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4. 요역제의 붕괴와 모립제의 대두
  • 1) 요역제 변동의 추이와 대동법의 성립

1) 요역제 변동의 추이와 대동법의 성립

 徭役은 특정 人身에 대해서가 아니라 개별 民戶에 부과되는 부역노동이었다. 전근대의 국가 권력이 필요할 때마다 불특정의 민호에서 노동력을 징발해서 쓰는 수취 제도인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민호의 요역 부담은 不定期的이며 不定量的이었다. 요역은 전근대의 전시기에 걸쳐 존재하였다. 요역이 부세제도 전반에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축소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無償의 강제 노동을 징발한다고 하는 부역노동의 기본적인 성격은 유지되고 있었다.

 15세기 이후 요역제에 중요한 변동이 초래되었다.0687)有井智德,<李朝初期の徭役>(≪朝鮮學報≫ 30·31, 1964).
尹用出,<15·16세기의 徭役制>(≪釜大史學≫ 10, 1986).
金鍾哲,<朝鮮初期 徭役賦課方式의 推移와 役民式의 確立>(≪歷史敎育≫51, 1992).
姜制勳,<朝鮮初期 徭役制에 대한 재검토>(≪歷史學報≫ 145, 1995).
세종대를 전후해서 요역 징발의 기준이 노동력에서 소유지 면적으로 바뀜으로써 국가 권력의 농민 지배방식에 있어서 변화가 있었음을 반영하였다. 人丁의 직접 지배가 아니라, 토지를 매개로 한 지배 방식이 채택된 것이다. 田結은 여러 종류의 물납 조세를 징수하거나, 요역을 징발함에 있어서 擔稅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였다. 중앙 집권적인 지배 체제를 위한 稅役의 원천이 여기에서 확보될 수 있었다.

 15세기 이후 지주제가 확산되고 광범위한 하층 농민이 지주 경영에 포섭되어 갔다. 그러한 가운데 應稅·應役의 능력은 戶別 보유 노동력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私有地의 광협에 있었다. 收租權的 토지 지배가 약화·소멸되고 있던 시기에 양반 중심의 지주제가 발전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토지 소유를 둘러싼 농민의 계층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0688)李景植,<16世紀 地主層의 動向>(≪歷史敎育≫ 19, 1976).
―――,<朝鮮前期 職田制의 運營과 그 變動>(≪韓國史硏究≫ 28, 1980).
사유지는 가장 분명한 부의 척도가 되었다. 이 시기의 요역제 운영에 差役의 기준은 전결에 있었다. ‘田結出夫’의 원칙에 따라 토지 면적을 기준으로 해서 징발된 요역의 役夫는 곧 烟軍, 혹은 烟戶軍이었다. 15세기 이후의 요역제는 이 같은 기준에 입각하여 개별 민호로부터 연군을 징발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였다.

 요역이 전결의 많고 적음에 따라 부과되는 세목이라 해도, 그것이 관부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민호의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부역노동으로 남아있는 한, 운영상의 불합리성을 배제하기는 어려웠다. 요역제가 노동력 직접 징발의 力役으로 남아서 신분적 지배체제 아래 군현 내부의 독자적인 운영 체계에 맡겨지는 한, 여전히 ‘差役不均’의 폐단을 극복할 수 없었다. 따라서 요역제 개선을 추구하는 농민들은 다시 요역의 物納稅化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조대의 梁誠之는 당시 민간의 조세 부담에 관해 언급하면서, 민호 一家의 田稅가 소출의 1/4에 달한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 그 가운데 6할은 잡세가 차지하였다. 이는 여러 종류의 공물을 대납한 것인데, 주로 민호의 요역 노동에 의해서 조달되는 공물·진상물로 구성되어 있었다.0689)≪世祖實錄≫ 권 40, 세조 12년 11월 경오. 공물 대납이 일반화되었던 것은 그와 관련된 요역의 대납 현상이 보편화된 것이기도 하였다. 요역에서의 물납세화 경향은 이처럼 常時雜役 곧 일상적으로 되풀이되던 요역 종목에서부터 개별적인 대납의 방식을 취하면서 구체화되고 있었다.

