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7. 지주제의 발달과 궁방전·둔전의 확대
  • 3) 둔전의 확대
  • (3) 둔전의 경영형태

(3) 둔전의 경영형태

 둔전은 본래 무상으로 동원되는 부역노동으로 직접 경영하였다. 그러나 17·18세기 아문둔전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소유구조나 경영형태도 변하였다.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로 운영되었다. 곧 竝作半收·賭租·民結收稅 등이 대표적이었다. 가령 충훈부 둔전의 경우를 보면 분반타작하는 곳, 作人의 원에 따라 賭租로도 永定되어 있는 곳, 그리고 實負에 따라 수세하는 곳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0918)≪忠勳府謄錄≫ 영조 27년 8월, 均役廳郎廳了(奎 15048의 1).

 직접 병졸들을 동원하여 황무지를 경작하는 방법은 임진왜란 진행과정에서 일부 시행되었다. 선조 27년(1594) 서울 부근의 살곶이·鄭金院坪 등 주인없는 빈 땅을 훈련도감 각 부대에 배정하고 농우와 농기구들을 분급하여 둔전을 경영하라고 명령하였다.0919)≪宣祖實錄≫ 권 55, 선조 27년 9월 정유. 훈련도감군 2천 명 가운데 대부분이 둔전경영으로 나갔기 때문에 서울에 남아있는 숫자가 얼마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둔전은 많지 않았다고 보인다. 더구나 둔전군을 부리기 위해서는 먼저 농량이 상당히 필요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둔전이 성공하기 어려웠다.

 앞에서 보았듯이 둔전은 임란 후 민간의 못쓰게 된 경지들을 국가가 점령하고 유민들을 모아 국가의 농량과 농기구를 대여하여 경작시킨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 경우는 매득한 경우와 함께 아문이 하나의 사적지주와 마찬가지로 병작반수를 하는 형태였다.

 먼저 유리한 농민들을 모아서 경작하는 둔전은 임란 때부터 전국 각지에 상당히 많이 운영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충청도 40여 사찰의 위전을 훈련도감에 속하게 하고 유민들을 모집하여 경작하게 하였고, 그밖에 水原 禿城 근방, 高陽에서 延安에 이르는 길, 황해도 蘆田지대, 江華 목장, 尙州, 金海, 鳥嶺 일대 등 큰 면적의 황무지 등 여러 지역에 두었다. 이러한 종류의 둔전에서는 경작하는 농민들에 대하여 정부로부터 일정한 농량·종자·농기구·농우 등을 대여받았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空名告身을 팔기도 하였다. 가령 선조 32년(1599) 자료에 의하면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경기와 지방의 각종 둔전에 농우 700∼800마리를 나누어주었다고 한다.0920)≪宣祖實錄≫ 권 117, 선조 32년 9월 무신.

 이처럼 군사를 활용하거나 유민 경작을 하게 되면 농량·종자·耕牛가 필요하므로, 이것이 원활하지 않을 때는 농민들에게 병작을 시켰다. 병작의 경우에도 대체로 종자는 지급하였다. 곧 관아에 비축되어 있는 곡식을 모집한 농민들에게 지급하여 무주지를 개간하여 그 수확을 관과 농민이 반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간지일 경우 병작이라고 하더라도 생산력이나 민인의 처지에 비해 부담이 심하였다. 따라서 선조대 載寧·鳳山의 둔전의 경우를 보면 주변의 백성들에게 강제로 병작하게 하였으며, 종자를 충분히 지급하지 않아서 제방에 가까이 사는 백성은 흩어지고 그 피해가 멀리있는 마을까지 강제로 병작하게 하였다고 한다.0921)≪宣祖修正實錄≫ 권 24, 선조 23년 4월 임신.

 따라서 병작이라도 일반 지주지와 달리 반분보다 낮을 수 있었다. 가령 정조대 황해도 봉산에 있는 장용영 둔답에서는 지대가 1/3 수준이었다고 한다.0922)≪正宗實錄≫ 권 48, 정조 22년 3월 임오. 그러나 개간지라는 토지 성격과 그밖에 水稅와 種子는 작인으로 하여금 부담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전체 부담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개간지 가운데서도 민인들이 물력을 들여 기간한 곳은 병작제와 부담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숙종 33년(1707) 江華 船頭浦屯田의 경우 이 지역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었는데 大戶에게는 2석락지, 中·小戶에게는 1석락지, 殘戶에게는 10두락지씩 지급하기로 하였다. 개간지인 만큼 3년간 수세하지 않고, 기경을 하게 되면 종자를 주어 병작제를 실시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관에서 종자를 지급하면 병작례로 반분하고 민인들이 스스로 개간한 곳은 3년이 지난 뒤 土品을 살펴서 매두락당 세액을 정하였는데, 그 액수는 1斗落당 상답은 4두, 중답은 3두, 하답은 2두씩이었다.0923)李景植, 앞의 글(1987), 471쪽. 결당 액수를 정확히 환산하기는 어려우나 200두의 수준을 넘어가지는 않는다고 보인다. 몇몇 군문둔전의 사례를 찾아보면 수어청둔이 결당 穀 200두, 총융청둔이 150두, 훈국둔이 70두로 운영되었다고 한다.0924)≪備邊司謄錄≫ 69책, 숙종 42년 12월 28일. 이 또한 결당 200두를 밑돈다.

