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7. 지주제의 발달과 궁방전·둔전의 확대
  • 2) 내수사전과 궁방전의 확대
  • (1) 형성과정

(1) 형성과정

 17세기를 기점으로 하여 內需司田과 宮房田이 매우 늘어났다. 내수사는 궁중에서 쓰는 쌀, 베, 잡물과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관청이며 내수사전은 그러한 궁중 수요를 충당하는 데 쓰는 토지였다. 궁방전은 왕실의 일부인 궁실과 왕실에서 분가 독립한 궁가에 지급하던 토지를 말한다.

 본래 조선에서는 왕실에 대하여 科田 또는 職田을 분급하여 경비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세종대의 소위 王子科田法에서 王子·大君은 250결, 일반 君은 200결, 尙公主駙馬는 220결, 나머지 여러 君은 과전에 준하여 토지가 지급되었고0869)≪世宗實錄≫ 권 91, 세종 22년 10월 갑신. 세종말 職田制에서도 대군 225결, 군 120결씩 직전이 지급되었다.0870)≪經國大典≫ 戶典 諸田 職田. 양반관료들과 마찬가지로 收租地를 切給받았다. 그러나 직전제와 田租의 官收官給이 시행된 다음 본인에 한하여 보장하는 선에 그쳤고, 성종초부터 분급이 거의 끊어지면서 차츰 어려워졌다. 종실의 수는 늘어나고 직전 전조를 지속적으로 분급하거나 새로이 절급하는 것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따라서 정부는 軍資米의 일부를 떼어 절급하는 미봉책으로 넘겼다.0871)李景植,<職田制의 施行과 그 推移>(≪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 일조각, 1986).

 이처럼 제도상의 보장이 사라져가는 사이 왕실에서는 소유지를 만들고 늘여나가는 방법이 이용되었다. 그것은 국가에서 황무지를 절수해주고 궁방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16세기 내수사와 궁방에서 섬과 牧馬場을 절수하거나 바닷가 해택지를 개발하는 것은 그러한 양상이었다.0872)李泰鎭,<16세기 沿海地域의 堰田 開發>(≪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3).

 그런데 궁방전은 17세기부터 급속도로 늘어났다. 곧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농민들이 흩어지고 토지가 일시적으로 경작되지 않게 되자 이 기회를 통하여 토지를 늘여 나가고자 하였다. 한편 국가에서는 황폐한 농지의 개간을 장려하기 위하여 정해진 기간동안 면세 혜택을 주고 소유권을 인정하였는데 이에 궁방에서는 황무지를 대대적으로 절수받아 개간하였다.

 궁방에서 토지를 모으는 방법에는 구입하는 형태와 營·衙門屯田을 이속하거나 沒入屬公地의 賜與 折受, 民田 절수, 민전 投託, 양안상 無主陳荒地, 양안외 가경지의 사여 절수 등이 있었다. 그런데 17세기에는 양안상 주인이 없는 진황지 또는 양안상의 가경지에 대한 사여와 절수가 주된 방법이었다.

 절수제가 시작된 것은 대체로 임란을 지난 다음 궁방의 경비 부족을 충당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궁방의 절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 시기부터 시작으로 잡는 것은 이 당시 궁방에서 재정을 확보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음을 말한다.

 토지 절수는 주인이 없는 땅이나 빈땅으로서 양안이나 수조안에 등재되어 국가에 세를 내는 토지가 아닌 곳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陳田·蘆田·海澤地·泥生地·山林·廢堤堰 들이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토지에 대하여 궁방이 절수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궁방에서 無主地를 조사하여 토지가 있는 지방의 관으로부터 立案을 발급받는 방법이었다. 또 하나는 궁방에서 절수 대상지를 內需司에 신고하여 이조·호조를 통하여 折給받는 방법이었다. 앞의 방법은 일반 민인이 무주지를 신고하여 입안받는 경우와 같다면 후자는 중앙 정부 차원에서 절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이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숙종 연간의 기록을 보자.

