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
  • (3) 대동법의 제정·시행

(3) 대동법의 제정·시행

 광해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즉위하였다. 新政의 기운이 민심의 慰悅에 맞추어지는 가운데 호조참의 韓百謙은 대공수미법의 修補 시행안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영의정 李元翼이 이를 재청하고 나섰다. 광해군은 즉각 이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이의 시행을 반대하는 일부 원로대신과 방납·호우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祖宗之法의 준행을 강조하면서 대공수미법이 지녔던 지난날의 난점들을 들어 그것이 ‘不可久行의 것’임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그 대안으로 양전의 시행, 호패법의 강화, 貢案의 개정 등 고식적인 미봉책을 계속 제시하였다.

 찬·반의 논란 속에 어려운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광해군은 즉위년(1608) 5월에 그 타협책으로 우선 경기도에 한하여 대공수미법의 修補案을 시험적으로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그 事目을 이원익으로 하여금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宣惠法으로 명명된 경기도의 새로운 대공수미법, 즉 大同法이 제정·시행되었으니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0942)≪光海君日記≫권 4, 광해군 즉위년 5월 임진.
경기도의 경우 大同事目이나 大同廳 事例가 전하는 것이 없어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알지 못한다.

○담당 관서로 선혜청을 설치하고, 都提調 1員(영의정 例兼), 副提調 1員(호조판서 例兼), 郞廳 2員을 둔다.

○도내의 모든 전토에서 1결당 쌀 16말씩을 부과·징수하되 봄·가을로 나누어 8말씩 징수한다.

○봄·가을로 7말씩은 선혜청에서 수납하여 경기도에서 상납하던 모든 경납물의 구매에 사용하고, 봄·가을로 1말씩은 각 군현에 유치하여 수령의 公·私供費로 사용하게 한다.

○선혜청은 현재의 물가를 참작하여 정해진 공인(종래의 방납인)에게 여유있게 물품가를 지급하고, 공인은 지정된 물품을 해당 관청에 때맞추어 납부한다.

○收米(16말) 이외에는 일체의 加徵을 허락하지 않는다. 단 山陵·詔使의 役은 예외로 한다.

 경기의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년 9월부터 시행되었다. 방납배의 반발을 예방하기 위하여 이들로 하여금 受價·備納하게 하기는 했지만, 이들과 巨室豪家의 저항은 계속되기만 하였다. 방납배들은 거의가 공인으로 지정되어 합법적인 어용상인이 되기는 했어도 종래의 ‘十倍之利’을 얻지 못하게 되었고, 거실호가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막대한 전토에서 새로이 대동세를 납부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광해군은 여러 차례 폐지하려고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경기도 농민들의 강력한 반대로0943)安鼎福은 그의≪列朝通紀≫에서 경기대동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光海命先試之畿內 巨室豪族與主人等 皆失防納大利 百塗沮擾 光海屢欲罷之 以畿民爭言其便 故行之」.
좌절되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경기도 농민들의 기운이 주변의 도민을 자극하여 대동법의 확장론을 유발하였다. 하지만 대동법의 확대 시행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다만 광해군 말엽에 충청·전라도 연해의 군현들에 대하여 공물을 무명이나 베로 바꾸어 납부하게 하는 임시적인 조치가 취하여졌을 뿐이다.

