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2. 상업·수공업·광업의 변모
  • 4) 장시의 발달
  • (1) 장시의 형성과 확산

(1) 장시의 형성과 확산

 場市는 상인과 각 지방의 농민·수공업자 등 생산자층에 의한 상품생산과 이들 상호간의 직접적 교역이 이루어지던 농촌의 정기시장이다.1019)金大吉,≪朝鮮後期 場市硏究≫(國學資料院, 1997), 21쪽. 이하 장시에 관한 서술은 金大吉, 위의 책에 주로 의거하였다. 한편 정기시장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재하·홍순완,≪한국의 場市≫(民音社, 1992), 21∼24쪽이 참고된다. 조선 시대의 장시는 15세기 후반 전라도 지방에서 성립된 후 상업에 대한 억제책과 시전 상인의 보호 차원에서 억압되었으나, 16세기에 들어서는 각도와 읍으로 확산되어 전국적으로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중종 13년(1518) 무렵에는 방방곡곡에 장이 서지 않는 곳이 없다 할 정도였다.1020)≪中宗實錄≫권 31, 중종 13년 정월 임자. 장시는 양란을 거친 17세기 중엽 이후 수적으로 크게 증가하여 교통의 요지나 물화의 집산지 이외에 외진 산간에까지 확산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장시 개설의 확산에는 16세기에 마련되고 있던 사회경제적 발달의 여러 요인들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 시기의 조선 사회는 連作常耕 등 새로운 농법 개발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와 지주들에 의한 광범한 토지 집중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면포의 생산 증가, 공물 방납의 성행 등 유통경제가 본격적인 발달의 지평을 열고 있었다.1021)이와 같은 16세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해서는 姜萬吉,<조선왕조사에 있어서 16세기의 변화>(≪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李泰鎭, 앞의 책;李景植, 앞의 글;이지원, 앞의 글;李景植,<16世紀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韓國史硏究≫57, 1987);朴平植,<朝鮮前期의 行商과 地方交易>(≪東方學志≫77·78·79 합집, 延世大, 1993);백승철,<16세기 富商大賈의 성장과 상업활동>(≪역사와 현실≫13, 1994)의 글들이 참고된다.

 또한 대외무역이 확대되면서 사무역이 발달하게 되었고,1022)韓相權,<16세기 對中國 私貿易의 展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3). 사치품을 비롯한 다양한 상품들이 유통망에 편입되게 되었다. 지주제의 확대에 따라 농촌에서 이탈된 농민들 가운데 다수가 상공업 인구로 전화되었고, 15세기에 강화되었던 관영수공업체제 역시 장인들의 부역 동원 기피와 이탈 등에 의해 점차 민영수공업체제로 전환되어 갔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의 여러 요소들은 결국 유통경제 활성화의 촉진제가 되었고, 장시의 형성과 확산에 중요한 경제적 기반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장시가 발달하면서 이곳에서 거래되는 물품들도 다양해져갔다. 가장 일반적인 물품은 米·中米·租·太豆 등의 곡물류로서 鐵·淸蜜과 같은 생산물과 교환, 거래되었다. 또한 木·正木·苧布·木花·紬·布衫 등의 각종 직물류가 매매되었다. 아울러 牛肉·生鷄·餅·酒·乾柿 등 농가에서 부업으로 생산한 물품도 등장하게 되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해산물도 거래되었다. 이밖에도 笠·沙器·炭 등의 일용품과 鐵片·鼎·牛馬·斫刀 등 농업 생산에 필요한 물자들이 교역되고 있었다.

 한편 장시 개설이 확산되면서 장시를 생활의 근거지로 삼는 사람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농민층 분해에 따라 몰락한 농민들로서 과중한 부세와 수령의 수탈을 이기지 못해 피역하였거나 이농한 유망민들이었다. 장시는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도산한 농민들이 私家의 노비나 전호가 되는 것을 피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곳 가운데 하나가 장시였다. 흉황시 민인들이 장시로 몰려드는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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