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3. 인구의 감소
  • 1) 조선시대 인구 추정
  • (4) 농업경제사적 연구의 결과

(4) 농업경제사적 연구의 결과

李永九·李鎬澈,<朝鮮時代 人口規模 推計>I·II(≪經營史學≫2·3, 1988).

 이 연구는 인구증가율은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면서 점차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며, 조선 전기에 비해 조선 후기에 이앙법의 보급, 시비법 및 농기구의 발달, 상업적 농업의 발전 등 농업기술면에서 획기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인구 증가율이 전기보다 낮을 수 없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였다.

 조선 초기의 경우, 호구 조사의 완전성이 1/10에 불과하다는 당시의 기록이 있으므로, 이를≪세종실록≫지리지의 전국 호구수로 제시된 것에 적용하여 760만∼800호만 명의 수치를 구했다. 그리고 전기의 인구 성장율 0.15%로 세종 14년(1432)의 인구(약 800만 명으로 추정)에 역산한 결과, 태조 원년(1392)에 대해서는 약 750만 명이란 수치를 얻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토지의 段當收量指數는 세종 26년(貢法)을 100으로 할 때 17세기 전반이 75, 18세기 전반이 119.7, 18세기 후반이 129.5, 19세기 전반이 142.5로서, 그 연평균 성장률은 각각 0.158%·0.46%·0.46%·0.10%·0.25%가 된 것을 제시하고0672)이호철,≪조선전기농업경제사≫(한길사, 1986), 746∼747쪽., 이로 볼 때 17∼18세기 토지생산력의 성장율은 조선 전기의 그것보다 훨씬 높았던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인구 성장율도 이에 준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7세기의 인구 감소에 관한 기록도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기 보다도 호구 파악 방식의 변화나 표현상의 문제라고 비판하면서 17세기의 인구감소를 부정하였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호구총수≫의 각 식년 호구수를 이용해 회귀분석의 방법으로 각 시기의 평균증가율을 산출하여 각기의 인구 규모를 추정하였다(<그림 1>의 ④).

 이상 4개 연구는 분석방법이 서로 다르고 인구추정의 수치도 서로 크게 다르다. 주요 지표 연도가 될만한 세 경우에 대한 3개 연구의 추정 인구수를 예로서 비교하면 다음<표 2>와 같다. 연구자들 사이에는 인구 추정치는 차이가 있으나 증감의 시기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권태환·신용하와 토니 미첼). 그리고 증감의 시기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데도 추정 인구수가 근접된 경우도 있다(토니 미첼과 이영구·이호철의 1591년도, 1669년도). 이런 엇갈림은 아직 연구 방법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문제점을 해소시켜 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연 구 자 태조 원년(1392) 선조 24년(1591) 현종 10년(1669)
권태환·신용하 5,549,000명 14,095,000명 13,192,000명
토니 미첼 4,800,000명 약 10,000,000명 약 10,200,000명
이영구·이호철 7,500,000명 10,120,000명 9,930,000명

<표 2>인구 추정치 주요 년도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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