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4. 요역제의 붕괴와 모립제의 대두
  • 4) 모립제의 성립

4) 모립제의 성립

 募立制는 官府에서 인부를 모집하여 각종 役事에 필요한 노동력을 고용하는 제도였다. 모립제는 요역에서의 雇立制였다. 17세기 초엽 이래 크고 작은 각종 역사에는 새로운 형태의 役夫인 募軍이 고용되기 시작하였고 점차 확산될 수 있었다.

 모군은 토목공사 같은 데서 삯을 받고 품팔이하는 사람으로서 ‘募軍’과 같은 뜻으로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건축공사에 있어서 ‘잡인부’ 혹은 ‘막일꾼’ 등의 호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0708)인력개발연구소편,≪한국직업사전≫(1969), 655쪽. 이 같은 비숙련의 단순 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모군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엽부터의 일이다. 처음에는 글자 그대로 ‘役軍을 모집한다’는 뜻으로 서술적인 용어로 쓰이다가0709)≪宣祖實錄≫ 권 201, 선조 39년 7월 기사. 점차 ‘모집한 역군’ 혹은 ‘모집해서 고용하여 부리는 막일꾼’이란 듯의 일반명사로 정착하게 되었다. 모립제가 발전함에 따라 모군은 도시빈민층이나 빈농 등의 전업적·계절적 임노동의 한 전형이 될 수 있었다.

 모립제의 성립은 17세기 초엽 이후 요역제의 붕괴과정에 따른 것이다. 이 시기에는 이미 요역제 운영에 따르는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지내고 난 뒤에 전후 복구책을 모색하던 정세 속에서 많은 폐단을 안고 있던 요역제의 운영에 있어서도 개선책이 강구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요역 부담자인 각 지방의 농민을 役所로 징발하기 어려웠던 전쟁 직후의 상황, 한편으로는 이제까지 토목공사에 많이 동원되었던 군인들도 군사적 필요성이 중대함에 따라 군무에 더 치중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당시의 사정 등이 또한 새로운 여건을 조성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은 17세기 초엽에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상태에 있었다. 당시에는 전쟁의 피해가 극심한 데에다 전쟁 수행과 관련된 많은 요역 부담이 농민들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유리·도망자 또한 많았다. 이같이 인구가 격감한 조건 아래서는 종래와 같은 방식으로 役民하기 어려웠다. 17세기 초엽에는 지난날 100호가 있던 마을이 겨우 대여섯 개의 殘幕으로 남게된 경우도 있었다고 할만큼 촌락의 피해가 채 복구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부득이 지난날과 같은 요역 징발을 꾀하기 곤란하였다.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던 시기에는 노동력을 절약하는 문제가 크게 대두하였다. 벼농사에 있어서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도 여기에서 조성되고 있었다. 양란을 겪은 후에 인구가 크게 감소된 반면 각종 복구사업을 위한 작업량의 증대로 말미암아 노동력이 부족하게 됨으로써 中耕除草를 중심으로 한 노동력 문제의 해결을 위한 농지 경영방식의 개선이 필요했던 것이다.0710)金容燮,<≪農家集成≫의 編纂과 그 農業論>(≪朝鮮後期農業史硏究≫, 一潮閣, 1988), 174∼179쪽. 요역 징발이 거듭되는 곳에서는 농민들이 대거 유리하였기 때문에 정책적인 차원에서도 노동력 절약의 문제는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했다. 이처럼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요역과 같은 부역노동을 물납세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조성하였다. 17세 초엽 요역에서 모립제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民力을 직접 징발하기 어렵게 된 사정과 결부되어 있었다. 더욱이 農時를 고려해야 했다. 농번기에는 烟軍을 요역 징발하기 어렵다는 계절적인 제약성이 따랐고 농민들로부터의 과도한 요역 징발이 농업생산력을 파괴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17세기 초엽의 요역제 운영에서는 역군의 분정과 차역 등 징발과정에서의 폐단과 부역노동의 苦重함, 사역의 비효율성 등 役事 운영상의 문제점들이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원거리를 이동해서 부역노동에 응해야 하는 요역 농민의 부담이 지나치게 무겁고 비효율적이라는 것이 흔히 지적되곤 했다. 이렇게 강제 징발된 부역군의 작업 능률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부역군의 피역·도망·代立 등의 형태로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지배층 관료들의 입장에서도 구태여 저항과 비효율이 따르는 낡은 역역 체계에 의존할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었다. 더구나 유민으로 전락하여 도회지로 유입하는 몰락 농민들을 고용한다면 진휼에도 보탬이 되는 또 다른 이점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17세기 초엽의 토목공사에서 요역 징발을 대신하여 고용잡역부인 모군을 고용하는 새로운 노동력 수급체계를 점차 도입 정착시키게 되었다. 곧 모립제의 성립이었다.

