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5. 진전의 개간과 양전사업
  • 2) 양전사업
  • (2) 양전사업의 성과와 문제점

(2) 양전사업의 성과와 문제점

 조선 후기 몇 차례 시행되었던 양전의 성과와 문제점을 살펴보자.

 양전은 단순히 토지측량이 아니라 6等田品과 陳起 여부를 결정하여 등록하는 과정이었다. 6등전품에 따라서 부세액은 크게 차이가 있었고 특히 진전으로 파악되면 면세가 되었으므로 그 차이는 더욱 컸다. 이런 만큼 양전의 폐단이 커서 양전을 하지 않는 편이 시행하는 것보다 폐단이 적다는 주장도 많이 나왔다.

 그러나 이런 인식의 기반에는 지주층의 반대도 적지 않았다. 토지를 둘러싼 폐단의 주체가 바로 지주층이었던 것이다. 곧 중앙에서는 은루결의 파악을 목적으로 양전이 거론되고 있었는데 은루결을 가진 층은 대체로 지주였기 때문이다. 지주는 경지의 규모에 비해 結負數가 적어 세가 가벼웠고 貧農은 경지에 비해 결부수가 많아서 세가 무겁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정확한 양전은 田政 釐正의 중요한 기초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양전은 정부와 지주층의 역관계에 의해 성격이 규정되었다. 임란 후 처음으로 시행된 癸卯量田은 지주층을 중심으로 한 지방사회의 반발과 군현 수령의 소극적 입장 속에서 시행되었다. 아직까지 중앙정부의 군현제적 지배질서가 취약한 가운데 임시변통적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0781)吳仁澤, 앞의 글(1996), 51쪽.

 그로 인하여 계묘양전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먼저 전품이 하락되었다. 임란 이전의 전품은 대체로 1∼3 등급으로 등록되었던 것에 비해 계묘양전에서는 대부분 4∼6등급으로 전품을 결정하는 경향이 강했다. 다음으로는 전반적으로 結負가 헐하였다. 계묘양전 이전 시기에는 田案이 없어서 斗落制를 통해 결부를 결정하였는데 그 결부는 상당히 헐한 것이었다. 전쟁 직후라는 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수령은 척량을 통해 결부를 늘였지만 지방사회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再量田을 관철시켜 결부를 낮추었다.

 그리고 이전의 續田이 유명무실하였다. 속전은≪경국대전≫규정에 따르면 수기수세의 대상으로서 별도의 續案을 통하여 관리되며, 진황될 경우 답험을 통하여 면세되는 불완전한 토지였다. 그러나 임란 이후부터 이 규정은 사실상 무의미하였다. 계묘양전은 기경지만 파악되었을 뿐 속전을 등록한 속안을 작성할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속전제도는 유명무실해진 셈이었다. 이는 그 뒤 갑술양전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양전의 문제점은 불평등한 점에 있다. 전라우도 양전어사 趙存誠에 따르면 田形과 等第가 대부분 실상과 같지 않으며, 결수의 다과가 불균하고 진전과 기경이 뒤섞여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0782)≪宣祖實錄≫권 171, 선조 37년 2월 신묘.

 이는 전세부담의 불공평을 의미한다. 부호들이 대부분 좋은 토지를 가지면서 낮은 등급을 받게되기 쉬운 것이다. 게다가 이제 전세가 下下年으로 고정되어서 대신 흉년이 들어도 감세·면세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평민들이 낮은 등급을 받더라도 혹심한 피해를 입어 납세능력이 없어서 고통을 받기 쉬웠다.

 이처럼 계묘양전이 부실했기 때문에 그 뒤에도 전제의 문란은 심하였다. 전결의 은루현상은 심각하였고 대토지소유자와 小民간의 稅役부담의 불균형이 심화되었으며 국가의 세입은 크게 감축되고 있었다.0783)朴鍾守,<16·17세기 田稅의 定額化 과정>(≪韓國史論≫30, 서울大, 1993), 96∼97쪽.

