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2. 상평창·진휼청의 설치 운영과 구휼문제
  • 2) 임진왜란 이전의 구황정의 실태

2) 임진왜란 이전의 구황정의 실태

 구황정은 충분히 준비된 비축곡을 토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진휼청은 구휼곡을 비상적인 수단으로 확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삼았다. 중앙정부의 군자곡·상평곡 등의 비축곡은 중종대 후반에 이미 바닥이 나 있었다. 진휼의 재원에 필요한 곡물은 다른 명목의 국가 재원을 전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손이 쉽게 간 것은 田稅穀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흉황으로 1년 전세액 자체가 10만 석에서 26만 석 사이로 크게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의존도를 높힐 수 없었다.0617)조규환,<16세기 환곡운영과 賑資조달방식의 변화>(≪韓國史論≫ 37, 서울大, 1997), 146쪽. 다음으로 손이 쉽게 간 것은 중앙 각사의 불긴요한 공물의 여유분이었다. 16세기에 이르러 공납제도는 防納의 폐단이 심한 상태였다. 이에 대해 국가는 공물을 쌀로 내는 것(作米)을 양성화하여 비리와 작폐를 배제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구황곡 마련의 필요성과 일치하여 활성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연산군 8년(1502) 이래 중종 36년(1541)까지 10회에 걸쳐(중종 9·10년 각 1회, 중종 20년 5회, 중종 24년·36년 각 1회) 구황곡으로 전용한 사례가 확인된다.0618)조규환,<16세기 救荒政策의 변화>( 서울大 碩士學位論文, 1996. 2), 36쪽. 그러나 중앙 각 관서들의 재원도 본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용은 한계가 있었다. 공물의 전용보다는 공물에 대한 직접적인 감면 조치가 민에게 더 혜택이 돌아간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이것이 더 선호되었다.