 17세기 초엽의 산릉역에서는 모군을 고용하게 됨에 따라 막대한 양의 雇價 곧 품삯을 지불하는 데 드는 대규모 재정 지출이 요구되었다. 각도의 烟軍을 징발하는 대신 烟軍 價布를 거두게 함으로써 모군을 雇立하는 재원으로 삼거나 ‘扶助’라는 명목 아래 각도의 監營·兵營·水營에 면포를 나누어 청구하기도 하고 혹은 司僕寺·常平廳·兵曹·工曹 등 중앙 각사에 비축되어 있는 면포를 호조로 이송하여 산릉역을 중심으로 한 국상의 모든 비용에 쓰게 하였다. 산릉역의 소요 경비 가운데 품삯 등 인건비 지출이 매우 컸기 때문에 공역을 주관하는 山陵都監에서는 전례를 뒤져 가면서 石物의 尺數를 줄이는 방안을 강구하기도 하고 산릉의 석물을 줄이거나 묘제를 간략하게 해서 역군을 아끼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경비를 아껴서 민폐를 더는 일에 유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초·중엽의 결포제는 모립제 성립의 전제가 되었다. 인부를 모집해서 고용하는 데 드는 막대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한 조치였다. 대규모 역사를 위해 전국에서 결포를 거둔 사례는 선조 39년(1606) 종묘·궁궐 重建을 위한 경비 확보책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17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각종 궁궐의 영건역 뿐만 아니라 산릉역·조사역 등 국가적인 大役의 수행을 위해서 결포를 징수하는 일이 많았다.

 모군은 17세기 초엽 이후 각종 토목공사의 役夫로서 고용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役糧을 싸들고 와서 부역하던 징발 역군과는 달리 토목공사에 응모하여 일정 액수의 품삯을 받는 이 시기의 ‘賃傭爲業之類’였다. 모군은 모든 분야에 걸쳐서 차츰 부역노동을 대신하게 되었다. 특히 旱災나 전염병의 피해를 입어서 연군을 징발하기 어려울 때나 농번기의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모군을 고용할 필요성이 커졌다. 일단 모군이 고용되었던 분야에서는 그것이 중요한 선례를 이루었다. 산릉역과 조사지역에서만은 요역을 징발할 수 있다고 했던≪續大典≫의 규정조차 ‘已行之例’로 자리잡게 된 새로운 관행에 의해 압도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크고 작은 각종의 역사에서는 점차 모립제의 고용 노동이 적용되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대동법 시행 이후에도 민간의 요역 종목 가운데 하나로 규정된 바 있었던 산릉역의 경우 노동력 조달 체계는 몇 단계의 변화과정을 거쳐서 결국 모립제가 전면 도입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먼저 17세기 초엽에는 결포제가 시행되면서 연군의 직접 징발이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다가 결국 17세기 중엽부터 그나마 그치게 되었다. 이때부터 烟軍의 분정은 곧 價布의 수취를 위한 것이지 더 이상 노동력 징발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 무렵 승군의 부역 징발은 지속적으로 늘어나서 요역 농민이 징발되지 않는 데서 초래된 노동력 부족 현상을 메우는 데 동원되었다. 그러나 17세기 말엽에는 군인의 산릉 부역이 종식되었는가 하면 18세기 중엽부터는 승군의 산릉역 징발조차도 사라지게 되었다. 각종 형태의 징발 부역군이 국가적 대역사에 참여하던 폭은 이처럼 단계적으로 축소되고 있었다. 결국 18세기 중엽부터는 고용일꾼인 모군이 산릉역을 전담하게 되었다. 부역노동의 쇠퇴, 모립제의 발전 과정이었다.

 이 같은 부역제도 쇠퇴의 추세는 다른 종류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사지역이나 築城役·築堤役 등 각종의 역사에서 노동력 직접 징발의 부역노동이 적용되지 않는 대신에 고용노동을 적용하는 사례가 늘게 되었다. 도성 주변의 역사에서는 京募軍이 고용되었지만 지방 군현에서의 역사에서는 鄕募軍이 고용될 수 있었다.

