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5. 진전의 개간과 양전사업
  • 1) 개간사업
  • (1) 정부의 개간정책

(1) 정부의 개간정책

 중세 사회에서 토지는 자연적 상황이나 부세 문제 등으로 인해 평상시에도 陳田이 많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실태는 달라졌다. 임진왜란은 전국을 전장터로 만들었기 때문에 농토는 매우 황폐하게 되었으며 전답의 경계를 분간하기 어려운 곳도 많았다.

 전쟁 전까지 150∼170만 결에 이르던 전국의 경지 면적이 전쟁 직후의 조사에 따르면 30만여 결로 1/5수준으로 줄어들 정도였다.0715)≪宣祖實錄≫권 128, 선조 33년 8월 병신.
≪宣祖修正實錄≫권 140, 선조 34년 8월 병인.
특히 곡창지대인 전라도는 평시 경작면적인 44만 결 가운데 6만 결만 경작되었으므로 국가재정에 타격은 매우 컸다.0716)≪宣祖實錄≫권 140, 선조 34년 8월 무인.

 어느 정도 복구가 되었으리라 생각되는 광해군대에도 다음 사료를 보면 실상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던 듯하다.

지금 전란으로 온통 망가진 나머지 백성들이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전야가 개간되지 않아 교외에 나가보면 곳곳마다 끝없이 쑥대와 가시나무로 뒤덮여 있어 토지에서 생산되는 곡식과 麻絲가 평소에 비해 백분의 일도 안되니…(≪光海君日記≫권 4, 광해군 즉위년 5월 정해).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전쟁 때문에 전답 자체가 황폐해진 점과 농민들이 전쟁에 시달려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기 때문에 활용되는 농지가 지극히 낮았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 3년(1611)의 전국적인 상황을 간략히 정리한 자료를 통해 살펴보면, 평시에 비해서 전라도는 44만여 결에서 11만여 결로, 경상도는 43만여 결에서 7만여 결로, 충청도는 26만여 결에서 11만여 결로, 황해도는 11만여 결에서 6만 1천여 결로, 강원도는 2만 8천여 결에서 1만 1천여 결로, 경기도는 15만여 결에서 3만 9천여 결로, 함경도는 12만여 결에서 4만 7천여 결로, 평안도는 17만여 결에서 9만 4천여 결로 줄어들었다고 한다.0717)≪增補文獻備考≫中, 田賦考 8, 戶曹判書 黃愼의 上疏. 경상도 43만여 결은 33만 결의 착오라고 한다(吳仁澤,≪17·18세기 量田事業 硏究≫, 釜山大 博士學位論文, 1996, 17쪽). 전국을 합하면 170만 8천여 결에서 54만 2천여 결로 줄어들어서 “8도를 모두 합한 것이 평상시 전라도의 토지 결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유할 정도였다.

 경지 면적이 줄어들자 농업 경제에 기반을 둔 조선 사회는 크게 동요하였다. 농민들은 생산을 못하게 되면서 삶의 위기에 처하였다. 진전에 대해서는 법제적으로 면세를 하게 되어 있어서 정부에서는 수세지가 줄어들게 되면서 국가 재정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더구나 농지가 황폐해지면서 농민들이 흩어져서 군역이나 부역 등에 있어서도 큰 타격을 받았다. 황폐된 농지를 다시 개간하는 것은 농민들의 삶 뿐만 아니라 정부의 재정운영에 시급한 일이었다.

 본래 개간은 경작되지 않은 原野라든가 山林, 海澤地 등을 개척하여 경작지로 만들어 나갔다. 조선 초기에는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미간지가 많았으므로 개간의 대상이었으며, 15세기말 16세기에 들어서는 해택지에 대한 개간이 늘어났다.0718)李泰鎭,<16세기 沿海地域의 堰田開發>(≪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3).