여러 궁가가 절수한 곳은 군읍에서 입안한 것과는 구분이 되니 거론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만일 본관에 서류를 올려서 입안을 받는 것은 일반 민인과 같이 시행하라(≪備邊司謄錄≫권 49, 숙종 21년 정월 23일).

 이처럼 궁방의 절수는 특별히 취급하였던 것이다. 17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 양안상 무주지 명목으로 개간지를 절수하는 양상은 더욱 빈번해지고 또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한때 절수 혁파의 논의가 있기도 하였으나 궁방에서 전토가 없으면 모양을 갖출 수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절수는 대부분 면세의 혜택을 받고 있다. 절수는 본래 주인이 없는 토지를 자기 소유지로 획득함을 뜻할 뿐이므로 그 자체가 면세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었다.0873)李景植,<17세기 土地折收制와 職田復舊論>(≪東方學誌≫ 54∼56합집, 1987), 457쪽. 그런데도 궁방의 절수지는 으레 면세되었다.

 궁방에서 토지를 늘이는 또 하나의 방법은 국왕의 賜牌文書에 따른 賜與가 있는데 그 대상이 되는 토지라든가 이를 손에 넣는 방법이 절수와 다르지 않으므로 넓은 의미의 절수에 포함된다.

 그런데 절수는 무주지만이 아니었다. 민간에서 起耕한 토지까지도 포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민전에 대한 침탈이나 민전의 투탁을 통해서였다. 당시 궁방전에는 면세, 면역의 특권이 있었다. 궁방전에서 모집한 사람들이나 둔민들에게는 호에 배당되는 갖가지 잡역이나 군역까지도 불법적으로 면제되었다.

 현종 13년(1672)에는 앞으로 舊宮에 대해 절수를 금지한다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하였으나 계속되는 궁방의 신설과 수요확대에 따라 절수는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궁방전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기반을 통하여 왕실의 유지와 권위를 확대하려는 국왕의 지원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0874)朴準成,<17, 18세기 宮房田의 擴大와 所有形態의 變化>(≪韓國史論≫11, 서울大, 1984), 198쪽.

 또한 궁방에서는 이러한 혜택을 끈으로 하여 민전을 끌어들였으며 민인들도 이러한 특권을 이용하려고 자기의 땅을 궁방에 투탁하였다. 그러나 무주지의 명목으로 민전에 대한 침탈도 적지 않았다. 곧 민인들의 개간지까지도 무주지라는 명목으로 빼앗았는데 이에 대하여 왕실에서는 궁방의 이익을 우선하려고 하였다. 이처럼 궁방에서 민전을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한 사회 폐단이 되었다.

 특히 내수사 노비에게 각종 요역을 면제(復戶)한 것이 궁방전을 늘여나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0875)박시형,≪조선토지제도사≫ 중 (사회과학원출판사, 1964;1994년 재발간, 신서원), 250쪽. 본래 복호에 대해서는 내수사 奴子의 경우 동거 장정이 5명 이하거나 또는 토지를 5결 이하 가졌을 때 進上輸納을 포함한 17개의 戶役을 제외한 나머지 일체 잡역을 면제한다는 것이었다. 이 규정은 내수사 노자에게 일종의 특전을 제공한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는 이 특전을 초과하여 남용하였다. 내수사 노자들은 이른바 17개의 호역에 대해서 비법적으로 면제받을 뿐 아니라 또 자기가 경작하는 전결에 대하여 면세를 하고 있었으며 자기의 전결이 5결에 차지 못할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토지까지 합쳐서 5결에 해당한 면세의 특전을 누리는 것이 임란 이후 일반적인 형태로 되어 있었다. 이 현상은 내수사 노자들과 일반 평민들 간의 국가 부담의 차이를 현격하게 하며 결국 일반 평민들이 내수사 노자로 투탁하게끔 자극하였다.

