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7. 지주제의 발달과 궁방전·둔전의 확대
  • 3) 둔전의 확대
  • (1) 둔전의 형성과정

(1) 둔전의 형성과정

 임란 이후 屯田制에 중요한 양상이 나타났다. 營·衙門屯田이 발생한 것이다. 본래 둔전의 설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軍資에 충당하여 쓰려는 것과 지방관아의 경비에 쓰려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말기 둔전 문제를 해결하려고 일단 전국 둔토를 폐지하였다. 과전법에서는 소위 公廨田이라는 명목으로 중앙의 각 관청들이 각자의 수세지를 가지기로 되어 있었으나 세종 27년(1445) 田稅를 개정하면서 모두 國用田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단종 이후 둔토의 필요성이 다시 일어나면서 마침내 그 부활을 보게 되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관둔전은 自耕無稅의 토지이며, 국둔전은 소재지 고을의 鎭戌軍으로 하여금 이를 경작하여 그 수확을 軍資에 채워 쓰도록 한다고 하였다.0899)≪經國大典≫ 戶典 諸田.

 그 뒤 둔전의 경작을 군졸과 노비만이 아니라 민간의 노동력을 이용하였으며 심지어 둔전을 경작하기 위하여 민간에서 소를 끌어 활용하였다. 그러나 그 경우 민간에게도 일정한 수확을 분배하였다. 이를테면 논의 경우는 전부 군량으로 쓰고 밭의 경우는 分半하는 방식이었다.

 선조대에 들면 북쪽 변방의 수비 때문에 평안도, 함경도 등지에 둔전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둔전이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임진왜란 뒤의 일이었다. 전국의 토지가 황폐하게 되고 유망민이 늘게 되자 정부에서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민을 安集시켜 농업생산을 늘일 수 있는 방책을 구상하였는데 대체로 둔전을 설치하는 것을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둔전은 당시 전시상황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비변사의 계에 따르면 둔전의 이익을 첫째 인민을 단합시키고, 둘째 험지에 웅거해 要害地를 지키고, 셋째 농사를 권장해 곡식을 비축하고, 넷째 농사일의 여가에 將帥를 정해 조련하면 精兵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0900)≪宣祖實錄≫ 권 64, 선조 28년 6월 을묘.

 이에 비어있는 牧場·섬·堤堰 등의 토지에 둔전을 두기로 하였다. 특히 훈련도감이 설치되면서 군량을 위하여 둔전을 활용하였다. 훈련도감은 임란이 진행되던 선조 26년(1593) 새로운 군대 편제법과 훈련법을 도입하면서 군대를 강화하려고 설치된 군영이었다. 특히 훈련도감은 처음에는 국가 경비에 책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둔전을 개설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훈련도감에 전국의 진황지 등을 부속시키고 流民을 모집하여 둔민으로 하고 그들에게는 烟戶雜役을 면제하는 한편 農牛와 農粮을 분급하여 이를 개간, 경작하게 하고 그 수익으로써 군자를 충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군사, 농량뿐 아니라 적절한 지역을 찾기 힘들어서 둔전이 많이 설치되지는 못하였다. 선조 31년 경상도는 水田 400여 석, 旱田 231日耕, 충청도는 水田 300여 석, 旱田 219日耕 정도였다.0901)≪宣祖實錄≫ 권 97, 선조 31년 2월 신유. 이것으로 전국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아직까지는 상당히 적은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훈련도감뿐 아니라 다른 군문들이 계속 늘어나고 이들이 모두 둔전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둔전을 營門屯田이라고 하였다. 이 같은 영문둔전은 그 뒤로도 계속 설치되었고 이어서 이 영문둔전을 본딴 각종 아문에서도 둔전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아문둔전이라고 하였다. 또 그 뒤에는 군량과는 전혀 관계없이 순전히 일반 행정적 성질을 띤 관청들도 둔전을 가지고 늘여나갔다. 이들도 둔전을 가지는 구실은 역시 임란 뒤에 국고 수입이 줄어들어서 관청 재정을 조달하기 곤란하다는 데에 있었다.

 이로써 군영과 중앙 관청들이 국고의 통일적인 수세 체계로부터 독립한 자신의 수세지와 또 직접 점유지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각도 감영, 병영, 수영에서도 차츰 자의적으로 둔전을 가지기에 급급하였다.