 그러나 17세기에 들면 전쟁을 거치면서 본래 경작지가 많이 황폐되었으므로 이러한 陳田에 대한 개간이 더욱 중요하였다. 물론 당시 진전의 발생은 전쟁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진전에 대한 정부의 정의를 보면 양전시 오랫동안 황폐되었던 토지, 전쟁 뒤 인민이 사망하여 자연히 황폐된 토지, 재해를 심하게 입어서 정부로부터 진전 명목을 받은 토지 등이다.0719)≪備邊司謄錄≫6책, 인조 19년 7월 4일. 당시 진전은 두 번째가 중심이겠으나 첫 번째, 세 번째 경우도 적지 않았고 여기에 대해서도 이 기회에 다시 개간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같이 진전이 많았기 때문에 임란 백여 년이 지난 뒤 양전에서도 元摠이 임란 이전보다 늘어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처럼 임란 후 진전의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진전개간에 대하여 여러 가지 혜택을 내리면서 장려하였다. 먼저 이들에게 종자·농기구·농우 등을 대어 주었다. 농민이 죽거나 흩어졌고 더구나 경작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도 갖추지 못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郡縣이나 富民들에게서 마련하였다. 가령 해당 군현에서 직접 마련하기 어려울 때는 정부에서 종자가 여유있는 가까운 군읍에서 그것을 분급하게 하고, 또한 부유한 자들에게 종자를 대출하게 하면서 그 대가로 포상을 하거나 관직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沿海 邑의 경우 소금을 재원으로 하여 종자와 바꾸기도 하였다.0720)≪宣祖實錄≫권 48, 선조 27년 3월 신사. 농우의 경우에도 지방관이 주재하여 소를 가진 자가 소가 없는 집의 농지를 갈아주도록 조치하거나 또는 관청의 소를 빌려주어서 해결하기도 하였다.0721)≪宣祖實錄≫권 93, 선조 30년 10월 신미. 이들에게 필요한 농기구를 마련하기 위해서 관청에서 솥이나 무기 등을 거두어 만들어주기도 하였다.0722)≪度支志≫外篇 勸農.

 이처럼 개간에 필요한 물자를 지방관이 책임을 맡아서 마련하였다. 그리고 개간지의 실적이 곧 당시 지방관의 치적을 평가하게 되었다. 선조 32년(1599)에는 時起田結數 외에 5분의 1 이상을 개간한 경우에는 陞職시키고 3분의 1 이상인 경우에는 별도로 重賞을 내렸으며 반대로 줄어들면 벌을 내리도록 하였다.0723)≪宣祖實錄≫권 110, 선조 32년 3월 경인.

 다음으로는 면세의 조치를 마련하였다. 오랫동안 묵은 토지는 수확이 적기 때문에 개간에 대한 의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간동안 면세가 필요하였다.

 그런데 정부에서도 개간을 늘릴 목적으로 개간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다. 世祖 연간에 평안·황해·강원·함경의 지역에 대한 개간에서는 삼남지방의 부민들을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조건은 復戶와 면세가 10년 이상일 정도로 혜택을 많이 부여하였다.0724)朴時亨,≪朝鮮土地制度史≫(과학원출판사, 1964;1994년 재발간, 신서원), 111쪽. 앞으로 부세를 거둘 수 있는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진전에 대해서 정부에서는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면세가 어려웠다. 그것은 기존의 수세지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經國大典≫에는 災傷과 같이 자연 재해에 의한 경우에는 減稅가 되면서도 진전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하였다. 탈이 나서 경작을 못하는 경우에도 친척이나 이웃이 경작하여 묵히지 못하게끔 하고 있다.0725)≪經國大典≫戶典 務農. 물론 “모두 진황된 토지에 대해서는 면세한다”고 되어 있다.0726)≪經國大典≫戶典 收稅. 그러나 실제로는 전세 자체가 가볍다는 인식아래 貢法의 취지에 따라 묵은 땅이라도 수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힘이 닿지 않아 다 경작하지 못한 筆地에서 起耕處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告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0727)≪역주 경국대전 주석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249쪽. 이처럼 진전을 막기 위해 국가에서는 통제를 심하게 하였다.

 따라서 진황된 것에 대해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속전이나 새로이 기경한 가경전에 한해서였다. 이런 토지는 隨起收稅하였다. 그러나 이런 토지도 다음 式年에 正田으로 등재되면 마찬가지로 규제가 가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농민이 농업에 게으르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구실로 면세가 허용되지 않아서 진전수세의 폐단이 심했다.0728)李載龒,<16세기의 量田과 陳田收稅>(≪孫寶基博士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2).

