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1. 장기적인 자연재해와 전란의 피해
  • 3) 자연재해와 전란의 피해
  • (2) 전란의 피해

(2) 전란의 피해

 소빙기현상의 자연재해가 계속된 16∼17세기에 동아시아 국제사회는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14세기 동아시아는 원·명 교체의 대변동 속에서 왜구까지 출몰하여 큰 혼란을 겪었다. 유럽사에서 이르는 ‘14세기 위기’가 동아시아에서도 그대로 현출되고 있었다고 할만 하다.0595)그러나 현재 유럽사에서 처럼 이 시기의 동아시아사를 기후 변동과의 관련 아래 위기적 상황으로 파악하는 연구는 나오지 않았다(이태진, 앞의 글, 1997, 98∼99·109∼115쪽). 한반도에서 왕조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뀐 것도 그러한 대변동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14세기의 혼란은 15세기에 들어와 안정되어 갔다. 14세기 중반 이후 그렇게 자주 출몰하던 왜구도 1399년을 고비로 크게 줄어들었다. 새 왕조에 들어와 1396·1408·1419년 등 세 차례의 침구가 있었으나 1419년의 對馬島 정토 이후 왜구 출몰은 거의 없어졌다. 북쪽 野人(여진족)들은 1410·1422(2월, 10월)·1460, 1475년 등 5차의 침구가 있었다. 이 침구들은 명나라의 요동 평정책에 밀려 일어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조선 또는 조·명연합작전의 반격으로 쉽게 진정되었다. 그러나 1490년대 이후 소빙기의 시작과 거의 비슷하게 왜구와 여진은 다시 준동하기 시작하였다. 1491년 이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100년간 여진과 왜구의 침입상황은 다음<표 7>과 같다.

1491. 1.
1496. 7.
1497. 3.
1499. 3.
7.
1510. 4.
1512. 6.
1512. 7.
1517. 2.
1522. 4.
1523. 4.
1524. 1.
1525. 8.
1528. 1.
1530. 1.
1544. 4.
1552. 5.
1553. 5.
1555. 5.
1556. 6.
1583. 1.
2.
1587. 2.
9.
1588. 1.
兀狄合 여진, 경흥 造山堡 침입(부사 전사), (11월 許琮 정벌)
건주 여진 渭原에 침입
왜 鹿島에 침입하여 만호를 죽임
야인, 삼수군에 들어와 노략질 함
여진, 강계 楸坡鎭에 침입
삼포왜란
여진, 종성 침략
여진, 갑산·창성 등지에 침입
평안도 方山鎭 부근에 야인 1만 명 월경 주둔
추자도 왜변
안면도 풍천에 왜구
압록강 유역의 야인 축출(1517 이래 거주), 이함 등 虛空橋에서 패함
전라도에 왜변
만포첨사 심사손, 야인에게 살해됨
여진인, 山羊에서 작변, 2월 축출
고성 蛇梁에 왜변
제주에 왜구 출몰
제주도에 왜변
영암 達梁浦에 왜변, 이윤경 대파(을묘왜변)
제주 침입 왜선 5척 불태움
경원부 藩胡, 부성을 함락(니탕개의 난)
申砬 등 두만강 방면 여진 정벌
녹도·가리포·응양에 왜구 침입
오랑케 경흥·녹둔도 침범
북변사 李鎰, 도강하여 時錢 번호를 정벌

<표 7>1491∼1591년간 왜·여진 침입 연표

 <표 7>에 정리된 것과 같이 1491년 이후 약 1세기간의 왜·야인의 침입은 이전 1세기에 비해 3배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삼포왜란·을미왜변·尼蕩介의 亂 등과 같이 침구 또는 변란의 규모도 이전에 비해 훨씬 큰 것들이 많았다. 왜나 야인 모두가 식량 확보가 침구의 중요 목표였던 것은 침구의 원인 자체가 소빙기 자연재난이었던 것을 의미한다.