 한편 평안도지역은 중국과 관련하여 둔전이 있었다. 병자호란 전에 淸의 審陽이나 명의 장수 毛文龍이 주둔하였던 椵島로 군량을 운송하는 것이 매우 많아서 둔전을 설치하였던 것이다.0902)≪備邊司謄錄≫ 104책, 영조 14년 9월 20일.

 둔전을 형성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처음에는 훈련도감에서 보듯이 황무지를 얻어서 개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런데 직접 개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절수의 방법으로 둔전을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본래 절수는 양안에 등재되어 있지 않는 토지에만 시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양안에 등록되지 않은 민전이나 개간한 땅이면서 立案 절차를 밟지 않은 민전이 많았는데 이를 절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곧 조선 중기 이후 閑曠地의 개간은 정부가 아닌 농민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는데, 농민들은 그 개간에 드는 비용과 노동력을 모두 부담하여 실질적으로 그 토지의 주인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각 영문이나 아문에서는 이 토지를 주인 없는 陳田이라는 명목으로 자기 관하에 부속시키고 둔전이라는 이름으로 屯稅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둔세는 다른 토지와 비교하여 대체로 헐한 편이었으므로 농민들은 둔세를 납부하고 대신에 屯民으로서 다른 잡역 등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택하였다.

 이를테면 선조 33년(1600) 獻納 崔相重에 의하면 당시 훈련도감에 속한 둔전 가운데 둔전의 본래 규정에 따라 유리한 농민들을 황무지에 모집하여 농량, 종자, 농구 등을 대여하여 방조하는 방식으로서 경작된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곧 상당수의 둔전은 감독관인 監官들이 가을에 들로 나가서 곡식이 잘된 일반 농민들의 토지를 자의로 둔전이라고 지정한다는 것이다.0903)≪宣祖實錄≫ 권 127, 선조 33년 7월 병인. 이 경우 둔전에 소속되면 전세와 부역을 면제받기 때문에 田主도 쉽게 응하였다.

 둔전 경영은 원래 전쟁으로 발생한 이재민들을 모집하여 국가가 농량, 농구를 대여하고 국가토지인 황무지 둔전을 극히 곤란한 조건 아래서 경작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경작자들에 대해서는 수확의 반을 국가에 납부시키는 것 이외에는 일체 조세와 徭役들을 면제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규정이 있기 때문에 일부 부유한 농민들은 자기 경작지를 둔전에 편입시킴으로써 자기의 국가적 부담을 가볍게 할 수 있었으며 관청이나 아문에서는 그 소출을 사사로이 이용할 수 있었다.

 이는 토지를 절수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민결의 징세권만을 지급하는 경우였다. 이는 흔히 ‘無土屯田’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有土屯田’과는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토지의 배타적인 소유권이 아직 확립되어 있지 못했던 당시 상황에서 이 유토, 무토의 구분은 애매한 채로 당시 농민이 부담하는 명목은 모두 屯稅라고 일컬어졌고, 따라서 이 무토는 가끔 유토로 오인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일반 민전을 둔전이라고 지정하고 조세와 요역을 감면받고 둔전에 편입하는 경우를 虛僞屯田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허위둔전은 일시적으로 자기 부담이 줄어들게 되지만 그 토지가 둔전토지로서 탈취되는 위험성도 있었다.

 또 이 같은 자진 편입 외에도 처음부터 관청에서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농민들의 기경지를 강제로 둔전이라는 명목으로 강탈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한 지역에 둔전이 어느 정도 형성되자 그 주변의 민전을 잠식해 들어가는 방식을 쓰기도 하였다.0904)≪孝宗實錄≫권 12, 효종 4년 6월 계유.