 물납세화를 추구하였던 농민들의 요구는 군역을 비롯한 다른 형태의 부역제도에서도 드러나게 되었다. 양인 농민을 대상으로 한 皆兵制의 군역 운영 원리는 이 무렵 노동 집약적인 영농방식을 발전시켜 나갔던 농업생산력 수준에 상응하지 못한 낡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군역제는 이미 16세기 이래 代立制·收布制의 법외적인 관행을 빚어내고 있었다.0690)李泰鎭,<近世朝鮮前期 軍事制度의 動搖>(≪韓國軍制史≫ 近世朝鮮前期篇, 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 1968). 임진왜란 시기에 군역에서 ‘兵農分離’의 논의가 크게 일어났던 것은 이 같은 군역의 물납세화 요구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0691)尹用出,<壬辰倭亂 시기 軍役制의 동요와 개편>(≪釜大史學≫ 13, 1989). 訓鍊都監의 성립은 그 부분적인 실현이었다. 병농분리론은 전통적인 병농일치의 皆兵制를 부정하는 것이다. 당시의 지배층 관료들은 붕괴일로에 있는 군역제를 재건하기 위하여 기왕의 사회경제적 변동을 현실로서 인정하고, 그 위에 收布制와 募兵制의 전면 도입을 모색하였다. 그들의 주관적인 의도와는 관계없이 병농분리론은 군역제의 신분제적 운영원리를 폐기하는 방향으로, 稅役 체계의 체제적 유지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같은 변동은 또 다른 부역노동의 세제인 요역제의 운영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농민들은 요역 노동의 물납세화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요역 징발된 농민들은 흔히 代立의 방식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지방 관부에서는 때로 요역 농민의 현물 대납을 허용하고 있었다. 17세기 이후 노동력 징발의 군역제가 전국적인 차원에서 공식적인 물납의 군역세로 개편되고 있었을 때, 노동력 징발의 요역 또한 물납세화·전결세화의 움직임을 보이게 된 것이다. 大同法 성립의 의의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요역의 물납세화·전결세화 과정을 전국적인 차원에서 추인하고 법제화하는 데 있었다.

 대동법이 광해군 즉위년(1608)부터 약 100년간에 걸쳐서 전국에 실시되면서 공납제는 물론 군역·요역 등의 역제에도 중대한 변화가 초래되었다. 대동법은 종래의 공물·진상과 아울러 농민의 부역노동 가운데 일부를 전결세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동세는 공물·진상의 마련을 위한 京納分인 上納米와 각 군현의 官需 및 잡역의 충당을 위한 儲置分인 留置米로 나뉘어 운용되었다. 공물·진상이 전결세화되는 가운데 그것의 생산·조달·운송에 관한 요역이 자연스럽게 이에 포함됨으로써 해소될 수 있었다. 종래 요역 노동에 의해 마련되던 물종들이 貢價 구매 방식으로 혹은 役價를 지불하고 노동력을 구매하는 방식을 통해서 조달된 것이다. 공물·진상과 관련된 요역은 본래 요역의 여러 종목 가운데 비교적 정기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는 군현에서 개별 민호에 정례적으로 부과되던 常時雜役이었으며 민가의 요역 노동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동미 상납분의 용도 가운데에는 종래 민간의 요역 노동에 의해서 조달되던 공납·진상 물자의 구입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컨대 奉常寺의 貢案에 포함된 中脯·생토끼(生兎)·생사슴(生鹿)·땔나무(柴木) 등이라든지, 司宰監貢案의 燒木, 瓦署의 吐木 따위는 대동법 이후 貢價 구매 방식으로 조달방식이 전환되었다. 또 공납·진상과는 별도로 중앙 각사에서 민호에 부과했던 여러 잡물도 대동세에 흡수될 수 있었다. 造紙署의 石灰, 修理契의 영선 공사를 위한 재료 등이 그러하다. 아울러 奉常寺·典牲署·司宰監 등을 비롯하여 소속 공인들이 宣惠廳으로부터 공가를 받는 아문들은 대개 ‘役價’를 지출 항목의 하나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각 아문이 정기·부정기적으로 필요한 임시적인 노동력을 구매하기 위한 비용이었다. 역시 대동법 이전에는 한성부 방민들을 주로 사역하던 요역의 분야였던 것인데, 고립제가 적용됨으로써 役民의 분야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 분야였다.

 선혜청의 공가 가운데 일부는 各宮·各司로 직접 교부되었다. 그 중 西氷庫·東氷庫에는 藏氷을 위해서 각기 藏氷價와 役軍價 및 갈대 刈取軍價를 지급하였다. 장빙가는 장빙하는 데 소요되는 여러 잡물의 조달을 비롯하여 빙고의 수리비용 등이 포함된 것이다. 역군가와 예취군가는 이 일에 고용된 일꾼들의 품삯이었다.0692)≪萬機要覽≫, 財用編 各貢. 이처럼 종래 요역을 징발하던 분야의 하나였던 장빙역에서도, 대동법 이후에는 노동력 직접 징발 방식의 요역 노동이 아니라 모립제의 고용노동이 적용되어야 했던 것이다. 대동미 유치분의 용도 가운데에도 잡물 조달의 요역을 대신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각종 官需米·油淸紙價米를 중심으로 하여 제사에 쓰이는 牛脯 등의 祭需, 각종 선박의 개조에 소요되는 지출 등이 포함되어 있다.0693)≪湖西大同事目≫.