 16세기 구황정의 가장 중요한 재원은 司贍寺의 노비 身貢이었다. 사섬시 노비 신공은 公奴婢 가운데 立役을 면제받은 納貢奴婢들이 몸값으로 내는 것으로 사섬시에 들어오는 총액은 1년에 면포 약 20만 필(1인당 1필)에 달했다. 당시로서는 중앙의 여러 재원 가운데 사섬시의 신공이 가장 양호한 편이었다. 재고량에 관한 한 조사는 성종 16년(1485)에 면포 724,500여 필·正布 180,000필, 연산군 10년 새 면포 400,000필·묵은 면포 400,000필, 명종 6년(1551) 이전 10,000,000여 필(20만여 同), 1551년 현재 3,000,000필(6만여 同)였던 것을 보고하였다.0619)조규환, 앞의 글(1997), 149쪽. 이 신공은 중종 7년 이래 명종 21년(1566)까지 무려 16회(중종 7년 2회, 중종 8년·중종 36년·중종 37년·명종 2년·명종 3년·명종 8년 각 1회, 명종 9년 4회, 명종 10년·명종 11년·명종 21년 각 2회)에 걸쳐 전용결정이 내려졌다.0620)조규환, 위의 글, 150∼151쪽. 공노비 신공이 구황재원의 마지막 보루로 부각되면서 立役奴婢의 代立에 의한 납포 추세가 일반화되었다. 입역노비에게도 대립을 허용하여 대립을 면제해주는 대가로 포를 거두어 구황재원으로 삼는 추세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명종대에 사섬시 재고량이 천만 필에 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추세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재원도 재해가 장기화됨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감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밖에 어염선세를 쌀로 거두기도 하였지만 이것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0621)조규환, 위의 글, 151∼154쪽. 모든 賦稅가 이렇게 쌀로 환산된 것은 재해의 장기화로 미곡의 생산량이 줄어드는 한편 수요는 높아졌기 때문으로, 이 시기의 한 특징적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되풀이되는 자연재해는 비상적인 진휼곡 확보에 많은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각종 조세 및 신공의 전용에도 불구하고 공공 재원의 동원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부유한 자들이 가지고 있는 곡식도 비상시의 진휼곡으로 동원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15세기에는 義倉 제도의 활성화로 私家의 長利는 억제되었다.0622)김훈식,≪조선 초기 의창제도 연구≫(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경국대전≫(戶典, 徵債)에서도 私債는 관에 알리고 징수하도록 규정하였다. 사채는 50%의 고리대이지만 飢民들의 재생산 기반 유지에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16세기에 자연재해가 거듭되면서 국가는 한동안 자영농민 보호를 명분으로 사채를 불허하는 방침을 천명하였지만 관곡이 모자라자 이를 다시 허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국가는 이제 부민들에게 勸分(나누기를 권장함)의 형식을 빌어 사채를 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입장이 이렇게 바뀌자 오히려 富民들이 사채 놓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생겨 관에 의한 강제적인 민간곡 출연 방식으로 官封에 의한 사채가 장려되었다. 관봉의 원칙은 성종 16년에 이미 수립되었으나 그간 흐지부지 하다가 중종 36년에 새로 독립기구로 발족한 진휼청이「賑恤事目」 9개조를 마련하여 상세한 규정을 만들었다.0623)조규환, 앞의 글(1997), 163쪽. 수령이 여유가 있는 부민을 상세히 파악하여 그 집에서 먹을 곡식은 충분히 남겨두고 그 나머지 수량을 적어서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이를 중앙에 아뢰었다가 관가 창고의 곡식이 모자랄 때 백성을 불러 고르게 나누어주고, 가을 곡식이 익으면 公債의 규칙에 따라 수령이 단속하여 본 주인에게 돌려주되, 호조로 하여금 置簿했다가 解由 때 참고하며, 곡식을 가진 자가 적발되는 것을 꺼려서 나누어 숨기는 자, 권분의 사채를 받아쓴 뒤에 갚지 않은 자는 감사가 추고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곡의 동원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부민들은 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높았으며, 이에 대한 대책으로 納粟受價 또는 納贖補官의 방식이 강구되었던 것이다. 납속수가는 국가의 권분령에 따라 납속한 부민들에게 국가 소유의 곡물·면포·漁箭·銅鐵 등을 지급하는 제도로서,0624)조규환, 앞의 글(1996), 59쪽. 당시 아직 활발하게 진행되던 국내사업 및 국제교역에 부민들이 관계되어 있던 것과 양반 지주층의 곡물 잉여를 정부가 진휼재원 확보에 적극 활용하려는 취지였다. 한편, 납속보관은 사족을 포함한 良人을 대상으로 권분령에 따라 납속한 자들에게 관인에 준하는 신분적 대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보관제는 성종 16년(1485) 8월에 이미 閒遊 양인 즉 留鄕品官들을 대상으로 시행되어 군역면제의 기회로서 환영을 받았다.0625)조규환, 위의 글, 64쪽. 그러나 이 제도는 신분 기강의 문란을 초래할 위험성 때문에 기피되다가 중종 36년(1543) 대흉 때 다시 한 차례 새로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때의 논의에서는 실직이 아니라 官名만 주는 대안이 마련되었지만 역시 채택되지는 않았다. 이후 재난의 정도가 훨씬 더 심각해지는 명종대에 이르러, 사족층을 대상으로 影職 제수가 많이 행해지면서 이 제도는 실제로 시행된 상태가 되었다.0626)조규환, 앞의 글(1997), 172쪽. 부유한 公私賤人을 대상으로 한 納贖免賤, 범죄인을 대상으로 한 贖罪 등의 방법도 동원되었다.

