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4. 요역제의 붕괴와 모립제의 대두
  • 3) 잡역세의 수취

3) 잡역세의 수취

 대동법 이후 각 군현에서는 관부의 운영에 필요한 제반 경비를 부분적으로는 대동미의 유치분에 의존했다. 점차 상납미의 비중이 늘어남에 따라 유치미 이외의 다른 재정 수입원을 더욱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되었다. 환곡의 부세화, 관청 고리대의 모색, 屯田 경영의 확대 그리고 잡역세 수취의 강화에 의해서 지방재정의 원활한 운영을 도모하였다. 더욱이 종래 농민의 요역 노동에 의해 수행되던 제반 역사는 부역노동이 쇠퇴하고 있던 시기에 다시 강행되기 어려웠다. 토목공사의 요역이나 支供의 요역에서 종전의 노동력 징발에 대신하여 현물의 잡역세 수취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크게 ‘民戶收捧’하는 戶役과 ‘民結收捧’하는 結役으로 나뉘었다. 대동법 시행 초기에는 연호잡역이라 하듯이 호역의 비중이 컸지만 점차 결역의 비중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대동법을 먼저 시행했던 경기·강원·충청도에서는 17세기 후반 조정에서 잡역세의 과도한 부담이 거론될 만큼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고 있었다. 이 같은 과외 잡세가 먼저 호역에서 비롯되었던 원인은 대동세 12두의 과징으로 말미암아 민간의 결세 부담이 대폭 증대하게 되었고 또 대동법의 관련 규정에서 민호에 대한 잡세 부과를 금지한다고 표방하였기 때문이다.0705)金玉根,≪朝鮮王朝財政史硏究≫Ⅲ(一潮閣, 1988), 360∼361쪽. 호역·결역의 형식으로 징수되는 군현의 잡역세는 첫째 官需의 각종 잡물을 조달하는 데 쓰였다. 대개 官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러한 물자들은 종래 민호에서 현물 그대로 징수하거나 혹은 민간의 요역 노동에 의해 조달될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價米·價錢의 형태로 戶·結에 부과되는 현물 조세가 된 것이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雉·鷄·柴·草·氷丁 등의 관수 물자를 호렴 혹은 결렴하는 연호잡역으로 거두고 있었다.

 잡역세의 두 번째 중요한 용도는 각종 역사에 필요한 노동력의 조달이었다.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암행어사·관찰사 등의 관리들이 출현하면 이들을 접대하기 위해서 民錢을 거두어야 했고 禮葬의 일이 있을 때 필요한 擔持軍·雜色軍·造墓軍·莎草軍 등의 명목으로 해당 군현의 농민을 징발하는 대신 역시 민전을 거두어야 했다. 지역에 따라서 役價租·雇馬租·雇價米·息肩租·立馬錢·擔軍錢 등으로 불리는 세목을 정해 둔 경우도 있었다. 이 같은 정기·부정기의 노동력 징발에 대신하기 위한 잡역세인 것이다. 토목공사라든지 영접·지대의 요역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특히 이 같은 종류의 잡역세였다.

 그 같은 잡역세 가운데에는 특정한 역사가 있을 때 쓰이도록 지정된 것도 있다. 예컨대 18세기 말엽 경상도 安東이나 陜川에는 橋梁租·橋梁錢 등의 명색이 있었다. 그 수입으로 관내의 교량을 보수하는 재원으로 삼은 것이다. 開寧에서는 衙修理租란 잡역세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는 新迎時에만 民結에서 거두는 것인데 공해를 수리 단장하는 데 드는 자재 및 役軍 雇價의 재원으로 쓰일 수 있었다. 蔚山의 氷庫修理錢이나 咸安의 官衙修理錢 등은 모두 특정의 토목공사를 대비한 잡역세의 한가지였다.0706)≪賦役實摠≫ 6책·7책·8책.

 요컨대 대동세 유치미의 용도에 포함되지 않았던 지방 관부의 일상적 잡물 구매의 경비로서, 아울러 公衙의 수리·축성·築堤 등 각종 공역의 경비, 국왕이나 사신을 비롯한 중앙 및 지방 관리 등의 왕래에 따르는 각종 역사의 경비를 마련하는 데 이 같은 잡역세 수입이 쓰일 수 있었다. 조선 후기의 잡역세는 그 전시기에 지방적 특성을 가지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운영되던 요역 종목의 대부분이 물납세화된 결과였다.

