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5. 진전의 개간과 양전사업
  • 1) 개간사업
  • (3) 개간과 절수·입안제도

(3) 개간과 절수·입안제도

 이 시기 개간에는 折受와 立案의 제도가 있었다. 절수는 정부가 주인이 없는 땅을 직접 조사하여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절수자가 스스로 조사하여 관에 신고하여 국가로부터 토지를 떼어 받아서 자기 소유로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스스로 관에 보고하는 것을 陳告라고 하였다. 조선 전기에 진전을 진고한 자에게 토지를 절급하였다.≪經國大典≫에도 “3년이 지난 진전은 누구든지 관에 告하고 경작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규정이 있다.0750)≪經國大典≫戶典 田宅.

 따라서 토지를 절수한다는 것은 자기 소유로 한다는 것이므로 소유권자가 있는 토지는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곧 주인이 없는 묵은 토지나 경작이 되지 않은 땅이 중심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量案이나 收租案에 실려 국가에 세를 내는 토지가 아니었다. 이 점에서 수조권을 나눠주는 조선 전기 科田이나 職田의 折給制度와는 달랐다. 오히려 다음 자료에서 보듯이 절수는 황폐한 농지를 개간한다는 농업 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신이 大典(≪경국대전≫을 가리킴-필자)을 보니 절수 두 글자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인구가 많지 않고 토지도 개간되지 않아 각처를 절수하여 논밭을 일구고 세를 거두어도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지 않았습니다(≪英祖實錄≫권 28, 영조 6년 12월 무오).

 이처럼 절수는 원칙적으로는 누구든지 법에 따른 절차를 이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도 절수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이를 잘 활용하여 토지를 획득하고 집적하는 층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재력이 우세하고 권력이 있는 세력 가문이나 토호들이었다. 무주진황지는 절수한 다음 개간하여야 농지로 이용할 수 있다. 따라서 물력이나 노동력을 가지고 있고 동원하기에 쉬운 자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게다가 倭亂과 胡亂을 치른 뒤 개간을 할 수 있는 무주지가 많이 발생하였다. 절수는 면적에도 제한이 없었으므로0751)≪顯宗改修實錄≫권 2, 현종 원년 4월 정해. 대토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고, 개간하여 경작지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였으므로 이러한 방식이 임란을 거치고 개간이 필요한 시기에 많이 이용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절수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제도가 입안이었다. 본래 입안은 토지나 가사를 매매하고 난 뒤 관으로부터 이를 보장받는 제도였다.≪경국대전≫에 의하면 매매한 뒤 1백일 내에 입안을 받도록 되어있다.0752)≪經國大典≫戶典 賣買限.

 그런데 입안은 주로 새로운 토지를 개간했을 때 소유권을 보장받기 위해 하였다.

무릇 토지를 절수하는 무리들은 그 이웃 인민들에게 땅이 묵었고 주인이 없다는 다짐을 받은 뒤에 입안을 만들었다(≪明宗實錄≫권 33, 명종 21년 7월 임오).

 위와 같이 절수 대상이 되는 토지는 주인이 없는 땅이어야 하며 반드시 이웃의 인민들에게 그 땅이 주인이 없다는 것을 확인 받고 관청에 입안을 받아야 하였다. 일례를 들면 정조 14년(1790) 成左尹宅 奴 忠吉이 牙山郡 二西面에서 “해안이 넓고 본래 주인이 없어서 앞으로 축언할 수 있다”는 근거로 입안을 올렸고 여기에 대하여 관에서는 “경계의 멀고 가까움은 비록 알 수 없으나 소를 올려서 바란대로 입안을 내린다”고 허락하였다.0753)≪忠淸道庄土文績≫20책, 奎 19300. 주인이 없는 땅인가 하는 점은 이웃이나 色掌에게 물은 다음 허락하였다. 따라서 입안은 주인이 없는 땅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취득하는 공인된 증명 절차였다.

 그러나 개간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원칙상 효력이 말소되었다. 곧≪受敎輯錄≫에 따르면 해택·산야의 진황지에 입안을 내더라도 3년 내에 개간을 하지 않아서 3년이 지난 다음 다른 사람이 기경을 하면 입안자라고 하더라도 쟁송하지 못한다고 하였다.0754)≪受敎輯錄≫刑典 聽理. 따라서 숙종 8년(1682) 진주지역 堰畓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호조에서는 법전에 ‘진황처는 기경자가 주인’이라는 규정은 있으나 ‘입안자가 모두 가진다’는 규정이 없다고 하여 입안한 자보다 축언한 궁방쪽에 권리를 인정하였다.0755)≪承政院日記≫390책, 숙종 26년 3월 9일.

 그래서 입안이 지속적인 효력을 갖도록 하려고 연속적으로 입안을 내기도 하였다. 安岳郡 安谷坊 立石에서 축동한 땅에 농민들이 70년간 몇 차례에 걸쳐 입안한 것이 그 사례이다.0756)≪忠勳府謄錄≫권 4, 인조 23년 정월 22일.

 개간이 활발해짐에 따라 입안처를 구하기 힘들어졌고 이에 따라서 입안을 일종의 권리로서 매매하는 경우까지 나타났다.≪新補受敎輯錄≫에는 입안한 곳에 대하여 사사로이 매매하는 것은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였다.0757)≪新補受敎輯錄≫戶典 諸田. 그런데도 차츰 민간의 관례가 되었다. 때로는 입안자에 대한 대가로 토지의 일부를 할애하기도 하였다.

 입안을 통하여 토지에 대한 권리를 얻게 되면서 토지 겸병 못지 않게 입안지를 늘이려는 폐단도 나타났다. 곧 현종 2년(1661)의 기록에 의하면 무단배가 자기 전답이 많으면서도 주인이 없는 묵은 땅을 입안하여 차지하고서는 빈민이 기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입안지가 많은 경우 백여 석락이나 되었다고 하였다.0758)≪承政院日記≫168책, 현종 2년 6월 5일.

 이처럼 입안은 개간의 전제 조건이었지만 토지 점탈의 방법으로 이용하였다. 가령 권세가가 다른 사람의 개간지까지 입안 내에 포함시킨 다음 농민을 위협하여 토지를 빼앗거나 지대를 거두었다.0759)≪承政院日記≫508책, 영조 원년 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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