 다음은 갑술양전에 대해 살펴보자.

 인조대에 시행된 갑술양전은 이러한 토지제도의 문란을 정비하여 재정의 원천을 확보하고 농민의 부역을 균등히 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정부로서도 이번 양전만은 정확하고도 철저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양전할 때 특히 주목되었던 地目은 司僕寺 목장 내의 개간지, 海曲堰田, 堤堰冒耕處, 宮房, 衙門의 면세결이었다.0784)吳仁澤, 앞의 글, 57쪽. 사복시 목장은 주로 해안과 섬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목장과 해곡언전에 주목한 것은 당시 개간이 해안과 섬에까지 확대되었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제언에 대한 冒耕은 조선 전기부터 계속 금지하였지만 이 무렵 상당수가 개간되었기 때문에 포함시켰다. 諸宮家, 各 衙門의 면세결에 대한 조사는 이들 면세결이 임란 이후 급격히 늘어나면서 은루결이 늘어났기 때문에 그 대책으로 나왔다. 이들 地目은 갑술양전 이전에 잘 파악되지 않거나 불분명하게 취급되던 것이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갑술양전은 임란 이전의 결수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이를 위한 여러 가지 고려가 있었고, 그러한 가운데 전반적으로 전품이 상승되었다.

 갑술양전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속전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갑술양전의 기본적인 지목은 기경전·진전·속전의 3종으로 구별되었다. 조선 전기의 정전과 속전에 대비할 때, 기결전·진전은 정전에 해당하고 속전은 그대로 사용하였다. 갑술양전에 있어서는 계묘양안을 기준하여 새로 파악된 경지는 속전으로 양안에 등록되기는 했지만 그 뒤 정전과 동일하게 취급되어 경작되지 않더라도 면세되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변화는 임란을 전후하여 常耕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화전이 상경전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진전이 양안에 등록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전기 양전에서 진전은 독자적 지목으로서 의미를 갖지 못하여 정전과 동일하게 등록되었다. 그러나 임란 이후 속전을 정전과 동일하게 파악하면서 기경전과 진전의 구별이 강화되고 양안에서도 구별되었다. 곧 山田·堰田·河岸 등의 다양한 개간지가 늘어나면서 수해·한해를 입기도 하고 토양의 한계라는 자연적 환경, 또는 부세가 늘어나거나 경작 인구가 부족하여 장기간 진황되는 경지가 늘어났다. 이들 진전이 갑술양전을 통하여 양안에서 구별되기 시작한 것이다. 양전할 때 구별된 진전, 소위 量附陳田은 舊陳이라고 하며, 조선 후기 흔히 언급되는 流來雜頉로서 면세되었다. 갑술양전 때에는 구진과 함께 특별히 今陳도 등록되어 면세되었다. 그 결과 막대한 진전 결수가 결총에 나타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와 같이 속전이 사실상 소멸되고 진전이 양안에서 구별되기 시작한 것은 농법의 발전과 개간의 확대라는 추세에 의한 것이다.

 아무튼 갑술양전은 여러 측면에 걸쳐 엄밀한 양전을 위한 조처의 흔적을 남겼으며, 그 결과 파악된 원결은 895,489결로서 임란 이전 1,130,000결의 거의 80% 수준이었다. 이렇게 늘어난 것은 실제 가경지의 3/4에 달하던 은루결과 전체 加得結 543,414결의 65%인 354,629결에 달하는 막대한 진전이 사출된 결과였다.0785)吳仁澤, 앞의 글(1995), 355쪽.

