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3) 대동법의 실시 결과와 의의

3) 대동법의 실시 결과와 의의

 대동법은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공납제의 모순과 폐해를 없애고, 농민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免稅田의 증대로 인한 歲收의 감축과 영세소작농의 증가로 인한 戶役의 위축을 극복하고자 제정·시행된 재정제도였다. 그러면 그 실시 결과는 어떠했던가?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시행되던 18세기 초엽까지만 하더라도 그 실시 결과는 극히 성공적이었다. 分捧·作木의 문제를 비롯한 漕運의 곤란, 조달물품의 불량, 각 관청간의 爭利 등의 문제가 적지아니 논란을 벌려 가기는 했지만, 농민이 힘써 대동법의 시행을 청원하고, 또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던 관료들마저 그 편익을 주장하고 나서는 실상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 날로 격화된 당쟁과 이에 뒤이어 전개된 老論 일파의 閥閱·勢道政治는 정치기강의 문란과 함께 극심한 재정난을 초래하여 대동법의 정상적 운영을 저해하여 갔다. 중앙 재정의 충족을 위하여 대동미의 상납규식이 收租頒降制로 변개되고, 이에 따라 留置米로 지용되던 각종 용목들이 다시 戶役으로 전가되어 갔던 것이다. 전라도의 경우, 이미 18세기 말엽에 대동미 징수량(약 米 147,000石)의 대부분이 상납미로 책정되어(米 144,000여 石) 서울로 수송되는 실태를 이루어, 이에 따른 지방 재정의 파탄과 이를 빙자한 지방 관원의 탐학은 대동법 실시 이전의 양상을 무색하게 할 정도였다.

 따라서 대동법의 실시 결과는, 그것이 비록 정치적 상황·추세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이의 실시가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에 미친 영향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재정면에서는 결과적으로 봉건적 지배체제를 지속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보겠지만, 사회·경제면에서는 이와 반대로 봉건적 질서와 체제의 이완·해체를 촉진시킨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0955)崔完基는 앞의 논문의 결론에서 “대동법의 본질은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근대적이라기보다는 봉건적 특성이 보다 강요된 수취 체제라 하겠다. 봉건 국가가 동요하는 자체의 질서를 바로잡아 지속적으로 지배 구조를 유지하고자 하는 데서 大同法과 같은 미봉책이 제시되었던 것이라 함이 보다 실상에 가까운 이해라고 보고 싶다. 어찌보면 봉건 체제의 모순을 은폐하고자 한 편법의 하나가 대동법이었다고 하겠다. 그것은 그 이후 봉건 국가의 농민 지배 양태, 지배 체제 유지의 방향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종래의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평가한 수취 체제의 변화, 사회 경제적 영향은 파생적인 것으로서, 대동법 이전에 이미 그러한 조건은 마련되고 있었으며, 대동법으로 인하여 다소 증폭되었던 것이기 때문”(246쪽)이라고 하면서 대동법의 내용에만 초점을 맞춘, 또 그것이 사회·경제에 미친 영향에만 치중한 지금까지의 이해·평가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참고해야 할 견해이기는 하지만, 대동법 실시 이전, 즉 16세기 중·말엽의 사회·경제적 실상과 추세에 대한 보다 명확한 연구와 이해를 기다려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革命이 아닌 限, 당시의 체제·질서를 완전히 벗어나는 제도·조처가 마련되고 시행되기는 어려우리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대동법이 貢人과 市廛을 매개로 하여 왕실과 정부의 소요 물자를 조달케 함으로써 16세기 중엽부터 성장하여 오던 상업과 수공업의 활동을 크게 촉진시키는 한편, 화폐의 유통, 雇傭체계의 진전, 운송활동의 증대 등을 유발하여 교환경제체제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고, 나아가 전국적인 市場圈의 형성과 도시의 발달을 이룩하게 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상의 변화와 함께 상·공인층의 사회적 성장과 농촌사회의 분화를 촉진시켜 종래의 신분질서와 사회체제가 이완되고 해체되는 데도 일정한 역할을 기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동법의 제정·시행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는 그 무엇보다도 이에 두어지고 있지만, 財政史 자체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은 4가지 점에서 긍정적인 의의가 주어지고 있다.

 첫째는, 稅源을 富의 원천인 토지에서의 收益에 집중·단일화시켰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토지가 주된 생산수단이었고, 또 부의 기본형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공납제에서는 사실상 民戶에 기준하여 貢·役을 부과함으로써 수익과 세납의 직접적인 연계가 맺어지지 못하고 있었고, 또 이에서 그 폐해의 일단이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동법은 이러했던 貢·役을 田結稅化함으로써 稅納의 단일화와 아울러 수익과 세납을 직결시키는 課稅上의 진보를 이룩한 제도로 평가되고 있다.

 둘째는, 課稅의 ‘공평의 원칙’에 합당한 보편적 과세와 함께 定率稅主義를 마련하고 채택하였다는 점이다. 공납제에서는 貢·役의 부과 원칙이 군현의 殘盛, 즉 전결과 민호의 多寡에 따르는 것으로 되어 있어 농민 각자의 수입과는 그 부과가 무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는 土地多占者인 양반에게는 양반의 면역 특권을 들어 부과하지 않고, 과중한 地代를 부담하고 있는 無田小作農이나 영세자작농에게 그 모두가 부과되고 있었다. 대동법은 이 같은 공·역의 부과 방법을 폐기하고 토지소유량에 비례하여 定率 과세함으로써 수입의 다과에 따르는 공평한 조세체계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恣意性이 짙은 配賦稅主義를 탈피하고 세율을 미리 결정하여 적용하는 정율세주의의 채택이라는 세제상의 진보를 이룩한 제도로 이해되고 있다.

 셋째는, 예산제도의 기틀을 마련하여 종래의 자의적이고도 가렴적인 재정운영에 일정한 수취 질서를 부여하였다는 점이다. 공납제에서도 貢案(歲入豫定案)과 橫看(歲出豫定案)이 있어 예산제도의 명목은 갖추어져 있었으나, 이 案들은 매년 편성되는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量入制出의 원칙에 입각하여 실질적인 구속력을 지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정부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加徵되기도 하고 蠲減되기도 하여 국가적인 수취 질서를 지니지 못하여 왔었다. 그리고 지방 재정의 경우는 일정한 예산도 없이 수령의 자의적인 경리에 맡겨져 있었다. 대동법은 이러한 중앙 및 지방 재정의 운영 방법이 결과적으로 빚어내고 있었던 加斂主義的 수취 질서를 파기하고, 量出定入의 원칙에 입각하는 예산제도와 그 운영 방법을 중앙 및 지방에 각각 마련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재정 질서를 근대적 질서에로 한 차원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넷째는, 당시의 일반적 교환 수단이었던 쌀과 베[布]·무명[木] 등으로의 징수납에서 점차 錢으로 換捧 또는 代捧하게 함으로써 租稅 金納化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비록 환봉·대봉이라는 것이 주로 輸運·保管·支出의 편익을 목적한 데서 마련된 것이고, 또 大同米·木·布를 화폐가치로 환산한 금납화여서 조세의 근대화를 뜻하는 것이 되지 못하지만, 대동법의 시행이 화폐 유통의 전제가 되는 상품 생산과 교환경제의 발달을 촉진시켰던 점과 아울러 보면, 대동미의 錢으로의 환봉·대봉은 근대적 조세체계로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韓榮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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