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4. 요역제의 붕괴와 모립제의 대두
  • 2) 대동법 이후의 요역제 운영

2) 대동법 이후의 요역제 운영

 조선 전기 요역의 법제적 규정을 담은≪經國大典≫의 戶典 徭賦條에는 “모든 토지 8결에서 一夫를 내되, 1년의 부역은 6일을 넘지 못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조항은 전결을 차역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원칙을 국가적 차원에서 제도화한 것이다. 요역제 운영에 관한 법적 규정은 영조대의≪續大典≫에서 다시 “貢案에 오른 京司 貢物로서, 五道에 分定된 것, 五道 各 營邑의 所需로서 民役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모두 作米한다”는 규정으로 대체되었다. 民役에서 나오는 것, 즉 常時雜役의 요역 징발에 의해 조달되던 각종 공물은 이제 대동미의 징수로 대체된 것이다. 단 각읍의 雉·鷄·柴·草·氷丁은 作米에 포함시키지 않아서 전처럼 ‘役民’하는 종목임을 분명히 하였다. 아울러 “山陵 및 詔使 외의 一切 요역은 다시 民을 번거롭게 할 수 없다”는 규정도 첨가해 두었다.0699)≪續大典≫ 戶典, 徭賦. 산릉과 조사의 역이라고 표현된 두 가지 종목에 한해서만≪경국대전≫요역 징발 규정에서와 같은 전결에서의 役夫 차출이 용인된 셈이다.

 이처럼 대동법 이후의 요역은 공식적으로는 몇 가지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나는 지방 관청의 일상적인 官需 잡물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지방재정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고자 잡역세 징수를 허용하는 것이다. 이는 대동법 이후 농민들이 부담하던 물납의 烟戶雜役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중앙 정부에서 부정기적으로 긴급하게 차역하게 되는 산릉과 조사의 役事였다. 두 가지 역사는 모두 국가적 대사로서 단기간에 많은 인력과 각종 잡물이 소요되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고 일찍부터 民力에 크게 의존하는 요역 종목이었다. 대동법 성립 초기부터 여러 가지의 요역 종목 가운데 특별한 것으로 주목되었으며 결국 민력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역사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0700)≪光海君日記≫ 권 4, 광해군 즉위년 5월 임진.
≪仁穆王后山陵都監儀軌≫ 啓辭, 임신 7월 8일.

 산릉역은 왕이나 왕비의 능 또는 세자 등의 묘소를 조성하거나 이를 遷葬·改修하기 위한 工役이었다.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능묘의 조성은 수개월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대규모 역사였기 때문에 막대한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했다. 17세기 초엽의 산릉역에서는 대체로 8∼9천명의 烟軍을 징발하는 것이 관례였다. 조선 초기 이래 요역 농민들은 ‘民結之丁夫’, ‘外方田結之軍’, ‘外方農民’, ‘烟戶軍’이라 불리면서 산릉역의 주된 노동력으로 징발되어 왔다. ‘國家莫重之事’인 만큼 오랫동안 노동력 직접 징발의 力役制로 남아 있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산릉역에서는 陵所의 토목공사를 진행하는 데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능소 부근의 경기 및 한성부 민호에 돌아가는 다른 형태의 요역 부담이 있었다. 假家를 짓는 일, 會葬하는 관리들에 대한 접대를 각 고을에서 나누어 맡는 일 등이 경기 주민의 요역 부담으로 돌아갔으며 國喪의 발인 때 단기간 사역하는 擧士軍을 비롯한 각종 差備軍 수천 명은 한성부의 요역인 坊役으로 징발되었다. 방민들 가운데는 군문·아문 등에 투속함으로써 이 같은 방역으로부터 피역하려는 인구가 날로 증대하였으며, 결국 방역의 물납세화를 촉진하는 구실을 하였다.0701)金東哲,<18세기 坊役制의 변동과 馬契의 성립 및 都賈化 양상>(≪韓國文化硏究≫ 1, 釜山大, 1988).
이지원,<17∼18世紀 서울의 坊役制 運營>(≪서울학연구≫ 3, 1994).

 산릉역에서는 이처럼 많은 인원을 징발해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대규모의 요역 징발은 관민 어느 쪽에서나 점차 힘겨운 일이 되고 있었다. 노동력 직접 징발의 부역노동이 지니는 비효율·비능률이 두드러지게 드러났으며 요역 농민의 피역·도망 등 저항과 대립·대납의 움직임에서 보듯이 물납세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산릉역에서의 요역 징발 체계는 17세기 초엽부터 뚜렷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광해군 즉위년(1608)의 선조 穆陵 산릉역에서 부역군 가운데 자원자에 한해 면포를 代納하도록 허용했던 것을 시발로 하여 인조 4년(1626)의 毓慶園 禮葬役, 인조 8년 선조 목릉 遷陵役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각도의 烟軍을 징발하는 대신 價布를 거두게 되었다. 노동력을 징발하는 요역제를 대신하여 募立制의 노동력 조달방식이 적용되는 비중은 점차 늘어났다. 결국 17세기 중엽부터는 산릉역에서 연군을 요역 징발하던 일은 그치게 되었다. 산릉역에서의 노동력 수급체계는 이같이 부역노동에서 모립제로의 점진적인 이행 과정을 보여준다.0702)尹用出,<17·8세기 役夫募立制의 성립과 전개>(≪韓國史論≫ 8, 서울大, 1982).
―――,<17세기초의 結布制>(≪釜大史學≫ 19, 1995).