 진전을 규제하였으나 전쟁 이후 진전이 크게 늘어나자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였다. 면세를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난 선조대에는 토지가 황폐해졌기 때문에 어느 토지를 막론하고 기경에 따라 수세하는 수기수세의 방식이 행해졌다.0729)≪宣祖實錄≫권 139, 선조 34년 7월 을축 및 권 140, 선조 34년 8월 무인. 토지가 황폐해지고 경작민이 유리 도산된 상황에서 正田, 續田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이는 토지로 돌아오거나 빈 토지를 차지하여 생활하려는 농민들과 이를 통해서라도 수세를 확보하려는 국가의 입장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농민들을 위하는 정책이 되지 못하였다. 토호들은 토지를 제대로 등록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농민들의 기경지에만 稅를 부과되어 상호간에 불균형이 심해지기 쉬웠다.0730)≪宣祖實錄≫권 139, 선조 34년 7월 을축.

 근본적으로는 많은 진전을 새로이 개간할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하였다. 또한 正田과 續田의 구분은 사라지고 起耕田과 陳田의 구분이 더욱 중요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수십 년이 지난 뒤인 인조대의 양전에서도 총 농지면적 985,002결 가운데 진전은 443,139결로서 진전이 45%에 달하였다.0731)≪仁祖實錄≫권 31, 인조 13년 7월 임신. 이제 진전은 16세기까지 누진되었던 문제까지 포함하여 총체적으로 드러났고 나아가 진전에 대한 개간이 시급하게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이때 진전을 개간하기 위해 일정한 기간동안 면세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0732)≪仁祖實錄≫권 31, 인조 13년 4월 을해. 그 결과 1641년 진황지에 대해 해택지와 마찬가지로 3년 면세하기로 결정되었다.0733)李景植,<17世紀의 農地開墾과 地主制의 展開>(≪韓國史硏究≫ 9, 1973), 93쪽. 면세의 혜택이 상당히 늘어났다.

 효종초인 1653년에는 진전의 면세조치가 폐지되고 진전은 속전으로 취급되어 곧 징세되었다.0734)≪增補文獻備考≫中, 田賦考1, 632쪽. 이처럼 국초의 隨起收稅의 방침과 限年免稅 사이에 정책이 계속 번복되었다. 가령 대표적인 예가 숙종초 2년 면세의 방침이 결정되었다가 곧 다시 그해 한 해에 개간한 진전만 2년간 면세하고 다시 수기수세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농민들이 이러한 혜택을 틈타 기경전을 폐하고 진전을 2년 경작하다가 징세가 될 해에 이를 다시 폐하고 또 다른 진전을 개간한다는 것이다.0735)≪備邊司謄錄≫35책, 숙종 5년 9월 14일. 이런 점에서 수기수세는 진전에 대한 대책이라기보다 부세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정부가 시기결에 의존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가 18세기초인 영조대에는≪續大典≫에 의하면 세를 반으로 줄이는 규정으로 법제화되었다.0736)≪續大典≫ 戶典 收稅. 아무튼 17세기 중엽까지는 국가가 진전에 대해 상당한 조치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개간을 장려하려는 정부의 노력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유리했던 농민들이 다시 토지로 돌아오면서 17세기 중엽에는 전쟁 이전의 상태와 비슷할 정도의 농토가 확보되어 있었고,0737)≪仁祖實錄≫ 권 47, 인조 24년 8월 기축. 예전에 지어먹지 못하던 땅도 개간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는 상태였다.0738)≪孝宗實錄≫권 13, 효종 5년 11월 임인. 이처럼 17세기의 개간정책은 전쟁으로 황폐하게 된 토지를 경작지로 되돌려서 농촌 경제를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려는 과제였다.

 그러나 閑廣地 등 신전개간도 함께 이루어졌고, 이렇게 개간된 토지는 陳起를 거듭하였으므로 그 뒤 진전은 여전히 농업상의 중요한 문제였다.≪大典通編≫에 오면 3년간 면세하도록 한 것0739)≪大典通編≫戶典 收稅.도 그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도 진전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므로 부세상의 혼란이 있고 이 때문에 농민들이 기피하기도 하였다.

 가령 정약용은 “진전이 많은데도 농민들은 부세가 두렵다고 하여 法典에 비록 자세히 되어 있어도 어리석은 백성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0740)丁若鏞,≪牧民心書≫戶典 田政, 202쪽. 나아가서 그는 3년도 짧으며 5년 면세를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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