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2. 상업·수공업·광업의 변모
  • 3) 공인과 공계
  • (1) 공납제의 개혁과 공인의 등장

(1) 공납제의 개혁과 공인의 등장

 조선 초기에 정비된 貢納制는 ‘任土作貢’의 원칙에 따라 각 지방의 토산물을 현물 그대로 중앙에 직납하는 것으로서 현물재정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납제는 제도와 운영 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0984)공납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田川孝三,≪李朝貢納制の硏究≫(東洋文庫, 1964).
宋正炫,<李朝의 貢物防納制>(≪歷史學硏究≫1, 1962).
金玉根,≪朝鮮後期經濟史硏究≫(瑞文堂, 1977).
金鎭鳳,<朝鮮初期의 貢物代納制>(≪史學硏究≫22, 1973).
―――,<朝鮮前期의 貢物防納에 대하여>(≪史學硏究≫26, 1975).
高錫珪,<16·17세기 貢納制 개혁의 방향>(≪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참조.
먼저 제도적인 면에서의 문제점을 보면, 貢額이 한번 정해지면 장기적으로 고정되어 있어 引納이나 別用 등 별도의 收支 마련책이 강구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연산군 시대를 거치면서 可定·引納·別例·市貿 등이 경비 조달책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橫看 이외에 別用·雜用이 상시적 행위가 되어버려 기존의 공안·횡간에 의한 예산제는 사실상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0985)高錫珪, 위의 글, 180쪽.

 더욱이 不産貢物의 分定, 즉 해당 지방에서 산출되지 않는 물품이라 하더라도 공물로 정해진 후에는 民戶가 공물 납부를 피할 수가 없었다. 이는 공물 분정의 원칙인 ‘임토작공’의 정신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防納의 길을 열어 주게 되는 근원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백성들의 피해가 대단하였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공안의 개정을 통한 不産貢物의 조정은 항시 공납제 개혁의 최대의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었다. 또한 공물 분정에 있어서 최종적인 부담자인 민호에 대한 부과규정이 명백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던 까닭에 수령이나 향리의 임의에 맡겨지는 경향이 많았다.

 공납제의 실제적 운영 면에서도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공물 상납과정에서 點退와 방납으로 표현되는 비리행위가 광범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상납물자에 대한 看品 과정에서 점퇴라는 수단을 통하여 비리행위가 벌어지고 있었고,0986)高錫珪, 위의 글, 177∼178쪽. 당대의 권력자들도 공물 수취체계를 모리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지방 수령들에게 방납을 강요하고 있었다.0987)≪明宗實錄≫권 13, 명종 7년 10월 갑진. 방납업자들 또한 各司와 결탁하여 불법적인 방납 행위를 행하고 있었다. 방납이 성행하면서 이에 관계되는 계층과 대상 공물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사대부는 물론 왕실이 관여하는 현상까지도 벌어졌다.0988)≪宣祖實錄≫권 171, 선조 37년 2월 정유. 조선초의 공납제가 안고 있던 모순과 폐단이 심화되면서 공납제는 권력자와 상인·양반지주층이 결탁하여 代納에서 형성되는 이득을 독점·분배하게 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으며,0989)李景植,<16세기 地主層의 動向>(≪歷史敎育≫19, 1976), 153∼162쪽.
高錫珪, 앞의 글, 182∼183쪽 참조.
방납의 폐단으로 빚어지는 막대한 防納價의 부담은 모두 궁극적 공물납부자인 민호의 몫이었다.

 이와 같이 공액의 고정화와 可定, 不産공물의 분정과 방납의 폐해 등으로 부각된 공납제의 모순과 폐단에 대한 개혁 작업은 16세기이래 시대적 과제로 대두하게 되었다. 공안의 개정과 방납의 근절이라는 방향에서 추구되어 온 공납제 개혁론은 17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토지소유구조의 개편, 상품화폐경제와 수공업의 발달 등 사회경제적 변동을 흡수하면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대동법의 시행은 바로 이와 같은 오랜 기간에 걸친 공납제 개혁의 제도적 구현이었다.0990)劉元東,≪韓國近代經濟史硏究≫(一志社, 1977), 67∼75쪽.
高錫珪, 위의 글, 228∼229쪽.

 한편 조선 초기에 성립된 공납제는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은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지만, 京市와 지방 장시를 중심으로 한 공물의 구매 상납이 지속되면서 이를 전업적으로 담당하는 새로운 상인층의 형성을 낳았다. 防納私主人으로 불리는 이들은 방납권을 지니고 유통망과의 접촉, 유통사정의 인지 및 일정한 자본의 축적을 통해 代納請負商人으로 성장하였다. 공물의 매매는 공납제의 실현이라는 부세운영적 측면과는 별도로 유통경제를 통한 상업구조를 형성시켰던 것이다.0991)이지원, 앞의 글, 513쪽. 이는 곧 16세기를 거치면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공물 방납이 이 시기의 사회경제적 변동과 부세 운영간의 연계적인 구조하에 형성된 산물임을 뜻하는 동시에 상업·유통경제의 발전과정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0992)이지원, 위의 글, 472∼473쪽.

 그렇기는 하지만, 방납은 任土作貢의 원칙에 위배되는 불법행위였으며, 방납권 역시 합법화된 권리는 아니었다. 방납이 성행할수록 방납을 둘러싼 분쟁은 빈번해졌고, 高價의 방납가 지불은 민호의 곤궁함을 더욱 가중시키게 되었다. 미·포의 화폐적 富도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0993)이지원, 위의 글, 513쪽. 결국 조선 정부는 대동법이라는 새로운 부세제도의 시행을 통하여 16·17세기에 전개되었던 공물 방납체계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정부의 통제하에 놓여지는 공물 청부업자, 즉 貢人이라는 상인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大同法 실시의 주요 원인이 공납제의 폐단을 막음으로써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 정부의 稅收를 증대시키려는 데에 있던 만큼, 대동법의 시행과 함께 기왕의 공물 상납형태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방납은 새로운 공물 청부제로 대체되어야만 하였다. 祭享·御貢 및 제반 經用의 조달은 京貢主人에게 給價하여, 공인으로 하여금 물품을 구매·조달케 하는 방식으로 변환되었다.0994)≪萬機要覽≫財用篇 大同作貢. 자연히 官府의 수요품 조달은 공납제 시기의 방납 대신 공인의 공물 구매활동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공인은 관으로부터 정식의 허가를 받고, 정부가 공물로 받은 대동미와 대동포·전 등을 지급 받아 관부의 수요품을 구입·조달하는 특권상인이었다. 따라서 공물 납부자인 농민과 수취자인 관부의 중간에서 특정 지역의 공물을 구입, 납부한 후 해당 지역민으로부터 높은 대가를 징수하는 불법적인 이득을 취하고 있던 공납제 시기의 방납인과는 법적인 면에서나 상인의 성격 면에서 동질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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