 진휼청은 기근이 발생했을 때 賑濟場(設粥所)을 설치해 기민을 직접 구제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무상으로 기민을 구제하는 구황대책으로서의 賑濟는 극심한 흉년에만 시행하였으며 이것도 국가구제와 민간구제(私救)의 두가지 형태가 있었다. 전자는 군자곡·별창곡 등의 회계 元數에서 곡식을 會減하여 행하였고, 후자는 士族·富民의 개인 여유곡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는 한성부에서 5부의 기민들을 등급으로 구분하여 진휼청이나 호조에 보고하고, 지방에서는 각 읍의 수령들이 기민을 등급으로 가려 감사에게 보고하면 각도 감사는 다시 이를 조사하여 중앙에 보고하여 진제장 설치나 구식곡 분급 여부에 관한 중앙의 지시를 받아 곡식을 마련하여 시행하였다. 진제장은 보통 정월∼4월간에 설치되고 늦으면 5∼6월까지도 열렸다. 그리고 진제시 제공하는 米豆는 어른(장년) 기준으로 1인에게 1승씩(쌀 5합, 콩 5합) 제공되었다. 이것은 평시 노역군에게 제공되는 것의 반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우면 쌀 2승을 1인이 6일 먹어야 할 때도 많았다.0627)조규환, 앞의 글(1996), 74∼78쪽. 16세기 특히 명종대에 이르면 사족으로 굶는 사람들이 진제의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었다. 사족들이 굶으면서도 지체를 의식해 진제장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진휼청에서 직접 방문하여 구제하라는 왕명이 자주 내렸다.0628)조규환, 위의 글, 80∼81쪽. 이것은 소빙기 자연재해가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吳希文의≪尾錄≫은 소빙기 재난 속에 전란까지 겹쳐 관인 신분으로서도 피할 수 없었던 간고를 사실대로 적은 것이었다.

 민간 구제의 경우, 직접구제와 간접구제의 두 가지가 있었다. 전자는 개인이 직접 기민을 ‘保授’(내려 받아 보호함)하여 구제하는 것, 후자는 개인의 저축식량을 관이 동원하여 대신 구제하는 형태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는 위에서 언급한 납속보관제이다. 직접 구제에는 ‘보수’ 구휼과 遺棄兒 收養 등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보수 구휼은 사노비나, 투탁 등을 통해 호강한 무리의 노비 또는 雇工이 된 양인에 대한 구제로서 그 책임이 주인에게 돌아갔다. 이 시기 자연재해가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중앙의 궁방이나 권세가들이 서남해안 지역에 堰田(간척지)을 대규모로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보수 구휼에 의한 노동력 확보에 힘입어 가능하였다. 국가는 극심한 흉황으로 식량이 부족하여 본주가 고공·婢夫 등 투탁인들을 내쫓으면 오히려 이를 금지하면서 보수 구휼을 권장하였다. 국가의 구휼능력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유·기아는 극심한 흉황으로 유이민이 증가하여 그들이 유리 걸식하는 중에 먹을 것이 없어 자식을 길에 버리거나, 나무에 매어놓고 가버리는 가운데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대책은 活人署·진제장 등 국가기관이 맡아 구활하거나, 富實人, 같은 집안(一族) 또는 가까운 이웃(切隣) 가운데 거두어 기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모집 또는 지정하여 키우게 하는 것 등이었다. 국가기관이 구활하는 것은 진휼청의 소관으로 다른 문제가 없으나, 개인이 양육했을 경우, 그 아이의 신분이 문제가 되었다. 성종 12년(1481)의「論賞節目」은 2명을 양육했을 때 하나는 노비로, 다른 하나는 고공으로 삼는 것을 허용하였고,≪경국대전≫ 禮典 惠恤條에도 기른지 10년 후에는 사역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법규정은 부자들이 양인을 강제로 천인으로 만드는(壓良爲賤) 것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지만, 소빙기 자연재해가 계속되는 가운데 민간에게 유·기아 수양을 책임지우는 것은 國穀의 소모없이 가능한 진휼의 한 방책으로 관례화 되었다. 국가는 법적 규정과 수양 위축의 우려 사이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0629)조규환, 위의 글, 제2장 제2절 私的 구제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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