 1623년 反正을 통하여 인조가 즉위하자, 新政의 기운은 다시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논의하게 하였다.0944)池斗煥은 앞의 글(b)에서 三代의 理想社會, 즉 大同社會를 지향했던 純正성리학자들이 인조반정을 통해 집권했기 때문에 광해군 때 非純正성리학자들인 北人들에 의해 지연되던 대동법이 가장 시급한 개혁정책으로 추진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를 위해 대동법이 곧 井田制와 상통하는 것임을 논증하고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는 보다 구체적이고도 종합적인 고찰이 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호조(판서 李曙)가 民心慰悅策의 한가지로 경기도에서 효험을 보고 있는 대동법을 2∼3개 도에 확대 시행할 것을 건의하고, 이어서 이조정랑 趙翼이 장문의「論宣惠廳疏」를 올려 대동법의 전국적인 시행을 역설한 것이 그 단초였다. 조익의 상소를 받은 인조는 곧 중신회의를 소집하여 그 가부를 논의하였고, 그 결과 확대 시행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외방에서만 횡행하던 도적들의 무리가, 그것도 정식 전투복을 입고 각종 무기로 무장한 무리가 바로 도성 밖에까지 출몰하게0945)≪承政院日記≫3책, 인조 원년 윤10월 3일. 되었던 당시의 상황이 대동법 반대론자들을 적지아니 압박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인조 원년(1623) 9월에 강원·충청·전라의 3도 大同廳이 설치되고 그 사목이 제정·시행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3도에는 그 시행의 便否를 살피는 암행어사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3도에 실시된 대동법은 실시되던 해와 그 이듬해에 걸쳤던 흉작으로 인하여, 또 각 지역의 특성을 감안하지 못한 시행 세칙들로 인하여 이른바 半大同의 원성을 샀다. 전라도의 경우, 진상물을 종전대로 현물로 납부하게 한 경우가 많아서 운송과 點退(중앙관서에서 진상·공물을 수납할 때 적합하지 않다고 ‘退’字를 써서 물리치는 것)의 폐해가 계속 존재하였고, 輸運船馬價와 人情·作紙價가 규정되어 있지 않아서 이의 징수가 전보다 더 하였으며, 刷馬價 또한 대동세에 포함되지 아니하여 남징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부호들은 1결에 12말씩의 쌀을 일시에 납부해야 하는 곤란을 겪고 있었으며, 정부에서도 이 쌀의 대부분을 경창으로 조운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동법에 대한 비판론은 다시금 거세게 일어났고, 그 기세는 대동법의 확대를 주도하였던 이원익마저 3도의 대동법을 잠시 停罷할 것을 제안하게 하였다. 이에 3도 대동청은 인조 2년 12월에 혁파되고 말았다. 하지만 강원도의 대동법은 강원도 유생들의 청원에 따라서 계속 시행되었다. 호조에 그 업무를 이관하면서 대동미를 봄과 가을에 8말씩 나누어 징수하게 하고 쇄마가를 책정하게 하는 등 약간의 규정을 변경시켰을 뿐이다.

 충청·전라도의 대동법이 폐지된 이후, 대동법의 확대 실시론은 병자호란을 전후로 하여 간간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李植·權盼·金堉 등에 의하여 제기된 이 논의는 崔鳴吉·金尙憲 등 원로대신에 의하여 번번이 억제되고 말았다. 국법을 자주 바꾸느니 보다는 공안을 개정하고 호패법을 강화·시행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이유에서였지만, 공안의 개정은 실제로 진전되지 않았다. 따라서 지주들의 이익과 방납배의 이권만이 계속 옹호되고 추구되어 간 셈이다. 농민의 유망과 저항이 심화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 무렵의 이른바 南方土賊이란 바로 이들 유망농민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제 만약 그 일당을 모두 제거하고자 한다면, 남아날 백성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될0946)≪孝宗實錄≫권 7, 효종 2년 7월 기해. 정도로 그 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악화 일로에 있던 농민의 생활고는 효종의 즉위를 계기로 대동법의 확대시행론을 다시금 제안하게 하였다. ‘王者之政 莫先於安民’이 새삼 강조되는 가운데 延川君 李景嚴을 비롯하여 김육·조익 등이 삼남에 대동법을 다시 시행하자고 강경히 주장하고 나섰고, 李景奭·鄭太和·許積 등이 이에 찬동하고 나선 것이다. 김상헌을 비롯한 金集·宋時烈·宋浚吉·元斗杓 등의 반대론이 격심하기는 하였지만,0947)李建昌은≪黨議通略≫에서 山黨(金集 등)과 漢黨(金堉 등)의 分爭이 대동법의 찬반에서 비롯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新政의 기운은 실시론으로 기울어 갔다. 효종 자신이 明의 멸망을 연상할 정도로 남방토적에 대하여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고, 또 김육·조익·李時白 등 실시주창자들이 議政의 자리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효종 2년(1651) 8월에 우선 충청도에만 다시 시행하도록 결정되었다. 삼남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그 중 농민의 부담이 가장 무거웠던 충청도에만 시험적으로 시행하여 보자는 타협안이 채택된 것이다. 영의정 김육은 몸소 湖西大同事를 주관하면서 그 사목을 마련하였다.