 궁방들은 평지에서만 庄土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산림을 대량으로 절수하여 火田을 경작하였다. 1662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던 李敏迪은 본래 법으로 엄격하게 금했던 화전이 지금은 궁가들의 축재의 자본으로 되었으며, 이들은 국가 요역을 도피한 유민들을 끌어 모아 화전을 경영한다고 지적하였다.0876)≪顯宗實錄≫ 권 5, 현종 3년 11월 갑진. 이 때문에 산림을 파괴하고 한발과 홍수의 피해를 늘이는 결과를 빚기도 하였다.

 이처럼 궁방전이 늘어나는 것은 곧 면세지가 늘어나고 국가수세지가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면세결에 대한 대책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첫째 궁방전에 대한 세를 매기는 방안, 둘째 면세를 금지하고 재정 지원을 하는 방안, 셋째 면세결을 제한하는 방안 등이었다.

 첫째 방안은 법전에 궁방전에 대한 면세 규정이 없으므로 궁방전에서도 稅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국왕은 유래가 오래되었다거나, 선왕의 일이라고 하면서 면세에 대한 혁파를 반대하였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宮屯에 대한 면세는 기정사실로 되어갔다.0877)李景植, 앞의 글(1987), 457∼462쪽.

 둘째의 방안은 면세를 폐지하고 대신 직전을 절급하자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현종초에 제기된 직전 복구안에 따르면 궁가의 경비를 직전 범위 안에서 확보하고 절수는 폐지하고 현재 있는 궁둔은 민전으로 한다는 것이었다.0878)李景植, 위의 글, 496∼500쪽. 그러나 이는 왕실로 봐서는 대단히 손해를 보게 된다. 궁둔이 민전이 될 뿐 아니라 직전은 지급결수가 한정이 있고 수취액수도 겨우 결당 4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토지 분급제가 조선 전기에 이미 소멸되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직전을 복구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국왕이 반대하여 관철되지 못하였다.

 셋째의 방안은 직전제에서의 직전결수를 근거로 궁방전 면세결을 제한하자는 주장이었다. 법전에 따라 토지를 절급하고 나머지는 수세하자는 내용이었다. 현종 3년(1662)에 일단 궁방전 면세결을 600결로 제한하자는 안을 제시하였으나 大典定例로 시행하자는 강한 반대에 부딪혀 대군·공주는 500결, 왕자·옹주는 350결로 조정을 보았다가 다음해 다시 대군·공주 400결, 왕자·옹주 250결로 조정되었다.0879)≪顯宗實錄≫ 권 6, 현종 3년 9월 을해 및 현종 4년 4월 경술.

 절수와 면세제는 직전제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직전제는 現職者만으로 축소되고 조세를 관에서 거두어서 이들에게 지급하여 수조지의 세습과 직접적인 田租 수취를 박탈한다는 데 초점이 있는데 비하여 절수, 면세제는 법적 소유권은 궁방에 있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곧 절수-면세제는 수조권이 폐기되고 소유권에 따른 지주전호제로 바뀌면서 최고권력을 매개로 하여 소유를 실현하고자 하는 왕실·궁방에 과도기적 토지지배의 한 형태였다.0880)朴準成, 앞의 글, 207쪽.

 그러나 그 뒤 다시 절수를 혁파하자는 주장이 나타났다. 그 대안으로 給價買得制와 民結免稅制가 실시되었다. 급가 매득제는 숙종 14년에 시행 규정이 나타났다. 대군·공주에게는 은 5천 냥, 왕자·옹주에게는 은 4천 냥을 지급하여 토지를 사도록 하였다.0881)≪備邊司謄錄≫42책, 숙종 14년 12월 5일. 그리고 그 뒤 숙종 21년(1695)에 다시 급가 매득 규정이 확인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0882)朴準成, 앞의 글, 211쪽.