 산릉역에서 요역 농민인 연군을 징발하지 않는 대신 많은 일꾼을 고용하여야 했으므로, 당연히 막대한 재정 지출이 요구되었다. 結布는 산릉역의 재정 수요를 해결하기 위한 임시적 전결세로서 부과되었다. 전국의 모든 수세지에서 거두어진 결포는 대개가 산릉역의 고용 인부인 募軍의 품삯으로 지불될 터였다. 이처럼 산릉역에서 대규모의 요역 노동을 징발하는 대신 烟軍價를 결포의 형식으로 거두었던 일은 인조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이후의 여러 산릉역에서는 더 이상 결포 징수의 사례를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대동법의 시행 범위가 확산되고 국가재정 수입 체계가 복구됨으로써 구태여 임시적 결세 수취방식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역부 고용에 쓰일 재원을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동법 이후에도 산릉역과 더불어 민역을 사용할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규정된 요역 종목의 다른 하는 詔使之役 즉 중국 사신의 접대와 결부된 요역이었다. 事大外交의 상징으로서 역시 막대한 경비와 노동력이 징발되던 역사였다. 사신이 왕래하는 沿路 各官에서는 많은 요역 부담이 따르고 있었다. 또 각종 관아 건물의 役事를 맡는 役軍 및 差備軍·修掃軍·助役軍 등의 명목으로 漢城府의 坊軍 및 각도의 烟軍 등이 징발되었다.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일은 민호에게 많은 부담을 강요하는 국가적인 大役의 하나였다. 詔使之役에는 운송의 노역을 담당하기 위해서 많은 馬匹이 함께 징발되었다. 17세기 초엽부터는 이 같은 刷馬를 징발하지 않고 민결에서 價布를 대신 거두도록 조치하였다. 당시 경성에는 “말을 갖고 있으면서 고립에 응하려는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하는데 遠道의 농민들이 왕래하는 폐단을 덜 수 있는 것과 영접도감에서 “때맞춰 필요한 만큼 고립할 수 있다”는 장점이 함께 고려된 결과였다. 전결에서의 요역 징발 방식을 버리고 임시적인 전결세를 대신 거두는 쪽이 雇立人, 요역 농민, 관부의 三者 모두에게 편리한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0703)≪光海君日記≫ 권 7, 광해군 즉위년 8월 갑술.
≪迎接都監軍色謄錄≫, 무신 8월 20일.

 광해군대 초기부터 조사역에 드는 재정 지출이 크게 늘어났으며 호조를 중심으로 다양한 조달책이 논의되었다. 그 가운데서 채택된 것은 각도에서 ‘田結收米’하는 방도였다. 임시적인 결세를 운영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광해군대 후기를 거쳐서 인조대 이후의 조사역에 대한 통상적인 대응책으로 나타나는 ‘전결수포’ 곧 결포에 선행하는 수취방식이었다. 조사역은 임시적인 結米, 혹은 결포의 형태로 전결세화의 경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조대에는 조사 접대를 위해서 10만 량 가량의 은을 마련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三結布·四結布 등의 형태로 전결에 부과해서 거두어들인 면포를 가지고 市廛과 민간에서 은을 구입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같이 임시적인 전결세로서의 결미·결포는 광해군 초기부터 시행되기 시작하여 인조 연간까지 수시로 채택되었다.

 17세기 초엽의 여러 別役 가운데 특히 많은 인력과 물자가 소모되는 산릉역·조사역의 두 가지는 대동법 이후에도 민역의 대상으로 파악되는 국가적인 大役이었다. 그 때문에 17세기 초엽의 빈번한 결포 징수의 조치가 이 분야에서 집중되었다. 인조대에는 산릉역이나 조사의 役 외의 다른 別役, 예컨대 군병의 대규모 징발에 따른 行資의 마련 등 비상한 사태에 직면해서 막대한 재정 지출을 채우는 방도로서도 결포가 징수된 바 있었다.

