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7. 지주제의 발달과 궁방전·둔전의 확대
  • 2) 내수사전과 궁방전의 확대
  • (3) 궁방전의 소유구조와 경영형태

(3) 궁방전의 소유구조와 경영형태

 이처럼 17세기말 궁방전의 급가매득제와 민결면세제를 실시한 뒤 궁방전은 크게 折受地, 買得地, 民結免稅地의 세 유형으로 구분되고 있다. 절수지와 매득지는 함께 永作宮屯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절수지는 혁파되지 않는 한 궁둔이며 궁방의 소유지임은 사실이지만 그 소유구조나 궁방전의 성립 방법에서 매득지와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절수와 매득지는 달리 구분하였다. 그리고 절수지와 민결면세지도 역시 다르게 파악하였다. 절수지 가운데서도 혁파되면 민간에게 돌아갈 것이 있어 일부 절수지와 민결면세지는 혼동될 소지가 있으면서도 구분하였다. 이와 같이 궁방전의 절수지·매득지·민결면세지는 각각 다르게 파악되고 있었는데 이는 궁방전의 성립방법, 소유권의 귀속 여부, 소유구조 등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궁방에서 시가로 구입한 매득지는 궁방소유지로서 궁방(지주)-직접경작자(전호)라는 구조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곳에서 거두어들이는 지대도 일반 민전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언답과 같이 개간지의 경우 농민들을 정착시키려고 종자를 지급하는 등 조건을 부여하였다. 가령 황해도 安岳 安谷坊에 있는 龍洞宮 언답에 대하여 “이 궁의 언답은 본래 作畓하여 수세한 곳이 아니므로 종자를 지급하여 타작하는 곳이다”고 하였다.0895)≪承政院日記≫ 545책, 경종 2년 9월 10일. 아무튼 궁방전 가운데 소유권의 귀속이 분명한 곳은 타작제나 도조제로 운영되었던 장토였다.

 다음으로 절수지의 경우는 소유구조와 지대량, 지대형태가 달랐다. 절수지가 매득지와 함께 영작궁둔으로도 파악되고는 있었지만 지대와 내부구조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곧 권력을 매개로 한 궁방의 명목적 소유권과 개간자의 사실상 소유권이 겹쳐 있었다. 이러한 토지에서는 궁방은 끊임없이 사적소유지로 만들려고 하였고, 개간농민들은 민전으로 만들어 나가려고 궁방에 저항하였다. 따라서 궁방에서는 일반 민전과 같은 수준의 지대를 관철시킬 수 없었으며 전면적인 소유권을 확보할 수 없었다. 상호간에 타협하는 선에서 궁방의 수취액이 결정되었다. 그 대표적인 유형이 1결당 租 200두와 100두를 수취하는 것이었다. 가령 창원에 있는 용동궁둔의 예에 따라 만들어진 永作宮屯에 대한 법적 수취 규정인 결당 조 200두를 부과하는 것은 절수지를 대상으로 삼은 궁방과 개간 농민 사이의 타협액이었다.0896)≪續大典≫ 戶典 諸田.

 조 200두 가운데 100두는 지대이고 100두는 면세분에 해당되었다. 면세분 조 100두는 조선 후기에 1결당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정규세와 정규부가세, 규정 밖의 부가세를 모두 포함한 액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1결당 조 100두를 수취하는 절수지는 궁방전이기는 하지만 토지에 부과되는 모든 세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수세지라고 볼 수 있으며 민결 면세지와 다를 바 없었다. 결당 조 100∼200두를 거두는 궁방전에서 궁방은 권력의 매개 없이는 토지 지배를 할 수 없거나 결당 조 100두 정도밖에 토지 소유를 실현하지 못하였다.

 조 200두는 생산량의 약 1/2∼1/3 정도 수준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농민들은 자기들이 개간한 땅에 대하여 이러한 수준의 지대를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정도의 지대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본래 주인이 없는 빈 땅에 대한 개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경우 절수받은 궁방과 개간자 사이에는 투자한 물력과 노동력에 따라 권리가 나누어졌다. 곧 “結은 宮結이지만 땅은 농민의 사적인 토지이다”0897)≪前整理所指令諸案≫ 慶尙道 昌原郡 居民 訴狀(奎 21937).와 같이 세금을 받는 결의 주인과 토지에 대한 주인이 다르다는 인식이었다. 따라서 절수에 따라 조 200두를 거두는 궁방전에서는 궁방이 지닌 권리와 농민들이 지닌 권리가 중첩적으로 되어있는 소유구조가 이루어져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토지를 분할하거나 導掌權을 주거나 免稅, 免役의 특권과 함께 경작권을 주기도 하였다. 물론 경작권을 바탕으로 개간자들은 궁방전 내에서 어느 정도 소유권을 성장시켜 中畓主가 되기도 하였으나 경작자가 바로 중답주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궁방전 절수지에서 궁방에서 수취하는 지대량이 결당 조 100∼200두 정도밖에 이르지 못하였던 원인은 궁방이 지닌 명목적 소유권과 농민들의 실질적 소유권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중층적 구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한 구조는 주로 이미 개간하여 “起耕한 자가 주인이 된다”는 조항에 근거하여 사실상의 소유주가 있던 땅을 무주지라는 명목으로 절수하였거나, 절수한 무주지를 농민들의 비용과 노동력을 투입하여 주도적으로 개간한 궁방전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권리를 바탕으로 궁방전 내에서 소유권을 성장시켜 나가고 있던 민인들의 끊임없는 싸움의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궁방전은 宮房(地主)-직접 경작자(起主·作人), 또는 궁방(지주)-기주(지주)-직접경작자(작인)라는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결당 조 100두 또는 200두라는 궁방전 지대는 직접 생산자의 잉여생산물의 일부였으며, 그 가운데는 국가에 대한 면세조 조 100두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권력의 매개 없이는 이러한 궁방전에서 궁방은 토지 소유를 전혀 실현시킬 수 없거나 조 100두 정도밖에 실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절수지의 토지 소유구조나 궁방 수취액이 한결같지는 않았으며 사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다음은 민결면세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민결면세지는 소유권은 농민에게 있으면서 그들이 국가에 납부할 세액을 대신 궁방에 바치는 토지였다. 궁방의 수취액은 국가로부터 양도받은 면세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결면세지는 궁방(수조자)-민전(지주∼전호)관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액은 호조에서 정해진 액수를 거두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궁방에 속하는 사정에 따라서 수취액수가 달랐다.

 가령 숙종 20년(1694) 어의궁에서 전라도 茂長·靈光·長城 등 여러 고을에서 인조대 甲戌量田 때 주인이 없는 것으로 등록된 토지를 절수하였다.0898)≪肅宗實錄≫ 권 27, 숙종 20년 7월 갑신. 그러나 이 토지는 절수 당시 이미 민인들이 개간, 경작하여 소유주가 있었다. 그 가운데는 자손에게 상속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매매한 토지가 있었다. 이는 관에 납세하고 있던 완전한 민전이었다. 따라서 어의궁에서는 호조에서 수세하던 액수인 20두의 배에 해당되는 40두를 거두었다. 민전이었으나 궁방에서 침탈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액수가 높았던 것이다. 반면 궁방에 투탁하는 경우에는 비교적 세액이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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