1. 숙종 12년 淑儀房에 전답 200결을 획급하였고, 숙종 20년 崔貴人房과 金貴人房에 역시 각각 200결을 획급하였으나, 지금 여러 궁가의 절수 결수는 明禮·於義·壽進·龍洞 4궁은 논외로 하여도 여러 궁의 절수가 혹은 7천여 결, 혹은 5천여 결에 달하여 정식을 넘는 것이 많으므로 200결 정한 액수 밖에는 모두 혁파하되 200결은 실결로 좋은 곳에서 스스로 택하도록 한다. 2. 新宮에서 200결을 택할 때 잔읍으로서 땅이 좁고 민이 적은 곳은 절수가 합당한 곳이라고 획급하지 말고 큰 읍에서 스스로 택하도록 한다. 3. 於義宮은 1688년 이전의 절수처가 매우 적으므로 戊辰(1688년) 이후에 절수한 4천 결 가운데 1천 결을 획급하고 나머지는 혁파한다. 이 1천 결에는 1688년 이전에 절수한 400결은 포함되지 않는다. 4. 수진·명례·어의·용동 4궁과 明善·明惠 두 房은 戊辰년 이전의 절수처는 그대로 두고 이후 절수는 모두 혁파한다. 5. 賜與는 절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6. 新生王子宮과 禧嬪房·崔貴人房·김귀인방에 銀 4천냥을 지급하고 庄土를 갖출 때까지 5년 동안 매년 선혜청에서 미 200석, 軍資監에서 콩 100석을 수송하도록 한다.

 이를 ‘乙亥定式’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여기서 급가매득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民結免稅制였다. 곧 위에서 절수 200결을 한정하고 있는데, 이는 호조에 세를 바치고 있던 토지로서 그것이 궁방에 절수되어 세를 궁방에 납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을해정식이 실시된 것은 큰 의의를 가진다. 먼저 급가매득제는 궁방이 비록 호조로부터 매득가를 지급 받아 토지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지만 토지를 획득하는 과정이 절수와 같은 경제외적 방법에서 경제적 방법으로 전환하였다. 이로써 궁방이 매득에 의해 토지를 확보하는 경향이 늘어났고, 한편으로 토지 상품화를 자극하는 요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궁방전 내에서 소유권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매득한 토지는 완전히 궁방의 소유가 되었고 민결면세지는 민전의 소유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0883)朴準成, 위의 글, 219쪽.

 이처럼 급가매득제와 민결면세제가 실시된 것은 농민들이 사적 소유권을 성장시켜 나가면서 저항한 결과라고 보인다. 곧 급가매득제는 경제외적으로 토지를 획득하는 방법에서 경제적인 방법으로 옮아간 것이며 민결면세제는 소유권이 농민에게 있는 민전에서 국가 수세분을 궁방이 대신 수취하도록 한 것이다. 이로써 궁방전은 매득지, 절수지, 민결면세지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을해정식이 제대로 시행된 것 같지는 않았다. 급가매득제와 민결면세제가 실시되었다고 하여 절수의 폐단이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가령 “사여는 절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자 궁방들은 다투어서 절수를 사여로 고치는 방법으로써 종래의 토지를 그냥 확보하였다. 뿐만 아니라 절수가 폐지된 대신에 代受라는 명목으로써 다른 토지를 바꾸어주기도 하였다.0884)박시형, 앞의 책, 254∼255쪽.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뒤로도 절수가 여전히 계속되었다. 숙종 26년(1700)에 따르면 “을해년 이후로도 절수는 그전과 같고 궁가에서 점유하는 전토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고 하였다.0885)≪肅宗實錄≫ 권 34, 숙종 26년 12월 신미. 이러한 절수지는 여전히 대부분 면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연간에 들어서 다시 면세전의 결수를 정했는데, 수진궁·어의궁·창의궁 등은 1천 결, 명례궁·용동궁 1,500결, 그 밖의 궁방은 800결 등으로 을해정식보다는 훨씬 많았다. 정해진 액수 외에 전토는 모두 전세를 내어 경비에 보충하게 하였다. 또한 각 궁방으로 하여금 두 개의 文簿를 작성하여 하나는 내수사에 보내고 하나는 호조에 보내어 몰래 증가시키는 폐단을 방지하게 하였다.0886)≪英祖實錄≫ 권 21, 영조 5년 정월 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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