 왜인들이 삼포를 통해 사간 물품들은 곡물·면포·면주, 그리고 중국산 비단 또는 그 原絲(白絲) 등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것은 구리, 염색의 재료로 쓰이는 蘇木, 은 등이었다. 그들은 조선측에 대해 곡물이든 면포이든 구입량을 늘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측은 거듭되는 흉년으로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4∼5,000명에 달한 삼포 거주 왜인들이 일으킨 1510년의 왜란은 수출량 제한에 대한 불만이 주된 원인이었다.0596)이태진,<16세기 국제교역의 발달과 서울상업의 성쇠>(≪서울상업사연구≫, 서울학연구소, 1998). 1547년에 중국 寧波(닝보) 거주의 왜인들이 일으킨 난도 이와 거의 성격이 비슷하였다. 왜인들의 이러한 반란행위는 교역량의 감축이나 중국의 경우 교역대상에서의 제외로 응징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은 노략질밖에 없었다. 16세기 조선과 명나라 해안에서 출몰한 왜구는 14세기 때보다 결코 규모가 작지 않았다.

 16세기 왜구는 일본열도의 정치적 분열과 무관하지 않았다. 주지하듯이 일본열도는 1490년 무렵부터 足利(아시카가)氏의 室町(무로마치)幕府의 통치체제가 쇠미해지고 군웅이 할거하는 戰國의 시대가 된다. 일본열도의 이러한 정치적 분열이 과연 소빙기 자연재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지는 알 수 없다. 일본열도의 정치적 분열은 교역권의 분열을 의미했다. 모든 대소의 호족들이 조선·중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을 원했다. 그래서 교역권의 장악은 전국시대 大名(다이묘)들의 정치적 쟁패의 주요한 목표였다. 비단은 다이묘와 그 휘하 호족들이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인기가 높았고 면포는 군사들의 제복뿐만 아니라 일반민들의 옷감으로도 수요가 높았다. 이 시기 일본의 농산물이 과연 소빙기 재난의 영향으로 감소하였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對馬島 藩主가 줄곧 수출량을 늘여줄 것을 요구한 것은 사실이다. 소빙기현상의 영향을 받았다면 지역적으로 풍흉이 엇갈리기 마련이고 그 상황에서는 곡가의 지역적 차등으로 곡물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삼포왜란 후 조선의 연안지역을 출몰한 왜구들은 곡물·면주·면포 등을 노략질의 주요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확실하다.

 전국시대의 쟁패는 1568년에 織田信長(오다 노부나가)에게 패권이 돌아간 뒤, 1585년에 豊信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패권자가 되었다. 풍신수길은 1589년 명나라에 대해 비밀스런 협상을 의도하였다. 즉 현재 일본 각지에서 나가고 있는 왜구들을 종식시키는 대가로 조공무역의 기회를 다시 얻는 방안을 검토하였다.0597)藤木久志,≪豊信平和令과 戰國社會≫(東京大 出版會, 1985), 218∼238쪽. 일본열도를 최초로 통일한 주역으로서 풍신수길이 조공무역의 기회를 다시 얻으려 한 것은 중국과의 무역을 통일적으로 장악하려는 의도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검토된 방안이 실천에 옮겨졌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3년 뒤 그는 명나라 침공을 목표로 하는 ‘出陣의 命’을 내렸다. 그것은 명측이 가하고 있는 교역 물자의 제한을 근원적으로 철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야인들은 15세기 중반기까지 명나라가 衛所제도를 시행하여 그 체제 아래서 조선과 명으로부터 농업기술을 받아들여 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5세기 말엽부터 다시 동요하기 시작하여 조선의 변경지방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여진족의 이러한 동요가 시간적으로 소빙기 현상과 거의 맞물리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의 생활 근거지는 위도가 높아 기온강하에 쉽게 영향을 받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소빙기 재난으로부터 일찍 타격을 받기 시작해 식량을 얻기 위해 조선으로 침구해 온 것이었다. 여진족들은 정묘·병자호란 때도 물자 부족으로 조선인 포로들을 米布나 은으로 값을 받고 돌려주는 원칙을 세웠다.