 200두의 의미는 궁방에서도 보이듯이 일반 민전의 세액이 1결당 100두 정도였으므로 절반은 아문에서 미리 개간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세액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는 민간의 개간에 따른 권리도 어느 정도 인정되었고, 이러한 권리가 매매까지 가능하였다. 그러나 농민이 이 토지에 대하여 완전히 소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숙종 때 江華의 吉祥面을 비롯한 3개면의 목장을 혁파하고 이를 농민에게 개간하여 토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계속 경작되지 않고 진황이 되자 조정에서는 이 토지를 10부당 목 2필을 받고 농민에게 매매하여 완전히 私田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다.0925)≪備邊司謄錄≫ 64책, 숙종 38년 6월 4일. 곧 관청과 농민 사이에 이 토지를 둘러싼 권리가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서 이를 완전히 가지려면 매득해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아문에서는 주인처럼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이 自耕의 원칙으로 경영되던 국가 공전으로서의 관둔은 借耕에 의해 경영되는 지주지로 변화되고 있었다. 특히 매득한 경우는 아문이 명실상부한 지주였으므로 당연히 지주제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수취액수나 도지, 병작의 규례는 당연히 각 읍마다 달랐다.

 한편 민전으로서 투탁하거나 침탈된 토지도 적지 않았다. 인조대 훈련도감의 둔전 가운데서도 靈光·德山·龍仁·陰竹 등지는 민전으로 세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0926)≪顯宗實錄≫ 권 9, 현종 5년 11월 경술. 각 군문의 둔전은 모두 민전에서 수세하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둔전 가운데 이러한 형태가 보편화되었다.

 이러한 토지는 부담이 훨씬 낮을 수밖에 없었다. 가령 경종대에 의하면 훈련도감의 募入民田의 경우 부담이 1부에 皮穀 6∼7승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부세는 면제되었다고 한다.0927)≪備邊司謄錄≫ 74책, 경종 3년 11월 20일. 따라서 전체 부담은 일반 토지보다 훨씬 낮았고 농민들은 이를 기꺼이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대체로 민전을 둔전으로 만든 경우 이런 토지는 호조의 수세와 같은 양을 징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인조 조에 아문둔전에 끼여 들어갔던 민전의 소유자들이 이 토지를 다시 호조에 귀속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왕의 답변이 “아문에 세를 내거나 관가에 세를 내거나 마찬가지다”고 거부하였다.0928)≪仁祖實錄≫ 권 46, 인조 23년 10월 무신.

 그러나 민전이라도 일단 둔전에 투속되면 비록 민결의 예에 따라 수세된다고 하더라도 일반 사유지와 처지가 같지는 않았다. 둔전이라는 딱지를 떼기 어려웠다. 효종초 司僕寺에 속하던 강화목장을 혁파하고 민간으로 하여금 개간하도록 하였을 때 이곳의 수세를 사복시와 호조 어디에서 구관하게 할 것인지를 논란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호조에서 수세하였다가 2년 뒤 다시 사복시로 속하게 하였는데, 이때 이유가 호조에서 수세하면 사전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0929)≪備邊司謄錄≫ 권 15, 효종 3년 3월 10일. 본래 목장토였던 만큼 수세액에 관계없이 호조에 속하면 사전이 되고 사복시에 속하면 사복시 둔전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둔전은 수세의 양과 관계없이 둔전으로서 범위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둔전이 이런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아문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자의적으로 세를 올리기가 쉬웠다. 심지어 募入된 민전까지 매득한 민전과 같을 정도로 올려서 농민들이 경작을 꺼려 토지가 진폐되기도 하였다. 이는 민전의 본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둔전은 궁방전과 함께 조선 후기 토지제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남으로 인하여 土質과 結卜 등의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고 마구 면세되어 토지제도의 문란을 일으켰다. 또한 원칙적으로 둔전은 형성되는 과정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그 차이에 따라 부담의 양이 달랐는데, 이를 둘러싸고 아문과 농민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상호간의 힘에 따라 과정의 차이와 달리 부담이 매겨지기도 하였다. 또한 그 양상은 단순히 수취분쟁에서 나아가 소유권분쟁으로 전개되었다.0930)李景植, 앞의 글(1987), 487쪽.

<宋讚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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