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2. 상업·수공업·광업의 변모
  • 2) 시전의 변화
  • (2) 난전의 대두와 금난전권의 성립

(2) 난전의 대두와 금난전권의 성립

 서울을 대표로 하는 도시 지역에서의 상공업 발달은 기존의 시전상인이나 공인과 같은 특권상인 이외의 새로운 상인층의 대두로 이어졌다. 이른바 亂廛을 벌이고 있던 상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진다.0973)이하 난전의 유형에 대해서는 金泳鎬,<朝鮮後期에 있어서의 都市商業의 새로운 展開>(≪韓國史硏究≫2, 1968), 32∼40쪽 참조. 먼저 서울과 서울 근교에 있던 독립 자영수공업자와 상업적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농민들을 들 수 있다. 경공장과 외공장의 폐지와 工匠成籍制가 붕괴되면서 서울 안팎에는 상당수의 독립 자영수공업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관청이나 권문세가의 삯일보다는 상품생산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았으며, 자신의 상품 제조장을 갖고 은밀하게 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7세기 후기이래 서울을 비롯한 도시 근교지역에서는 소채류를 비롯한 상업적 작물을 경작하여 이를 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또한 서울 근교의 농민들은 미곡을 상품화하거나, 땔감을 팔아 살아가던 사람들이 많았다. 독립 수공업자나 상업적 농업에 종사하던 농민들 모두 자급자족을 위해서 보다는 시장에서의 판매를 통한 이익의 추구가 목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비록 영세한 상인들이었지만, 도시 상업계의 저변을 형성하면서 소비자층과 밀착, 시전상인의 전매특권을 잠식해 들어갔다.0974)姜萬吉,<商品經濟의 發達>(≪한국사≫13, 국사편찬위원회, 1976), 341쪽.

 난전 가운데에는 사상도고에 의한 난전이 가장 지배적이었다. 이들이 언제부터 대두하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7세기 전반기에 이르면 이들의 세력은 이미 시전 상업계를 위협할 정도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인조 17년(1639) 綿紬廛과 난전의 대립이 있었으나 난전의 저항이 거세어 시전인이나 관청에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일도 있을 정도였다.0975)≪承政院日記≫70책, 인조 17년 8월 23일.

 사상도고는 비교적 큰 규모의 자본을 가지고 매점적인 상업 활동을 벌임으로써 시전상인에 대항해 나갔다. 이들은 서울로 들어오는 상품을 도집한다든가, 지방의 상품 생산지나 장시에 직접 나가서 물품을 선대제적으로 독점하는 방식 등에 의해 상품유통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생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하는 광범한 매점망을 구축한 사상인들의 도고 행위는 결국 시전상인의 특권적 상업 행위에 막대한 타격을 주게 되었다.

 서울 시내에 들어오는 상품을 매점, 판매하고 있던 시전상인들로서는 물품 조달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는 금난전권의 성립으로 나타났다. 금난전권은 시전상인들이 가졌던 일종의 전매특권으로서, 평시서와 한성부에 廛案物種으로 등록하여 일반 상인이나 다른 시전상인들이 그들이 판매하는 물품을 팔 경우 이를 난전으로 규정, 상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권리였다. 금난전권이 성립되게 된 배경에는 정부측의 형편도 작용하였다. 양란 이후의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는 방책의 하나로 상공업 분야에서의 세원을 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 결과 비교적 규모가 큰 시전에 금난전권을 인정하고 대신 국역이라는 명목으로 종래의 시전세보다 높은 부담을 지우게 되었던 것이다.

 금난전권이 언제부터 어떠한 시전상인에게 주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초기에는 시전 가운데에서도 국역의 부담이 큰 시전, 다시 말해 육의전에게만 금난전권이 주어졌다가 그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가지 않았나 짐작된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다른 시전들도 상업적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권한을 가지기를 원했고, 정부도 금난전권을 가진 시전이 많아질수록 국역의 수입이 증가하므로 이를 계속 허가해 주고 있었다.0976)崔完基,≪조선시대 서울의 경제생활≫(서울市立大 서울학연구소, 1994), 53∼54쪽. 금난전권을 가진 시전이 점차 증가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8세기 후반 서울의 경우 시민들의 생활용품이 모두 금난전권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0977)崔完基, 위의 책, 54쪽.

 한편 난전은 반드시 비시전상인들만이 아니었다. 시전상인 내에서도 다른 시전의 물품을 판매할 경우는 난전으로 취급되었다. 床廛과 帽子廛간의 난전 분쟁이나 立廛과 綿紬廛간의 난전, 앞서 언급한 바의 여러 미곡전이나 내·외어물전간의 상업적 분쟁과 갈등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조선의 상업계는 난전의 광범한 등장과 이에 맞선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의 행사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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