 풍신수길은 1592년 정월 5일 ‘출진의 명’을 내리면서 3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10만 명은 九州(규우슈) 名護屋(나고야)성에 대기하고 20만 명이 차례로 조선으로 건너왔다. 제1진이 4월 13일에 나고야를 출발하여 20일만인 5월 2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조선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승승장구였다. 전세는 이듬해 정월 8일에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하면서 비로소 뒤집히기 시작했다. 서울까지 후퇴한 일본군은 2월 행주싸움에서도 패하여 강화 회담을 제의하면서 남쪽 연안 지역으로 몰려 내려갔다. 선조 26(1593)∼27년간 혹심한 기근과 추위가 닥쳤다. 그래서 1594∼95년간 전쟁은 소강 상태였다. 소빙기의 재난이 전쟁 중에도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1596년 9월 회담이 결렬되었다. 1597년 정월 풍신수길은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침을 기도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에도 일본군은 직산에서 북상이 꺾여 남쪽 연안 지역에 되몰려 있다가 8월 18일 풍신수길이 병사하여 그 유언에 따라 철수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수군에게 가로 막혀 철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11월 19일 노량 앞 바다에서 대파 당하는 것으로 전쟁은 끝났다.

 임진·정유 두 차례의 전란에서 희생된 자의 수는 공식적으로 보고된 것이 없다. 전쟁이 끝난 후인 선조 34년에 한 대신은 전쟁 전과 후의 상황을 대비해 다음과 같이 왕에게 말하였다.

중종조에 3창(군자창·풍저창·광흥창;필자)의 저축이 203만 석이란 많은 수에 이르렀는데 그 후 제향에 쓰임새가 점차 넓어지고 잡용으로 쓰는 것도 많아져 임진년에 와서는 저축한 것은 겨우 50여 만석으로 3분의 2는 줄어든 것이었다. 인구수로 말하면 평시에 비해 겨우 10분의 1이다(≪宣祖實錄≫ 권 140, 선조 34년 8월 무인).

 나라의 저치곡이 점차 줄어든 것은 진휼곡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인구수가 10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분명히 과장된 것이나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 보다 앞서 1593년 5월 서울이 수복된 후의 한 기록은 서울로 돌아온 인구(還集人)를 남 14,062명, 여 24,869명, 합계 42,106명으로, 이 중 賑濟場에 모인 기민은 남녀 3,175명이라고 하였다.0598)≪宣祖實錄≫권 38, 선조 26년 5월. 전란 전의 서울 인구는 10만여 명을 헤아렸다. 그렇다면 반수도 돌아오지 못한 상태이다. 1596년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혹심한 기근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란 중에 동원된 인력은 1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0599)1592년 5월 경상·전라·충청 삼도를 중심으로 소집된 관군이 근 10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에 각지 의병 등을 합하면 1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중 전사자를 3분의 1로 잡더라도 5만여 명 정도였을 것이다. 풍신수길은 출진하는 장수들에게 시신이나 수급 대신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오라고 했다. 그래서 軍民을 가리지 않은 살륙의 만행이 저질러졌다.0600)李元淳,<壬辰·丁酉倭亂時의 朝鮮 俘擄奴隷問題>(≪邊太燮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三英社, 1985), 628∼620쪽. 이렇게 적군에 의해 죽는 자도 많았지만,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는 자도 많았다. 다음의 기록들은 각각 1593년과 1594년 두 해의 참혹한 광경들을 전한다.0601)최영희,≪壬辰倭亂중의 사회동태≫(한국연구총서 28, 한국연구원, 1975), 88·89·99쪽.

① 京畿의 士民들이 크게 굶주려 굶어죽은 시체가 길을 꽉 메웠다. … 길을 가다보니 어린아이가 젖을 빨고 있는데 어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유성룡은 말하기를,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도 않았는데 인민의 죽음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찌할 것인가”라고 탄식하고, “하늘도 걱정하고 땅도 비참하게 여기는 듯 하다”고 하였다…(≪宣祖修正實錄≫ 권 27, 선조 26년 2월 계사).

