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5. 진전의 개간과 양전사업
  • 1) 개간사업
  • (2) 개간의 주체

(2) 개간의 주체

 이 시기 개간의 주체는 누구일까. 거듭된 전란이 끝나고 인구가 대량으로 줄어들고 流離하면서 또한 황무지가 많이 발생하는 것을 기화로 이 토지들을 점령하려는 권세가와 지방 토호들에 의해 큰 규모로 개간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일반 농민보다 관료나 토호 등 봉건지배층이나 부민들이 많은 토지를 집중적으로 소유하면서 합법적인 대토지소유자로 등장하였다.

 조선 초기 강제 이주 때에도 삼남의 부농층들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대관료들에게도 많은 기대를 걸었다.0741)朴時亨, 앞의 책, 111∼112쪽. 그것은 개간사업에 주된 노력, 곧 노비와 농량·종자·농구의 축적을 가진 양반관료들의 능력을 계산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양반관료들이 개간에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먼저 개간에 필요한 경제력 때문이었다. 개간에는 오랜 기간동안 노동력과 물력이 필요하였는데 이 점에서는 관료나 토호들이 일반 농민들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에 놓여있었다. 더구나 당시 양반층이 노비 노동력의 확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개간사업에 양반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0742)김성우,<사회경제사의 측면에서 본 조선중기>(≪大丘史學≫46, 1993). 그리고 그 규모가 매우 컸다. 일반 農家가 개간하는 토지가 畓 2석락, 田 2일경 정도인데 비해 봉건지배층은 50∼100석락 정도라고 할만큼 대규모였다.0743)李景植, 앞의 글, 96쪽. 일반 농가에 비하면 수십 배에 달하였다.

 다음은 당시 관료들은 職田制가 폐지되어 스스로가 자신들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처지에 따라 전쟁 후 많은 無主地를 대상으로 개간에 나섰다.

 또한 관료층의 사회 의식의 변화에 따라 직접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일을 꺼리지 않았다. 전쟁 중이나 그 뒤에도 관료들은 생계 유지를 위하여 자신들이 직접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7세기 大農이었던 公州 李氏家에서는 소유하고 있는 농지의 대부분을 직접 경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0744)金容燮,<朝鮮後期 兩班層의 農業生産>(≪增補版 朝鮮後期農業史硏究≫ Ⅱ, 一潮閣, 1989). 당시 사대부였던 吳希文 일가가 생계 해결을 위하여 屯畓을 얻어 경작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농지를 빌어서 경작하기도 하였는데, 진전에 대해서도 개간을 하였다.0745)李景植, 앞의 글, 97쪽.

 당시 사회경제적 사정 속에서 봉건지배층의 개간에 참여가 늘어났다.

 그러나 한편 이 시기에는 일반 농민들의 개간도 적지 않았다. 당시 광범하게 발생한 無土之民은 개간의 한 주체가 되었다. 진황지에 대해서는 기경을 원하는 자는 누구나 立案을 통해 개간할 수 있었으므로 일반 농민들도 상당수 참여하였을 것이다.0746)≪新補修敎輯錄≫戶典 量田.

 특히 山田의 개간에 있어서는 지역적인 여건으로 보아 대규모 개간이 어렵고 경제성도 낮았기 때문에 부유층이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무전농민, 빈농층이 중심이 되었다.0747)吳仁澤,<朝鮮後期 新田開墾의 성격>(≪釜大史學≫18, 1994).

 농민들은 해안의 간척지에도 참여하였다. 예를 들면 황해도 은율군의 洪大雲은 無土之民으로 살아나가기가 힘들어서 築垌하여 농사를 짓겠다고 입안을 내었고 洪重碩도 “본래 궁하여 처음부터 송곳 꽂을 만한 땅도 없었기 때문에 축동 작답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축동 규모는 소규모여서 앞의 홍대운의 경우에는 답 1석락지(15부 정도), 田 1일경 정도였다. 장연군에서도 2∼24부 사이의 작은 筒畓이 많이 보였는데 특히 10부 미만이 대부분이었다.0748)송찬섭,<17·18세기 新田開墾의 확대와 經營形態>(≪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261∼262쪽.

 이러한 소규모 개간이 개간의 확대를 이끌기도 하였다. 강화부에도 국가에서 船頭浦堰을 쌓기 전에 농민들이 개별적으로 작은 언을 쌓아서 개간하였음을 알 수 있다.0749)≪備邊司謄錄≫58책, 숙종 33년 11월 19일. 한편 농민들의 개간은 단독이 아닌 촌락공동체가 단위가 되어 공동으로 물력을 모아서 개간하는 경우도 가능하였다.

 이 시기는 이렇게 점차 경작 조건이 열악한 곳으로까지 개간이 확대되어 가는 양상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열악한 토지 조건, 나아가 축동 작답하는 경우까지 생각한다면 진전에 대한 개간은 농민들이 훨씬 쉽게 뛰어들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소규모의 언답은 화전과 마찬가지로 국가 수취체제에서 벗어나서 다만 읍에서 사사로이 수세하는 은결이 되기 쉬웠다. 따라서 양안상 무주지이거나 등재되지 않은 채 농민사이에서 개간지가 世傳되었기 때문에 침탈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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