 충청도에 시행된 대동법은 간간이 ‘宮市之弊’ ‘作木之弊’ 등을 논의하게 하기는 했지만, 경기·강원의 대동법과 같이 양호한 성과를 거두어 갔다. 반대론에 앞장섰던 송시열마저 호서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와서는 대동법의 효험을 시인할 정도였다.

 그러나 효종 5년에<湖西大同事目>의 반포를 계기로 하여 장령 沈摠이 전라·경상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자 대동법 확대 실시론은 다시 한번 시련에 부닥치게 되었다. 그것은 이 두 도가 전국 實結數(收稅田結數)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서 대동미의 조운에 새로운 대책이 없이는 그 시행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의 반대 논의가 있었고, 또 남쪽 지방의 생산물을 서울에서 구입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우려의 논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에 대한 김육의 대책과 설득은 끝내 전라도 53官의 수령에게 대동법 시행에 대한 찬부를 묻게 하였고, 그 결과 효종 9년 6월에 연해지역 27개 군현에만 9월부터 시행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연해지역에서는 모두 찬성하고 山郡 가운데 반수가 반대한 이유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지만, 대개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말미암지 않았나 생각되고 있다. 즉 선조 36년(1603)의 양전 때 海邑이 兵禍를 입었다는 이유로 부담이 적게끔 작성된 양안이 당시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과, 해읍이 田稅는 가벼웠지만 貢役이 과중했다는 점이 되겠다.

 이리하여 경기·강원·충청의 3도에 이어 전라도 해읍에까지 대동법이 실시되고, 또 그 결과가 양호하게 나타나자, 대동법의 확대 실시는 순조롭게 이루어져 갔다. 반세기에 걸쳐 찬반의 논의가 거듭되는 가운데 조익·김육 등에 의하여 대동법이 제도적으로 적절하게 정비된 까닭이기도 하였지만, 대동법의 운영을 원활하게 진전시켜 줄 수 있게끔 사회경제적 여건이 성숙되기 시작한 까닭이기도 하였다. 상업의 발달, 수공업의 성장, 도시의 발흥, 화폐의 유통, 車輪의 통행, 서민의 사회경제적 향상 등이 대동법의 시행과 인과관계를 맺으면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김육의 旅店설치론, 화폐주조론, 水車·거륜 보급론 등도 그 실제는 모두 대동법의 시행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전개된 것이라고 보겠다. 그런데, 이러한 원인들과 함께 간과해서 아니 될 사실은 대동법의 점차적인 확대 시행에 따라서 都下의 양반 권세가들이 공물 물종을 매점 매석하고, 또 공인의 이권을 점유하는 사례가 왕왕 일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는 그들도 대동법의 시행에 적응하여 새로운 수익의 추구를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전라도 山郡의 대동법은 이 같은 일련의 변화가 전개되는 속에서 실시되었다. 앞서의 경우와는 달리 좌참찬 송시열이 현종 즉위초에 제안하여 그 이듬해 6월에 作木(쌀을 무명으로 바꾸어 수납하는 것) 사항만을 논의 결정(1결당 무명 2필, 쌀 6말 5되=무명 1필)함으로써 별다른 논란을 겪지 않고 그 실시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흉년을 당하여 즉시 시행되지 못하다가 현종 3년(1662) 7월에 예조판서 金佐明의 건의에 따라 그해 가을부터 시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事目(全羅道大同事目)은 김육의 유언에 따라 김좌명과 전라감사 徐必遠이 마련하여 그 이듬해에 반포되었다. 그러나 이 전라도 山郡의 대동법은 그곳 유생들의 항변으로 말미암아 현종 6년 12월에 잠시 停罷되었다가 현종 8년 봄에 다시 시행되는 곡절을 겪었다. 대동법의 실시에 앞서 마땅히 수행했어야 할 양전을 행하지 못한 까닭이었으니, 이때 1결당 부과액이 쌀 12말로 감하되면서 作木換價도 8말 당 1필로 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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