 그러나 양전의 폐단도 적지 않았다. 양안에 실적 산출의 근거인 변의 길이가 제대로 기재되어 있지 않거나 경상우도 모든 읍의 양안에는 실적 산출의 근거인 변의 길이가 전혀 기재되지 않았으며, 3·4 등의 執等이 解負될 때 1·2등으로 된 곳이 상당수 존재하였다. 경상좌도에서 각면 단위로 字號와 地番을 배정하지 않고 員을 단위로 삼았던 사례가 있다. 전라좌도의 부안의 변산 일대에서도 실제 경지가 없이 결부만 기록된 虛錄의 폐단도 있었으며 장광척수와 負束이 상호 부합하지 않는 解負의 착오가 있었다.0786)위와 같음.

 이러한 문제는 전반적으로 양전에 대한 운영이 미숙하였기 때문이었다. 양전 운영이 미숙하면서 지주층과 연관된 여러 가지 양전 부정이 자행될 수 있었으며 그만큼 소농층의 부역이나 부세 부담은 가중될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그만큼 양전에 따른 피해가 심하였고 민원도 상당하였다.

 이렇게 하여 가장 토지가 많은 경기와 삼남의 경우에도 17세기 전반까지는 어느 정도 양전이 되었으나 그 뒤 숙종 말년까지 부분적인 시행 외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같이 부분적으로 양전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지방마다 양안이 달랐다. 가령 다음 자료를 보자.

여러 도에서는 갑술양안을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癸卯·己酉 양안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가장 최근에 작성한 것이 49년이나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토지의 형태가 누차 변하고 여러 가지로 수세지에서 빠지는 수가 많아 보통 때 수세하는 결수를 원장부와 비교하면 거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근래 20년에 한번 양전을 시행하는 법이 준수되지 않아 원장부와 실결로 세를 내는 결수의 차이가 이와 같은 데 이르렀다(≪備邊司謄錄≫70책, 숙종 43년 6월 3일).

 곧 갑술양안은 인조 12년(1634) 삼남 개량을 거쳐 작성된 것이었으며, 계묘양안은 현종 4년(1663) 경기도 개량 뒤에, 그리고 기유양안은 현종 10년 충청도 20읍 개량한 뒤에 작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양안은 실제적인 토지의 경작 상황을 반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양안상의 원장부에 의한 전세 수취도 어려웠다.

 게다가 이렇게 서로 다른 시기에 작성된 양안은, 그 양안 작성이 시기마다 각기 다른 규칙과 목적에 따라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전정 운영, 곧 공평한 부세수취가 더욱 어려웠다. 가령 효종 4년(1653)에 遵守尺이 만들어지면서 이전 척으로 양전한 지역과 그 뒤에 양전한 충청도 20읍 등 기유양안은 기준이 달랐던 것이다.

 준수척은 1등척이었으므로 길이가 짧았기 때문에 자연히 결수가 많아져서 수세량이 증가하여 농민들이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자료에서 살펴보자.

우의정이 말하기를 작년에 전라감사 洪錫輔가 舊尺은 짧고 新尺은 긴데, 민인배들은 국가가 短尺을 쓰려는 것은 結卜을 더 늘리려는 뜻이라고 말하는 데 까지 이르러 장차 소요의 근심이 있을까 누차 글을 올려 논의했지만 끝내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대저 기유년에 양안을 만들 때 충청도에는 준수척을 사용하였는데 지금 양남에 유독 長尺을 쓰는 것은 진실로 공평하지 못합니다(≪備邊司謄錄≫69책, 숙종 42년 2월 28일).

 이처럼 충청도의 양전한 읍과 하지 않은 읍 사이의 불균, 그리고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와의 불균 등이 있어서 문제가 되었다.

 다음은 경자양전에 대해 살펴보자.