 양란 이후 상당 기간의 복구기간을 거치면서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국가재정의 운영 또한 차츰 개선될 수 있었다. 전결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대동법의 실시 지역 또한 확산됨으로써 재정 형편은 17세기초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부정기적인 임시세였던 결포를 일마다 징수할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그 같은 부세제 운영의 자의성 또한 배제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부정기적인 노동력 징발로부터 부정기적인 전결세의 징수, 나아가 정기적인 전결세의 징수로 바뀌어갔던 요역제 운영의 변동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국가적인 大役에서의 요역 징발을 대신하였던 결포는 임시적인 전결세에 속하였다. 지배층 관료들은 각종의 별역에서 전처럼 요역의 노동력을 징발하지 않고 결포를 거두게 되었던 동기를 “농번기의 역사에 외방 농민들을 징발해서 사역하면 폐농할 우려가 있다”는 것, “원거리로 부역 징발하지 않음으로써 농민들의 노력과 비용 부담을 덜어주어 民力을 펴게 한다”는 것 등으로 표현하곤 했다. 요역노동의 비효율성을 해결하면서 농민층의 영농 활동을 보장해 줄 필요가 절실했던 국가권력의 입장, 요역의 물납세화를 희망하는 농민층의 요구가 결합할 수 있었다.

 17세기 초엽의 결포제는 이처럼 별역에서의 요역 징발을 물납세로 흡수해 버리고 해소시키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이 시기의 농민들은 국가권력의 자의적인 노동력 징발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는 가운데 전결에 부과되는 현물세는 늘어나게 되었지만 관부에의 인신적 예속과 일상적인 노동력 수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점에서 자립적인 농민 경영을 발전시킬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요역을 비롯한 부역노동의 물납세화가 가능했던 것은 물론 그 담당자인 농민층 일반의 담세 능력이 신장된 결과, 곧 농민경제 성장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이처럼 국가적 大役인 산릉역과 조사역은 중앙 정부가 주관하는 부정기적인 대규모 역사로서 민호의 노동력을 수시로 징발할 수 있는 요역의 종목으로 잔존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이후 이 같은 대역에 있어서도 점차 상품화된 노동력을 구매하는 募立制의 노동력 수급체계가 적용되고 있었고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17세기 전반의 결포제 시행은 대동법 이후 한 때 노동력 징발 방식으로 운영되도록 허용되었던 국가적 대역의 물납세화를 촉진하는 구실을 했다. 또 다른 형태의 역역으로 잔존하였던 지방 군현의 요역은 군현 단위의 잡역세를 통해서 물납세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민호의 노동력을 수시로 징발해야만 하는 각종의 부정기적인 요역 종목이 전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요컨대 대동법·잡역세만으로는 민호의 역역 부담이 완전히 해소될 수 없었다.

 대동법 이후 일부 역종에서는 종전의 노동력 징발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경우의 요역제 운영 방식은 종래의 그것과 달랐다. 지방 군현의 요역제 운영 방식에서 드러난 새로운 특징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지방관의 요역 징발에 관해서 많은 제한이 가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차역의 시기, 요역 일수 제한 등에 관한 제약 뿐 아니라 감영·비변사 등 상급기관의 통제 체계를 강화함으로써 지방 守令의 자의적인 요역제 운영을 규제하고 있었다. 지방관이 “함부로 민정을 징발하는 일”은 중요한 처벌 대상이 되었다. 특히 흉년·기근시에 요역을 징발할 수 없었다. ‘凶歲役民’은 크게 민폐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경우 조정에서는 흔히 “京外營繕을 비롯하여 무릇 擾民之事에 관계되는 것은 일체 정지한다”는 지시사항을 지방 각 관에 거듭 다짐하곤 하였다. 아울러 농번기에 차역할 수 없는 것도 물론이었다. 이 같은 점은 전 시기에도 흔히 강조되던 것이기는 하지만 특히 17세기 이후에는 모립제가 운용되고 있어서 연군에 대신할 수 있는 대체 노동력이 존재하였던 점에서 사정이 달랐다. 따라서 농민을 대상으로 한 무리한 차역이 감행될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었다. 단 품삯을 지불하기 위한 재정 지출은 지방 관부의 새로운 부담이 될 것이다.

 양란을 겪은 17세기 초엽 이후 인구는 급격히 감소된 바 있었다. 그에 따라 농업 생산의 분야에서부터 노동력 절약의 문제가 크게 대두하였다. 이 같은 조건 아래 지배층 관료들은 부역노동에 있어서도 ‘省力’ 곧 노동력 절약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한 차역은 농민들을 다시 유리하게 만들고 농업생산력을 파괴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부역노동을 물납세로 전환시킬 수 있는 한 계기가 조성된 것이다.

