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5. 진전의 개간과 양전사업
  • 1) 개간사업
  • (4) 개간지의 소유 문제

(4) 개간지의 소유 문제

 진전 개간이 정부의 개간 정책과 병행하여 활발히 전개되면서 많은 사회 문제가 일어났다. 그 가운데서도 개간지에 대한 소유 문제가 그 핵심이었다.

 먼저 有主陳田의 개간을 알아보자.

 본래≪經國大典≫에는 3년 이상 묵힌 토지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경작할 수 있도록 하였다.0760)≪經國大典≫戶典 田宅. 그러나 이는 소유권은 아니었던 것 같다.0761)이 항목 바로 뒤에 보면 주인 없는 전지는 다른 사람에게 옮겨준다고 하면서 그 내용으로 군역을 진 자가 사망하거나 이사하게 되면 바꾸어 입역하는 자에게 주는데 5년 안에 이사한 자가 돌아오더라도 그 동안 경작하던 자가 본래 토지가 없다면 3분의 2만 돌려주고 나머지 3분의 1은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5년 이상 묵은 경우에는 소유권까지 차지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役制와 결합되어 있으므로 일반 진전과는 차이가 있다. 이처럼 직접 진전에 대해서는 매우 애매하게 기술되어 있었으므로 그 뒤≪受敎輯錄≫에는 “3년이 지난 진전은 다른 사람이 고한 다음에 경작하도록 허락하지만 영구히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本主가 돌려 받을 때까지 耕食하는 것을 허락한다”0762)≪受敎輯錄≫戶典 諸田.고 하였다. 경작의 권한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大典通編≫에 따르면 진전개간은 관에 고하고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는데 전주가 와서 쟁송하면 소출의 3분의 1로써 전주에게 주고 3분의 2는 개간자에게 지급하며 갈아먹은 지 10년이 지나면 균분하도록 하였다.0763)≪大典通編≫戶典 收稅. 이는 9년까지는 3분의 1 지대에서 10년이 되면 일반 토지와 마찬가지로 취급하여 반분한다는 것이다. 곧 유주진전에 대해서는 소유주와 개간자 사이에 소유권 분쟁은 원칙적으로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주인이 없는 진전의 경우는 소유문제가 복잡하고 심각하였다. 주인이 없는 진전은 언젠가 한번은 경작되었으나 양안에 주인이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진전이었다. 이러한 땅이 개간되어 가는 과정에서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단순한 법제적인 소유권 분쟁이 아니었다. 내면적으로는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었다. 형태상으로는 같은 개간지에 있어서 입안만을 가진 자와 실제 개간 경작자 사이의 쟁송이었지만, 여기에는 관료나 궁가, 그리고 관청 등 봉건지배층이 개재되어 있었고 이에 맞선 농민층의 항거가 맞물려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법적으로는 입안을 받았으면 그 소유권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전쟁을 거친 뒤 입안을 내고 개간하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농민들은 황폐한 땅을 개간하여 자기 소유지로서 생각하였으며, 이에 반해 입안을 지닌 봉건지배층은 입안을 근거로 하여 농민들이 자력으로 개간한 토지를 빼앗았다.

 그러나 입안의 효력이 있다고 하여 이것을 지녔느냐는 것만 가지고 소유권 분쟁을 처리해 버릴 수는 없었다. 실제 경작자인 농민들이 완강히 항거하였다. 농민들은 입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들이 힘을 들여 개간한 땅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또한 관에 세까지 납부할 경우에는 그들의 소유지를 인정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법률적인 소유권과 현실적인 소유권 사이에서 문제가 복잡하였는데 한창 개간이 활발하였던 인조대에는 개간자를 소유주로 인정하였다. 곧 갑술양전때≪量田事目≫으로서 “주인이 없는 진전은 기경자를 주인으로 한다”고 규정하였다.0764)≪仁祖實錄≫권 46, 인조 23년 10월 정미. 이는 농민들의 개간 의욕을 자극하고 입안의 비현실적인 횡포를 방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침이 그대로 실행된 것은 아니었다. 인조대에 주인이 없는 진전을 농민들이 개간하고 세를 납부하여 왔는데 궁방에서 이를 침탈한 일이 있었다. 이때 왕은 주인이 없는 땅은 법대로 입안을 지녀야만 자기 소유지로 할 수 있고, 한때 경작하였다는 이유만으로는 그 소유권이 인정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0765)≪仁祖實錄≫권 46, 인조 23년 10월 무신. 지배층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라고 하겠다.

 농민들은 지배층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주인이 없는 땅은 개간자를 주인으로 한다는 당초의 방침을 근거로 하여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법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집단으로 항거하는 방식까지도 사용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역시 피해는 농민층에게 돌아가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無主陳田에 대해서 경작자를 소유주로 한다는 규정은 원칙적으로는 강조되고 있었다. 곧 일반 소송에서도 한쪽은 이전에 받은 입안을 가지고 있고 한쪽은 스스로 개간하였으면 입안을 물리치고 개간한 자에게 주는 것이 법례라고 하였다.0766)≪顯宗實錄≫권 11, 현종 7년 정월 정미. 이러한 것은≪신보수교집록≫에 따르면 미리 입안을 내어서 다른 사람이 起墾한 뒤에 입안을 구실로 빼앗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보아0767)≪新補受敎輯錄≫戶典 諸田. 법적으로도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서 기경에 따른 법적 보장을 위해서는≪신보수교집록≫에는 주인이 없는 땅일 경우 경작하고자 하는 자가 입안을 받아서 자기 소유지로 만들도록 하였다.0768)≪新補受敎輯錄≫戶典 量田.

 이제 무주진전은 개간자가 입안을 받음으로써만 자기 소유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치는 그간의 일반적인 법례를 부정하는 행위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17세기 이래 입안 우선의 봉건적 지배층들의 이해관계가 긍정되는 처사였다. 이 규정은 18세기 영조대에 와서≪속대전≫에 완전히 명문화되었다.0769)≪續大典≫戶典 量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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