 이렇게 둔전이 늘어나자 둔전의 운영을 통제하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첫째 둔전이 늘어나면서 결수가 축소되어 세금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나아가 아문에서 거둬들이는 수취액이 제대로 쓰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 급료 등으로 활용되고 실제로 관청 수입은 매우 적었다. 둘째 둔전의 설치를 구실로 사적으로 백성들의 토지에 대한 약탈이 일어나는 일이 빈번하였다. 대체적인 둔전의 규모로 본다면 이러한 약탈이 마을단위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에 따라 마을단위로 소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인조대에 여러 차례 대신들이 둔전 혁파 등 개혁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인조 23년에 들어서 인조 15년(1637)을 기점으로 잡아서 그 뒤 신설한 것에 대해서는 혁파하라는 명을 하였다.0905)≪仁祖實錄≫ 권 46, 인조 23년 10월 무신. 그러나 그 뒤로도 대부분의 둔전은 혁파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종 11년(1670)에도 대신들이 訓鍊都監·守禦廳·摠戎廳 등 둔전 몇 곳을 혁파하여 본읍에 소속시키기를 청하였으나 혁파한 곳은 몇 곳에 불과하여 형식만 갖추는 정도였다고 한다.0906)≪顯宗改修實錄≫ 권 22, 현종 11년 7월 임오. 왕의 입장으로서는 형식적으로는 찬성하면서도 실제로 적극적으로 시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숙종대에도 둔전에 대한 혁파 논의가 계속 일어났다. 그 결과 임자년(1672) 이후에 설치한 것은 혁파하도록 하였다.0907)≪肅宗實錄≫ 권 6, 숙종 3년 5월 계묘. 그러나 실제로 모든 둔전은 그 이전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실효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둔전을 혁파하면 이것을 궁방에서 절수하여 혁파한 의미가 없게 되는 일도 일어났으며 한편으로는 둔전을 폐지하면 민이 흩어질지 모른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 하나의 대책으로는 이처럼 실제로 혁파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세의 책임을 호조로 돌리는 방안이 나왔다. 곧 호조에서 직접 세를 거두어 들여서 정해진 액수를 아문에 옮겨주자는 것이다. 이럴 경우 둔전의 導掌을 혁파하여 모두 수령에게 맡기자는 주장도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 나아가 진휼정책과 맞물려 읍에서 賑恤廳에 위임하여 주관하게 하고 여기서 본 아문의 경비를 대고 나머지는 진휼에 쓰도록 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영조 5년(1729)에는 새로운 대책으로서 아문둔전으로서 전세를 면제받은 경우는 모두 전세를 내게 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다시 아문전답의 면세토지를 정하였는데, 成均館·宗親府·忠勳府·司僕寺·司圃署·掌苑署栗園·內農圃·繕工監·尙衣院·內醫院·惠民院·司饔院·司畜署·耆老所·各陵位田·敦寧府·訓練都監 등 22,600결 정도에 대해서는 면세를 하고, 이를 넘어가는 액수와 다른 아문의 토지에 대해서는 세를 내도록 하였다. 다만 황해도의 管餉屯·禁衛營·御營廳·守禦廳·摠戎廳·經理廳 등에 대해서는 稅米만을 받도록 하였다.0908)≪備邊司謄錄≫86책, 영조 5년 12월 13일.

 둔전의 또 다른 폐단으로서 부역을 피하는 수단이 된 점에 대한 비판도 많이 제기되었다. 둔전으로 군역을 피하는 현상이 늘어나면서 良丁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영조 즉위년 正言 金浩는 둔전에서 牙兵·屯軍 등을 모아서 투속하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에 각 읍에서 군정을 뽑기 어렵고, 백골징포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 정도였다고 하면서 이를 금지시키도록 하였다.0909)≪備邊司謄錄≫ 76책, 영조 즉위년 10월 21일.

 또 한편 임란 뒤 지방에서는 군량 조달의 목적과는 달리 해당 관리들이 사적인 수탈을 하고자 설치하는 경우도 많았다. 선조 34년(1601) 사간원에서 올린 장계를 보면 각도 관찰사들의 사설 둔전의 수입이 모두 군관들의 횡령으로 들어가 관의 수입은 없고 또 여기에 부세나 역을 어기고 도망한 자들이 모여들어서 폐단이 컸음을 알 수 있다.0910)≪宣祖實錄≫ 권 138, 선조 34년 6월 기묘.

 그러나 한편 토지에 관해서는 아문도 궁방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열세였다. 아문의 둔전이 궁방으로 절수되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특히 숙종 37년(1711)에 의하면 군문의 둔전에서 궁가로 넘어간 것이 절반이나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0911)≪肅宗實錄≫ 권 50, 숙종 37년 7월 을묘. 상당히 심각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궁방전에 대한 절수 혁파의 내용을 담고있는 乙亥定式이 시행된 지 고작 몇 년이 지나지 않는 상황인데도 국왕이 이러한 실태를 오히려 두둔하였다. 영조대에는 평안도 永柔의 德池筒, 金海의 大山屯, 康津의 古今島, 靑山島 등 4대 둔전으로 불리었던 토지도 궁가에 빼앗겼다.0912)≪備邊司謄錄≫ 75책, 경종 4년 6월 24일. 이러한 현상이 자주 드러나는 것은 국왕은 아문보다 왕실에 대한 사적인 우위를 두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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