 갑술양전 이후 대규모의 양전사업이 행해진 것은 숙종 말년이었다. 준수척이 반포되고 충청도 20읍에 적용되면서 이것을 다시 삼남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반발이 심하였다. 짧은 척을 사용하여 결수가 늘어나고 이는 곧 부세의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양안에 준한 전세수취는 수세의 기준이 되는 양안이 각도마다 다른 시기에 다른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서 수세의 근거로서 기능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재결과 면세전 때문에 출세실결수가 차츰 줄어들어서 부역불균의 현상이 심각하였다.0787)≪備邊司謄錄≫69책, 숙종 42년 2월 28일.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면서 각종 부세가 토지에 부과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전세화의 방향은 양전이 실행되어 전결이 확보되지 않으면 백지징세와 같은 수탈적 수세정책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출세실결이 줄어들고 부세가 고르지 않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다시 양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제 많은 토지가 개간되고 양안상의 무주라도 실제로는 기경되는 토지가 많았으므로 이러한 토지를 조사하여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면서 수세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0788)이경식, 앞의 글, 112쪽.

 경자양전은 量田廳을 두고 균전사를 파견하였으며 庫 단위에 따라 철저하게 量田을 원칙으로 하였다. 따라서 均田使-官長-庫監官-監任의 책임아래 철저한 양전을 시행하도록 하였다.0789)≪量田謄錄≫경자(숙종 46년). 그리고 갑술양전 때 토지면적을 잘못 잰 것이나 원전과 속전에 대하여 일제 타량하였다.

 한편 이 시기 전결에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면세결이 확대되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면세결에 대하여 세를 내도록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궁방전 등의 면세전은 계속 확대되어 갔다. 결국 여기에 대해 정부에서는 첫째 일제히 타량하여 그 결수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면세를 허락받은 이외의 부분에 대한 출세조치를 실현시키는 방법과 둘째 이것이 불가능할 때는 기존의 출세지로 파악된 민전에 수세제의 변동을 통하여 전결의 감축분을 채우고자 하였다. 곧 면세전에 대하여 확실한 파악과 규제, 그리고 그 폐단을 극복하는 것이 양전의 한 목적이었다.

여러 궁가의 전답으로 급가매득하여 면세된 것과 주인이 없는 곳에 대해 사패로써 면세된 것, 민결을 절수 받아 면세된 것은 수조안에 기록된 수에 준하여 면세로 기록한다. 가출된 잉결은 해궁의 노비명으로 주인을 기록하고 면세 두 자를 제거해 응세하는 민전으로 한다(≪量田謄錄≫경자 2월 25일).

 이처럼 경자양전의 주요목적은 각 궁방전과 아문둔전, 그리고 馬位田 등 일체의 면세지를 타량하여 정해진 결수 외는 일일이 구별하여 민전의 예에 따라 조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전에 대한 반대도 심하였다. 수령이나 감사·균전사가 양전을 지연하는가 하면 심지어 量田無用論까지 나왔다. 여기에는 양전할 때 富民豪族의 뇌물과 청탁을 막기 어렵다는 점과 또 하나는 이 시기의 부민호족의 태도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점 때문이었다.0790)吳仁澤,<肅宗代 量田의 推移와 庚子量案의 性格>(≪釜山史學≫23, 1992), 58쪽. 이는 당시 국가의 부세수취가 토지로 집중되면서 토지의 부세 부담이 증가되었고 이에 지배층의 양전에 대해 적극성을 띨 수 없었다. 이러한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국가재정상 양전은 불가피하였고 숙종은 양전을 지연하는 감사·균전사를 파직까지 하면서 삼남에 일시에 양전을 강행하였다.

 경자양전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먼저 구양안의 字號를 중심으로 양전하고 신양안에 이전 자호를 함께 기록하였다. 이는 은루결의 폐단을 방지하고 구양안을 기준으로 작성된 각종 토지문기에 혼란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곧 토지소유권 분쟁이 증가하고 있었던 사회적 추세를 배려한 것이었다. 전품의 등제에도 구양안을 기준으로 하였다. 전품을 높일 경우 모면이 뒤따르고 낮출 경우 서로 낮추기 위해 소란을 피우는 폐단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전품의 昇降은 황무처가 대전으로 된 거나 거꾸로 대전이 황무처로 변한 곳, 수해로 모래가 덮인 경지, 척박한 답이 관개되어 비옥해진 답 등 극히 제한된 곳에 한정하여 허용되었고, 승강의 대상이 되는 필지에 첨지를 붙여 구별하고 별도의 성책을 작성한 다음 균전사의 적간을 거쳐 승강하도록 엄격한 통제를 가하였다. 이는 지주층의 농간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개별 필지를 중심한 토지의 파악은 강화되었다. 분작과 합작, 화전과 진전, 가경전의 파악에서 잘 드러나듯이 은루결의 색출을 위한 것이었다.