② 영남에 흉년·기근과 역질로써 인민이 사망하여 거의 없어졌으므로 문경 이하로부터 바로 밀양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 사이에 사는 사람이 없어서 벌써 텅빈 땅이 되어 버렸으니 비록 일을 하고자 하더라도 형편이 되지 않았다(≪징비록≫ 권 12, 辰巳錄).

③ 사헌부에서 아뢰다. 기근이 극심하여 인육을 먹기에 이르렀어도 마음으로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길바닥에 굶어죽은 시체를 칼로 도려내어 한곳도 살이 남아 있지 않을 뿐더러, 혹은 산사람을 도살하여 腸胃와 腦髓까지도 모두 먹었다. 옛날에 사람이 서로 잡아 먹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렇게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견문한 것으로는 극히 참혹하다(≪宣祖實錄≫ 권 47, 선조 27년 정월 병신).

 왜란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 수는 10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본측 학자들은 과거 통산 5∼6만 명으로 추산하였으나0602)內藤雋輔,<壬辰·丁酉役에 있어서 被掠 朝鮮人의 刷還問題에 대해>하(≪朝鮮學報≫ 34, 1965). 최근 규우슈의 薩摩(사츠마)州에만 30,700여 명의 조선인 포로가 있었다는 정보 등에 근거해 10만 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0603)이원순, 앞의 글, 630쪽. 포로는 일본군이 조·명 연합군에게 밀려 남쪽 해안지역에 성을 쌓고 대치하고 있던 기간과 정유재란 때 대거 잡아갔다. 그들은 포로들을 15만 명 이상의 대군 동원으로 부족해진 본국의 노동력을 충용하는 것을 중요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시한 것은 이들을 포르투갈 노예상인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일본의 대소 藩主들은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鐵砲(조총), 白絲(비단 原絲), 담배 등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면서 이에 대한 값으로 조선인 포로들을 넘겼던 것이다. 그들은 남쪽에 진치고 있을 때 ‘人買船’을 보내 조선인을 잡아와 長崎(나가사키) 방면에서 이들을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아 넘겼던 것이다.