 일부의 身役도 함께 전결세화되어서 대동미에 흡수될 수 있었다. 지방 향리의 京役이었던 其人과 京主人, 지방 定役戶의 신역이었던 司甕院의 漁夫와 鷹師, 繕工監의 鴨島坪直 및 지방 民丁의 選上役이었던 皀隷 등의 신역이 전결세화된 것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 같은 신역이 대동미에 포함되기에 이른 것은 그 역이 과중한 데다가 중간 수탈의 폐단이 따르기 때문이었다.0694)韓榮國,<大同法의 實施>(≪한국사≫ 13, 국사편찬위원회, 1978).
德成外志子,<朝鮮後期의 貢物貿納制>(≪歷史學報≫ 113, 1987).
이 같은 신역은 苦役인 만큼 17세기 초엽에 이르러서는 응역자들의 심각한 피역 저항에 봉착하게 되었다. 특히 거듭되는 전란을 겪으면서 응역자의 상당수가 달아나 버리는 등 신분제에 입각한 개별 인신의 파악을 전제로 했던 신역 체계의 붕괴 조짐이 뚜렷하였다. 지배층 관료들은 이 같은 신역을 대동세에 흡수함으로써 부역제도 와해에 소극적으로나마 대응하려 했던 것이다.

 대동법의 시행과 더불어 요역의 잡다한 종목 가운데 일부도 전결세화될 수 있었다. 예컨대 禮葬造墓軍의 역은 王子 이하 종친·공신을 비롯하여 1품 이상 관료의 장례를 위한 묘소 조성의 요역이었다. 경기 주민이 주로 징발 사역되었던 점에서 지역적인 특성을 지닌 요역 종목이기도 하였다. 조묘군을 민호에서 징발하던 폐단은 17세기에 들어서 대동법이 실시됨과 함께 일단 개선될 수 있었다. 대동미 수입의 일부로서 조묘군을 ‘給價募立’하는 募立制가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장조묘역은 특정지역에 부정기적으로 부과되는 토목공사의 요역이었지만 과도한 부담이 집중되는 고역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개선책이 모색되던 분야였다. 新舊官 迎送의 役 또한 농민들이 부담하던 잡다한 요역 종목의 하나였다. 17세기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 대동미 유치분의 용도 속에 迎送刷馬價가 포함됨으로써 원칙적으로 이를 대신할 수 있게끔 법제화되었다. 신구관 영송의 역은 공납·진상 등과는 무관하였지만 비교적 정례적인 성격을 지닌 무거운 부담의 요역 종목이었다. 그 때문에 전국적으로 통일된 대동법의 규정 속에 이를 흡수할 수 있었다. 대동법 이전에는 刷馬價를 人吏結이나 民結에서 그때마다 거두어 썼던 것인데 남용하는 등 폐단이 심하였다. 이제 영송쇄마가를 대동미에 포함시킴으로써 그 지출 액수를 제한하기 시작한 것이다.0695)韓榮國,<湖西에 實施된 大同法>上·下(≪歷史學報≫ 13·14, 1960·1961).
姜萬吉,<朝鮮後期 雇立制 發達>(≪韓國史硏究≫ 13, 1976).