 당시의 토목공사에서 賃傭爲業하는 품팔이 및 飢民들을 모아서 雇價를 지불하고 모군으로서 사역하는 것이 점차 일반화되어 갔다. 특히 기근이 들었을 때 이들 기민을 모군으로 고용하는 문제는 대규모의 축성역에서 자주 거론되었다. 기민들 가운데서도 도성에 몰려든 각 지방의 유민들을 모립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이들 중에서 壯丁者를 가려 뽑아 ‘給料督役’하면 기꺼이 응할 것이기 때문에 힘든 공사라도 무난히 마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0711)≪承政院日記≫ 410책, 숙종 29년 3월 15일.

 기민을 모집하여 ‘給料督役’하는 문제는 17세기 이후 실학자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유형원이≪磻溪隨錄≫에서 기민을 모집하고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것이 ‘기근을 구제하는 방도’라 하여 救荒 工事의 필요성을 지적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특히 구황 공사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수리시설 축조의 공역을 제안하였다. 李瀷도≪星湖僿說≫에서 “토목공사를 일으켜 품삯을 후히 줌으로써 진휼에 도움이 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 같은 실학자들의 구황 공사에 대한 구상은 이 무렵 관부에서 주관하는 각종 역사에서 노동력을 조달하는 제도가 변화해 가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토목공사 등의 역사에 기민을 고용한다는 구상은 17세기 말엽 이후의 축성역을 비롯한 각종 토목공사에서 채택되고 있었다. 나아가 그 이후의 각종 역사에서 모립제를 확신시키는 계기를 조성하였다.

 당시의 지배층 관료들이 토목공사에 모군을 고용하면서 진휼책을 표방하였던 것은 이 시기의 사회 변동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즉 17·18세기 이래 농촌사회의 변동에 따라 토지 소유를 둘러 싼 계층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의 부농층은 상업적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 갈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농민층 분화는 더욱 촉진되고 있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의해 화폐경제가 농촌에 침투하게 되었고 그것이 다시 농민의 토지로부터의 이탈을 가속화시켜 갔다. 이 시기의 농민층 분화는 신분제의 해체를 수반하면서 광범하게 전개됨으로써 많은 빈농층·무전농민층을 배출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당시 도성 주변에서 혹은 농촌이나 광산촌 등에서 고용노동이 전개될 수 있는 한 여건이 이렇게 마련되었다.0712)金容燮,≪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一潮閣, 1971), 180∼197쪽. 이들 가운데 일부는 농촌의 농업노동자로 전신하기도 했고 때로는 광산의 店軍으로 진출한다든지 또는 도시의 상공업 분야에 유입될 수도 있었다.

 도성의 경우 임진·병자의 양란을 겪은 뒤 인구가 크게 감소되었지만 현종대에 들어서면 다시 크게 증대된 것으로 보인다.0713)≪增補文獻備考≫ 권 161, 戶口考 1.
權泰煥·愼鏞廈,<朝鮮王朝時代 人口推定에 關한 一試論>(≪東亞文化≫ 12, 1977), 298∼303쪽.
당시 서울 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이농민의 대열이 급속히 증대된 것을 반영하였다. 이들은 서울의 도시 빈민층을 형성하면서 도성 변두리의 沿江 지역 예컨대 용산·서강·마포·뚝섬·왕십리 등지에서 빈민 집단 거주지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18세기에 들어서는 이 같은 城外 지역 거주민이 크게 늘고 있었다. 농촌에서 들어온 유이민들이 서울의 성외 각지에 정착하게 된 결과였다. 이 같은 도시 하층민의 급속한 증가 추세는 많은 수의 ‘賃傭爲業之類’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0714)조성윤,≪조선후기 서울 주민의 신분 구조와 그 변화≫(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2), 31∼55쪽.
高東煥,≪18·19세기 서울 京江地域의 商業發達≫(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 9∼59쪽.
모립제가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여건을 이루었다.

 이 시기의 농촌 유이민들은 정부의 각종 流民 還集政策에도 불구하고 농촌을 떠나서도 그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賃傭爲業’하는 길이었다. 정부는 이들을 도시주변이나 광산촌의 ‘游手無賴之輩’로 간주하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각종 역사에 이들을 고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종전의 부역노동이 이 시점에 와서는 그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노동력을 상품화하고 있었던 이들 전업적인 임노동자층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형편을 말해준다. 부역노동으로서의 요역제가 해체되고 고용노동의 모립제가 성립·발전하게 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尹用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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