석되었다.0592)三木榮,≪朝鮮醫學史及疾病史≫(1962), 30∼31쪽.
김 호, 앞의 글, 127∼128쪽.
여름철 모기로 인한 말라리아의 감염 위험성도 높아 학질이 다양한 증세로 나타나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B기는 감기(인플루엔자)와 이로 인한 폐염 등의 합병증, 초겨울부터 감염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해 그 이듬해 봄까지 치성하다가 여름에 수그러 드는 것이 보통인 痘瘡(마마)·瘟疫(발진티프스로 추정)·唐毒疫(성홍열) 등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전염병은 소빙기 특유의 혹심한 추위가 몰고온 질병이라고 할 수 있다. 겨울철 역병은 여름철 것에 비해 사망율이 더 높았다고 한다.

 이 연구는 여름철 질병이든 겨울철 질병이든 소아의 감염율이 높았던 것도 함께 지적하였다. 전자에서는 늦봄에서 초가을까지 계속되는 소아 전염병인 홍역이 심했고, 아이들은 학질로부터도 위협을 받았지만 치료법을 몰라 피해가 컸다고 한다. 겨울철 병인 痘瘡·瘟疫·唐毒疫 등도 소아의 이환율과 사망율이 다른 전염병에 비해 높았다. 높은 소아 사망율은 다음대의 성인수의 감소로 이어져 인구감소의 장기적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기근과 전염병은 결국 소빙기 기간에 거의 끊이지 않았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국가통치력에도 큰 타격을 주어 아사자·병사자에 대한 조사 자체가 충실한 것이 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사자·전염병 사망자에 대한 보고는 현종 12년(1671) 한해의 것이 비교적 충실한데, 이 해 총 기민수는 680,993명, 동사 및 아사자 58,415명, 전염병 사망자 34,326명으로 집계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아 10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소빙기 자연재해에 대한 대책은 진휼기구를 세워 이를 통해 이루어졌다. 전염병에 대한 대책으로는 국가적 차원에서 醫書를 편찬하여 지방 각관에 내려보내 활용하도록 하는 것을 일차적인 과제로 삼았다. 광해군 2년에 許浚에 의해 종합의서로서≪東醫寶鑑≫이 편찬된 것은 이 시기의 극심한 질병적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술적 노력의 최대의 성과였다. 이 의서가 이전의 의서들에 비해 되도록 싼값의 약재를 활용하는 노력을 기울인 것도 많은 사람들이 병고에 시달린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출간된 후 어려운 여건에서도 지방에 상당한 수로 배포되었던 것은 질병의 피해가 그만큼 컸던 것을 의미한다.0593)김 호, 앞의 글, 142∼143쪽. 허준은 광해군 4년에 다시 왕명으로≪新撰辟瘟方≫을 지었는데 이것은 겨울철 전염병인 온역 만연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효종 4년(1653)에 해서지방에 온역이 만연하여 의관 安景昌이 이 책을 토대로≪辟瘟新方≫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전염병 퇴치를 위한 의서 및 그 언해본들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0594)위와 같음.

 1480년경부터 시작된 소빙기 자연재해가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는 것은 진휼청이 이 현상이 시작되면서 처음 설치되어 줄곧 존속하였다는 사실로서도 입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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