 요역 종목 가운데 몇 가지는 아예 대동세 상납미의 용도 가운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명시된 것들도 있었다. 예컨대 上納牛馬牽軍役이란, 대동법 실시 전부터 제주와 지방의 여러 목장에서 상납하는 牛馬의 몰이꾼인 牽軍을 민간에서 차출하는 요역이었다. 또 禮葬 擔軍의 역과 관청 공문인 關文을 전달하는 심부름일 등은 각 군현의 境上에서 烟軍을 교체시키는 방식으로 부과하는 요역이었다. <大同事目>에서는 이 같은 요역 종목들을 모두 그대로 존속시킨다고 규정하였다. 나아가 유치미로서 마땅히 지출되어야 할 지방 경비의 일부도 민간의 부담으로 그대로 남게 되었다. 예컨대 군현에서의 雉·鷄·柴·草·氷丁의 조달 뿐 아니라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不時遞易’되는 수령의 迎送刷馬價 조달, 文武試에서의 假家 설치의 일, 화약 원료인 焰悄를 구워내는 일 등이 여전히 민간의 부담으로 남았던 것이다. 그밖에 대동사목에 언급조차 되지 못했던 많은 요역 종목들이 대동법 이후에도 민호의 부담으로 남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같은 잡역·잡물의 조달은 八結作夫制로 운영되던 당시의 전결세 납세 조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실학자 柳馨遠은 17세기 중엽 일부 지방에서 실시되던 대동법에 관해서 적극적인 지지의 뜻을 보였다. 백성들로부터 수취함에 있어서 定制·定數를 설정하는 등 일정한 규모를 세워서 중간 수탈을 배제할 수 있게 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미 대동법을 시행하는 군읍에서는 각종 수요 물자를 쌀로 환산하여, ‘雜徵之弊’를 없애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대동법은 그가 구상하는 經稅에 접근하는 세제였다. 모든 과외의 잡부를 없애고 경세라고 하는 하나의 세목으로서 공적 경비 전체를 충당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여기에는 공물·진상을 비롯하여 여러 잡세 및 군현의 각종 비용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면 농민들은 쌀로 바치는 일정한 경세의 수량을 알고 있으므로 균평하게 한 번씩만 낼뿐이어서 부당한 중간 수탈이 개입할 틈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국가의 재정 지출에 있어서도 經費의 항목을 세부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재정 운영의 합리화·표준화를 기하자는 주장이었다. 유형원의 경세에 관한 구상은 당시의 대동사목을 기초로 하면서 그 미진한 것을 개혁한 뒤에 전국을 대상으로 획일적·통일적으로 실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유형원은 당대에 시행되고 있었던 대동법을 정의하기를 “모든 국가적 수요를 헤아려 쌀로 거둔 뒤에 모든 비용을 관부에서 정식대로 지출하고, 모든 力役에 관부에서 삯을 지불해서 민역을 따로 징발하지 않게 하는 법”이라고 하였다. 또 대동법과 그 이전의 ‘賦役之規’를 서로 대비하면서 전자는 국가의 수요를 헤아려서 결정한 수량의 쌀을 받아 관에서 지출하도록 제정한 것인데 비해, 후자는 원래의 부세는 가볍지만 일이 있을 때마다 백성에게 거둠에 정해진 한도가 없는 것(逐事斂民無定限者)이라 하였다.0696)柳馨遠,≪磻溪隨錄≫ 권 3, 田制後錄 上, 漕運·經費 및 권 19, 祿制, 外方吏隷祿磨鍊. 그가 지적한 대로 물납세의 징수량이 늘어난다 할지라도 세액을 일정하게 정해주는 쪽이 피지배층의 처지를 개선시켜 줄 수 있었다. 담세자인 농민들이 부역노동의 속박과 부당한 중간수탈에서 점차 자유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지방재정 운영의 모순은, 이 같은 ‘賦役之規’, 곧 요역 징발의 방식이 완전히 청산되지 못하였다는 데 있었다.

 대동세에 흡수된 요역은 이처럼 공납·진상의 요역을 중심으로 한 일부 요역 종목이었다. 그 나머지의 요역은 대동법의 시행에 따른 직접적 영향 아래 놓여 있지 않았다. 대동법 성립 초기의 지배층 관료들은 공납 뿐 아니라 모든 요역의 부담(一年貢賦及凡百應役之價)을 田結稅化할 것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복잡 다양한 요역의 내용을 전국적이며 획일적인 대동세 안에 일괄적으로 흡수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초기부터 山陵과 詔使의 役은 “이 한도에 구애되지 않는다”라는 식의 단서를 달아 두기도 했지만 사실상 일부의 요역 종목만 대동세에 흡수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 때문에 대동법 이후에도 민호에서 요역을 징발하는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지적되곤 하였다.0697)≪光海君日記≫ 권 4, 광해군 즉위년 5월 임진 및 권 13, 광해군 원년 2월 경진.
≪仁祖實錄≫ 권 4, 인조 2년 정월 정묘 및 권 5, 인조 2년 3월 임술.

 요컨대 대동법의 시행과 함께 노동력 징발의 요역이 일체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토목공사의 요역을 비롯하여 국왕·사신·관리 등이 왕래할 때마다 지방 군현의 농민들이 부담하게 될 支供의 요역은 대체로 부정기적인 요역 종목이었다. 토목공사나 지공의 요역은 일이 있을 때마다 차역하는 것인 만큼 그로 인해서 민호에 돌아오는 부담은 일정치 않았으며 그 대부분이 대동법의 규정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의 시행으로 인해서 力役으로서의 요역이 수취제도 전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약화되는 계기를 맞게 된 것은 분명하다. 대동법 이후 한때 僧役이 크게 강화되었던 것은 그 같은 요역제 변동의 한 표현이기도 했다. 대동법 시행 이후 “烟軍을 징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僧軍을 징발하는 일이 많았다는 당시의 지적은0698)≪備邊司謄錄≫ 27책, 현종 9년 11월 6일. 대동법 시행 이후 요역의 물납세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 그에 따라 초래된 노동력 공급 체계에서의 결손분을 승역으로 전가하였던 사정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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