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2. 상업·수공업·광업의 변모
  • 1) 상공업 발달의 사회경제적 배경

1) 상공업 발달의 사회경제적 배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가져다 준 충격과 그에 비롯된 조선 사회 내부의 반성이 이 시기 상공업 발달의 중요한 배경을 이루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종래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해는 양란 이전의 조선 사회에서 이미 생성되고 있던 새로운 사회경제적 움직임에 주의하지 않은 결과였던 것으로 보아진다. 근래에 들어 조선 사회 내부에서 움직이고 있던 여러 새로운 경제적 기운과 사회적 분위기에 주목한 성과들이 매우 설득력 있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새로운 이해의 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양란 이전의 새로운 사회경제적 현상으로서 먼저 언급할만한 것은 15세기말∼16세기초부터 시장유통경제가 이미 발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0957)李泰鎭,<16세기 韓國史의 理解 방향>(≪韓國社會史硏究―農業技術발달과 社會變動≫, 지식산업사, 1986), 292∼298쪽. 즉 17세기 이후 전개되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발달의 요인이 이미 16세기에 마련되어 있던 것이다. 16세기 중엽이래 광범하게 행하여졌던 공납제 시기의 공물 방납도 17세기 이후의 대동법 성립을 가능케 한 유통경제적 기반의 중요한 요소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일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해 공물방납은 일과성의 투기 행위가 아니라 이 시기 유통경제의 현실적인 변화에 조응하여 사회 내면에 정착, 지속되고 있던 부세운영의 진전된 형태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0958)이지원,<16·17세기 前半 貢物防納의 構造와 流通經濟的 性格>(≪李載龒博士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한울, 1990).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 전기 이래의 공납은 그 형태상 방납에 의한 운영이 지배적이었던 바, 경시를 중심으로 공물의 구매 상납이 지속되면서 이를 전업적으로 담당하는 ‘防納私主人’이라 불리던 새로운 상인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또한 방납가가 미·포에 의한 화폐적 지불 형태를 강화시켜 가면서 그 이윤이 극대화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공물의 방납권도 정착되어 갔다. 그 결과 부세 운영적 측면과는 별도로 유통경제를 통한 상업구조가 형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공물방납체계의 성격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파악을 토대로 대동법 실시 이전과 이후의 제반 경제변화를 유기적으로 연결지어 이해해 보려는 시도로 보여진다.

 다음으로는 여말선초의 시기에 있었던 농업기술의 발달과 생산력의 증대가 상공업 발달을 촉진시켰다는 점이다.0959)이에 대해서는 李泰鎭, 앞의 책 참조. 連作常耕의 집약농업기술에 의해 休閑農業의 한계가 극복되면서 소농민들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잉여생산물을 가질 수 있게 됨으로써 상공업에 새로운 발전이 있게 되었다. 경작면적도 14세기말 100만 결이었던 것이 15세기 중엽에 가서는 150만 결로 확대되었다. 15세기말∼16세기 중엽에는 간척지의 개간과 川防의 개발 및 보급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농업생산력이 더욱 증대되었다. 조세로 거두어 서울에 보관하는 정부 비축곡이 건국초에는 30만 석에 불과하였으나, 15세기를 거치면서 농업생산력이 크게 향상됨에 따라 16세기 중반에는 200만 석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곡물생산의 대폭적인 증가는 자연히 국내의 곡물시장을 발달시키게 되었다. 또한 15세기 중반 이후 면화재배가 확대됨에 따라 면포 역시 교환의 척도로 화폐 기능을 다하면서 상업의 발달을 더욱 촉진시키는 역할을 해나갔다.0960)宋在璇,<16世紀 綿布의 貨幣機能>(≪邊太燮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三英社, 1985).

 세번째로는 대외무역의 성행을 들 수 있다.0961)이 시기의 대외무역에 대해서는 李泰鎭,<國際貿易의 성행>(≪韓國史市民講座≫9, 一潮閣, 1991)이 참조된다. 16세기에 들어 동아시아 3국은 모두 경제력이 신장되어 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국제간 교역이 전례 없는 활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중국의 비단·면포·도자기, 조선의 곡물·면포·은, 일본의 구리·은 등이 주요 상품을 이루면서 상호 교역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중국과의 무역을 보면 開市貿易, 즉 공인된 정규교역이 양국간의 새로운 무역체계의 출발점을 이루었다. 中江開市를 시발로 會寧·慶源 지역에 개시가 열려 농기구와 소금·해산물·면포·지물류 등이 거래되었다. 하지만 교역량의 증대가 요청되면서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사상들이 활동하는 柵門後市와 같은 후시가 나타나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

 일본과의 경우를 보면, 광해군 원년(1609) 국교가 재개됨에 따라 왜관에서의 교역도 재개되었다. 왜관에서의 官貿易은 매월 6회로 한정되어 있었고 교역량도 제한되어 있었으나, 私貿易과 密貿易이 성행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 상인들은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仲介貿易으로 상당한 상업적 이윤을 누릴 수 있었다. 즉 중국에서 수입한 비단과 원사 및 조선산 인삼을 일본의 결제 수단인 은과 구리, 특히 은과 교역하여 막대한 상업적 이윤을 획득하였다.0962)金鍾圓,<朝鮮後期 對淸貿易에 대한 一考察 -潛商의 貿易活動을 中心으로->(≪震檀學報≫43, 1977).
吳星,≪朝鮮後期 商人硏究≫(一潮閣, 1989), 32∼49쪽.
―――,<朝鮮後期 人蔘貿易의 展開와 蔘商의 活動>(≪世宗史學≫1, 1992).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축적된 상업자본은 17세기 후반의 국내 경제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밖에도 17세기 중엽에 이미 실현되고 있던 工匠의 자유로운 생산활동에의 참여와 그에 따른 상품의 생산과 공급, 임노동층의 증가, 地代의 금납화 등이 이 시기 상공업 발달의 배경으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명확하게 검증된 단계라고는 보기 어렵지만, 16세기 이후의 급격한 인구증가 현상 또한 상공업의 발달을 촉발시킨 한 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0963)韓榮國,<商工業 발달의 시대적 배경>(≪韓國史市民講座≫9, 一潮閣, 1991), 7∼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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