 여러 가지 잡역세를 수시로 거두기보다는 한꺼번에 거두는 쪽이 지방 관부의 입장에서 편리할 뿐 아니라 농민층의 부담을 덜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방에서 잡역세 운영의 편의를 도모한 개별적 자율적 기구로서 民庫를 설치하였다. 민고에서는 종전의 현물과 노동력 조달 방식에 대신하여 미·포를 거두어 소요 물종을 貿用하거나 노동력을 雇立하였다. 민고의 재정 규모는 갈수록 커져서 고을마다 그 액수의 차이는 결가의 차이를 불러오는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될 만 했다. 민고 운영의 폐단은 지난날 요역에서 그러했듯이 통일적 법제의 지배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자의적 수탈의 가능성이 높았다는 데 있었다. 18세기 말엽부터 민고에 예산제도를 적용하는 방안과 民庫田을 설정해서 해결하려는 방안이 종합되는 가운데 민고 운영에도 개선책이 모색될 수 있었다.0707)金容燮,<朝鮮後期의 民庫와 民庫田>(≪東方學志≫ 23·24, 延世大, 1980).
鄭昌烈,<조선후기 농민봉기의 정치의식>(≪韓國人의 生活意識과 民衆藝術≫, 成均館大 大同文化硏究院, 1983).
張東杓,<朝鮮後期 民庫 운영의 성격과 運營權>( 碧史李佑成敎授停年退職紀念論叢≪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 上, 1990).
金德珍,<朝鮮後期 地方官廳의 民庫 設立과 運營>(≪歷史學報≫ 133, 1992).

 17세기 이후 실시된 대동법과 잡역세의 제도는 요역이 물납세화되는 두 가지 방식이었다. 전자는 주로 공납·진상에 관련된 요역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통일된 방식으로 대납제를 모색한 것이고 후자는 지방 관부의 잡물 조달과 관련된 요역 종목을 포함한 군현의 잡역을 지방별로 대납케 하는 방식이었다. 부역제도의 개편 방향이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보장하고 국가적 수취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이 같은 변동은 지배층으로서도 바람직한 것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부역노동은 물납세로 전환되어 갔고 그만큼 농민층의 현물세 부담은 증대하여 갔다. 그러나 농민층으로서는 그들의 개별적인 농작업 과정을 방해받지 않고 국가권력의 인신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립적인 발전의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피역은 이제 다른 형태로 전개되어 갔다.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그에 따른 재정수요의 폭발적 증대로 현물세를 增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지배기구에 대해서 저항하게 된 것이다. 이는 군역·요역제를 중심으로 한 부역제도의 붕괴과정이었다.

 17세기 이후 대동세·결세·잡역세의 제도를 시행하였던 데서 볼 수 있듯이 요역은 전결세로 재편되는 추세를 보였다. 이는 부역노동의 신분제적 운영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아울러 지주제가 발달하는 가운데 지주적 경제기반에 기생하고 있었던 양반층 일반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것이기도 했다. 대동법 성립 초기에 이 제도의 시행을 통해서 ‘均民役’을 구현할 수 있다고 파악한 것은 요역의 일부가 전국을 대상으로 한 획일적인 방식으로 전결세화됨으로써 그만큼 군현에서의 신분제적 ‘差役不均’을 면하게 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민역이 고르지 못하면 농민층의 저항이 폭발할 것 같은 형세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배층 관료들은 일정하게 불균등의 폐단을 시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조대에 이르러서 균역법이 실시되고 結作의 세목이 신설된 것은 부역노동의 다른 형태였던 군역에 있어서도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전결세로의 흡수가 진행되었음을 뜻하였다.

 17세기 이래 부역노동의 재편성 과정은 군현제적 지배 질서를 강화하는 가운데 수령권을 중심으로 한 국가 권력의 규제력이 크게 신장되는 시기에 수행되었다. 향촌사회에서 士族의 독자적인 지배력 또한 현저하게 손상되었다. 더욱이 이즈음의 부세제는 전결세의 비중을 크게 늘이는 방향으로 개편되고 있었다. 향촌사회의 유력자이며 지주층에 속하는 재지사족의 권력기반은 이렇게 동요하고 있었다. 자립성을 제고시키면서 성장하는 이 시기의 농민들은 양반지주에 대한 개별적·인신적 예속관계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후기 지주제의 변동, 특히 경제외적 강제를 가능하게 했던 신분제적 소유관계·생산관계가 동요하던 현실은 이것과 표리의 관계를 이루었다. 이 같은 사회변동이 요역의 물납세화·전결세화로 나아가는 배경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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