 경자양전은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영조 6년의 자료를 보면 “경자양전이 종료된 결과 인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국가재정이 몹시 나아졌으므로 끝내 인민의 원망이 없었다”고 하였다.0791)≪備邊司謄錄≫88책, 영조 6년 11월 16일. 양전과정에서 소란이 일어난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인민보다는 양반토호가 조작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경자양전은 국가권력이 지주층의 반발을 억누르고 강력하게 시행한 양전이었다.

 따라서 양전으로 인하여 재정 수입이 증가하고 진황지가 백징되는 문제가 해소되는 등 긍정적인 결과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주층의 반발은 심각한 수준이었고 폐단도 적지 않았다. 지주층을 지지 기반으로 삼았던 국가로서는 지주층의 강력한 반발을 무릅쓰고 양전을 시행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다음 자료에서 보듯이 경자양전에 비판적인 입장도 없지 않았다.

전결의 元數는 이전보다 늘어나지 않았고 개량한 뒤 세입은 더한 것은 없고 줄어들어서 다만 민간만 요란스럽게 하고 이익이 되는 점은 없었다(≪備邊司謄錄≫79책, 영조 2년 7월 7일).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조선 정부의 전세수취방식에 따르면 전결의 총수가 줄어들면 안되었으므로 실제 토품에 따라 등수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舊案에 따라 1, 2등을 감해주는 선에서 결정되었다.0792)≪量田謄錄≫경자 8월 7일. 또한 진전의 개간을 유도하고 묵은땅이 등수가 높은 것을 이정하려고 원속전을 한꺼번에 타량하기로 하여 척박한 땅으로 원전에 실린 것은 속전으로 기록하고, 진전은 사방 시기전의 전품에 따라 1, 2등을 줄여 준다는 원칙이 결정되었다.0793)≪備邊司謄錄≫72책, 숙종 45년 9월 14일. 그러나 양전 과정에서 이 규정이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없는 사람에게서 덜어서 있는 사람에게 더해주거나 진전이 기경되는 곳을 기록되었고 토품도 올라가는 것만 있고 내려지는 것이 없다는 호소가 잇따랐다.0794)≪備邊司謄錄≫73책, 경종 즉위년 11월 21일. 이것은 양전의 공정한 시행보다는 양전 후에도 총결수에 큰 감축이 없이 일정한 양을 수세해야 하는 조선 후기 전세제도의 구조적 모순 때문이었다.

 더구나 경자양전으로 시기결이 늘어났지만 그 뒤 삼남의 시기결은 계속 줄어들었다. 1720년 경자양안의 삼남의 시기결에 비해 1744년 삼남의 시기결은 약 62,000여 결이 줄어들었다.0795)오일주,<조선후기 국가재정과 환곡의 부세적 기능의 강화>(延世大 碩士學位論文, 1984), 7쪽.

 조선조 양전법의 기본적인 단위인 결부제는 토지의 등급을 어떻게 매기느냐에 따라 토지의 양이 달라지므로 매우 결함이 많았다. 또한 5결을 단위로 한 자호로써 표시하므로 등급이 달라지면 그 일대의 字號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양전제 자체의 결함이 크므로 정약용은 결부제하에서는 양전을 찬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전과 은결을 조사하고 부득이하다면 마지못해 개량하되 아주 심한 것만 바로잡는 쪽을 택하였다.0796)丁若鏞,≪牧民心書≫戶典 田政.

<宋讚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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