 약 10만 명 내외를 헤아린 조선인 포로들은 극히 소수만이 모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599년 6월부터 국교 재개의 교섭이 시작되면서 일본측은 포로의 송환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597년부터 1606년까지 10년간≪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되는 송환 포로는 5,720명에 불과하고, 이후 1607년에 1,240명, 1609년에 수십 명, 1617년에 321명, 인조 2년(1624)에 146명, 1643년 14명 등 2,000명 미만으로 총 7,500명 정도의 송환을 확인할 수 있다. 왜군이 많은 민간인들을 수입품 대금 지불 수단으로 삼은 것은 일본이 전쟁과 소빙기 자연재난으로 값을 치룰 물자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북쪽 여진족의 침구로는 선조 16년(1583)의 이른바 니탕개의 난이 가장 규모가 컸다. 여진족들은 누루하치가 등장하여 선조 22년부터 인근 부락을 점령하고 무력과 혼인정책으로 급속한 성장을 보여 광해군 8년(1616) 정월 황제를 칭하며 후금국을 세웠다. 1605년에 이미 명에의 조공을 폐기한 누루하치는 1618년 4월에 犯境과 父祖 피살을 표면적인 이유로 들어 명나라의 변경요지를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619년 3월 명군과의 대회전에서 누루하치군이 승리함으로써 명·청 교체 대변동의 기선을 잡았다. 이후 후금군은 인조 5년(1627) 정월부터 3월까지 3만 명의 대군, 인조 14년 12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20만여 명의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두 차례의 호란 중 조선측의 피해는 물론 병자호란 때가 더 컸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피해규모 전체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았다. 정묘호란시의 피해는 주로 침입로에 위치한 평안도의 평양·강동·삼등·순안·숙천·함종 등지에 집중되었다. 이들 6읍의 피해는 포로가 된 자 총 4,986명, 피살자 290명, 포로 중 도망쳐 돌아온 자 623명 등으로 공식 보고된 것이 있다.0604)≪仁祖實錄≫ 권 16, 인조 5년 5월 16일 신사 및≪承政院日記≫ 권 1, 인조 5년 5월 17일 임오. 각 지역별 피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평양 피로 男婦 2,193명, 피살 158명, 逃還 334명, 掩骼(시체) 1,169명, 江東 피로 225, 도환 67, 피살 우마 790, 삼등 피로 1,500, 피살 28, 도환 111, 순안 피로 576, 피살 44, 도환 78, 숙천 피로 370, 전망 60, 도환 33, 威從入防正軍 피로 122.
森岡康,<丁酉亂後におけるの贖還問題>(≪朝鮮學報≫ 32, 1965), 76쪽.
박용옥,<정묘란 조선피로인 쇄·속환고>(≪史學硏究≫ 18, 1964), 359쪽.
그리고 병자호란 때는 포로가 된 자가 무려 50만여 명에 달했다는 기록밖에 없다.0605)≪遲川集≫ 권 17, 제7책 2, 移陳都督咨.
박용옥,<丙子亂 被擄人 贖還考>(≪史叢≫ 9, 1964), 52쪽.
이들은 평안도·황해도 등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지역별 피해자에 대한 기록은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자를 강화조약 성립 직후 쇄환해 준 남자와 여자 1,600여 명이었다는 수치밖에 전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두 차례의 호란에서도 왜란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인 포로는 거래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정묘호란시 후금은 강화조약 성립 직후 정주·선천·철산 등지 사람들로 이루어진 3,210여 명을 무조건 쇄환했다(이 숫자는 위의 4,986명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는 贖還 즉 값을 내고 데려가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속환은 開市의 조건과 함께 요구되었다. 포로를 돈을 받고 돌려주고 그 값으로 개시장에서 조선의 미곡을 사가겠다는 계산이었다. 정묘호란 후 포로의 공정가는 靑布(담요 종류) 10필로 정해졌으나 실제로는 60∼70필로 요구되었다. 上品 즉 신분이 높은 사람은 소 한 마리에 청포 10필, 중품은 청포 100필, 하품은 소 한 마리 또는 청포 60∼70필로 요구되기도 했다. 몸값이 이렇게 고가로 요구되어 속환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극소수였다. 그래서 포로 가운데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최후로 도망쳐 오는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후금은 이에 대한 代價를 조선정부가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개시도 의주와 회령 두 곳에서 이루어졌으나, 조선측이 물자가 모자라 시장의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속환문제는 인조 10년 이후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양국의 감정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후금이 속환과 개시에서 노린 것은 곧 식량 확보였으며, 그것은 소빙기의 재해 속에서 겪고 있던 식량난에 대한 하나의 자구책이었다. 그들은 조선에 대해 歲幣보다도 개시와 속환을 더 강하게 요구했으나 조선 자체가 장기적인 재해로 식량 공급에 허덕이고 있었으므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이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는 속환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았다. 이번에는 속가를 청포대신 銀으로 요구하였다. 이전과는 달리 청나라의 세력이 커지고 그 세력권이 명의 본토로 확대되어 가는 변화 속에서는 명의 화폐수단인 은이 곡물 매입면에서도 더 유리한 것일 수 있었다.0606)한명기,<光海君代의 대중국관계-후금문제를 둘러싼 대명관계를 중심으로->(≪震檀學報≫ 79, 1995). 청이 이 시기에 조선인 포로 1명에 대해 요구한 속가는 은으로 150∼250냥으로 대단한 고가였다. 그래서 이 때도 사실상 속환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50만여 명의 포로가 사경을 헤매거나 청인의 노예 등으로 그대로 정착하였다.

 16∼17세기 동아시아의 대전란인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등에서 침략국인 일본·청 등이 다같이 조선인 포로들을 필요한 교역품 특히 곡물 확보의 결제가로 활용하고자 했다는 것은 당시 어느 지역이나 장기적인 재해로 곡물 확보가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이 시기의 전란의 피해란 것도 소빙기 자연재해의 한 부분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李泰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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