 이 시기의 요역을 비롯한 부역노동이 물납세로 개편될 수 있었던 사정은 농업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을 전제로 한 것이기도 했다. 토지 생산성 중심의 노동집약적인 영농방식이 보편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農時를 지켜야 할 필요성이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크게 제기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농민들은 개별 농민경영의 자립성을 제고시키고 있었고 양반 지주층과의 개별적·인신적 주종관계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었다. 나아가 국가권력의 정기적이거나 혹은 부정기적인 노동력 수탈로부터 벗어나서 자율적인 영농을 보장받고자 했다. 지배층 관료들의 입장에서도 안정적인 수취의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 役制를 개편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둘째, 요역을 징발할 경우라 해도 종래와 같은 완전한 무상의 강제노동일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요역 농민에게 대동미 등의 세미를 덜어 주거나 役糧을 지급하는 일이 관행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지방 군현에서는 대동세의 저치미를 會減하여 농민들의 役米로 분급해 주는 일이 많았다. 이 무렵 각 관에서는 여러 역사를 진행하기 위해서 요역 징발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같은 역량을 마련하는 일이 전제가 되어야 했다. 이것이 관부의 큰 재정적 부담이 되고 있었다. 당시 중앙 및 지방 관부의 재정 수요가 급증하게 된 것은 이처럼 크고 작은 각종의 역사에서 지급되어야 할 요역의 役糧, 혹은 募立의 雇價가 점차 증대하였다는 데에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役制가 붕괴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는 가운데 관부의 재정 지출은 큰 폭으로 증대된 것이다. 군현의 공해를 때맞춰 수선하는 일이나 관내의 성곽을 보수하는 일은 수령의 일상적인 업무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의 營建役·築城役에서의 요역 징발은 대체로 수일간의 단기간 노역이었고 무상의 강제노동이라는 부역노동 본래의 모습과는 달리 ‘償役’의 錢·米 등이 粮料·施賞 등의 명목으로 소요되었다. 그 때문에 지방관아 건물 따위를 한 차례 수리하려면 많은 物力이 확보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 되었다.

 셋째, 요역의 代納制가 점차 보편화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요역을 징발하는 대신 처음부터 현물이나 화폐를 대납토록 허용하는 방식이었다. 조선 후기의 지방관들은 역사가 있을 때마다 응역할 수 없는 민호에서 闕錢을 거두어 들이거나 혹은 처음부터 民錢을 징수하는 일이 많았다. 탐학한 수령들은 역사를 빙자하여 ‘逐戶收錢’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령들은 궐전 혹은 防雇錢·戶錢·民錢·役價米 등의 이름으로 요역의 대가를 징수할 수 있었다. 중앙이나 지방 관부에 의한 연군 징발은 이미 상례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러한 가운데 민전을 대납하는 관행에서 볼 수 있듯이 요역은 점차 부정기적인 현물수취 형태의 하나로 전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농민층은 국가권력의 가혹한 노동력 수탈 체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반면 증대되는 잡역세 등의 물납세를 새로이 부담하게 되었다.

 18·19세기의 사정을 보여주는 丁若鏞의≪牧民心書≫에서는 당시의 ‘力役之征’ 곧 요역의 종목 가운데 대표적인 것 12가지를 들고 있다. 그것은 둑쌓기(築堰), 도랑 파기(鑿渠), 저수지 준설(浚湖), 상여 메기(擔擧), 배 끌기(曳船), 목재운반(曳木), 공물 수송(輸貢), 말 몰이(驅馬), 얼음 저장(藏氷), 장사 돕기(助葬), 가마 메기(肩輿), 길짐(路任) 등이다. 이 같은 노역은 당시의 농민들에게 일상적으로 부과되던 것은 아니었다. 지방 군현의 지역적 특성과 관련하여 특정의 역사가 자주 되풀이되는 경우도 있으나 보편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요역이 거의 공통적으로 대납제의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데서 이 시기 요역제의 특징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각 분야의 역역은 실제로는 防雇錢의 징수, 戶錢·民錢의 濫收, 氷價米의 수취 등을 중요한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0704)丁若鏞,≪牧民心書≫ 戶典 六條, 平賦 下.
≪英祖實錄≫ 권 2, 영조 즉위년 12월 병신 및 권 71, 영조 26년 6월 계사.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기적인 잡역세의 수탈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동법이 성립된 이후 조선 후기의 농민들이 부담하던 烟戶雜役은 노동력 징발의 요역과 그것이 현물세화된 잡역세를 포괄하고 있었다. 노동력 직접 징발의 요역이 소멸되던 추세를 보였던 것에 비해 현물 징수의 잡역세는 다양한 종목에서 마련되고 증액되었다.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는 가운데 중앙 및 지방 관부의 재정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대하고 있었고 그만큼 현물세의 增徵이 요구되고 있었다. 지주제가 새롭게 발전하는 가운데 토지는 가장 확실한 稅役의 원천으로 파악되었다. 요역을 비롯한 부역노동의 물납세화 과정, 그것이 다시 토지로 집중되는 전결세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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