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 군수공업의 성장과 군수광업의 발전
  • 1) 군문·영문에 의한 군수공업의 성장
  • (2) 각읍월과총약환법의 제정

(2) 각읍월과총약환법의 제정

 왜란이 종식된 이후 무기 생산체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비록 왜란이 끝나긴 하였지만 재침할 위험을 불식할 수 없었고 만주에서 흥기한 여진족의 세력도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잠시도 방어태세를 소홀히 할 수 없었고 군비 증강에 진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남에 따라 흩어졌던 농민들이 생업을 되찾게 되면서 종래의 도감제나 도회제하에 실시되던 무기 제조와 광산 채굴도 점차 새로운 체제를 모색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었다.

 왜란 중에는 훈련도감이 자체적으로 군사를 조련하고 무기를 공급하는 일 뿐 아니라 지방의 속오군 양성을 주관하였고 동시에 각 처의 무기 제조와 광산 개발도 주도해 왔던 셈이다. 그러나 왜란 중에 權設衙門으로 설치된 훈련도감이 왜란 후에는 본래의 都監的 성격에서 벗어나 중앙의 유일한 상설 군문으로 자리를 굳혀 무기 제조나 광산 개발도 오직 자체 내의 수용을 위해서 추진하게 되었다. 따라서 왜란 중에는 유명무실했던 軍器寺가 본래의 업무를 되찾게 되었고 동시에 속오군의 무기 조달도 관장하게 되었다.

 군기시는 조선 초기부터 무기제조 업무를 담당한 관서여서 무기제조에 필요한 각종 원료를 공납 형태로 수취하였으며, 이 무렵 貢鐵만도 10,000여 근을 징수하고 있었다.1071)≪火器都監儀軌≫, 광해군 7년 7월 26일. 이처럼 군기시는 각 읍으로부터 공물로서 수취한 생산 원료로 각종의 무기를 제조하였고 이를 각 읍으로 분송하였다. 그러나 화약의 원료인 염초의 생산은 당시 군기시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생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정부는 納硝免役法1072)≪宣祖實錄≫ 권 134, 선조 34년 2월 정축.을 반포하는 한편, 명나라의 염초를 수입하였다.1073)≪宣祖實錄≫ 권 134, 선조 34년 2월 계사 및 권 135, 선조 34년 3월 병진. 이 때문에 선조 36년(1603) 3월에는 군기시의 副正 李止孝가 각 읍이 사용할 염초는 자체 생산토록 하는 이른바「各邑月課煮哨法」을 건의하였던 것이다.1074)≪宣祖實錄≫ 권 160, 선조 36년 3월 정묘. 이 각읍월과자초법에 규정한 각 읍의 月定 생산액은 대읍 40근, 중읍 30근, 소읍 15근이었다.1075)≪宣祖實錄≫ 권 164, 선조 36년 7월 정축. 이때의 月課法은 각 鎭의 弓箭 생산에도 적용되어「各鎭月課弓箭法」이 적용되었다.1076)위와 같음.

 이처럼 선조 36년에 각읍월과자초법과 각진월과궁전법 등이 실시되면서 종래 왜란 중에 실시되었던 도회제하의 생산 형태는 무너져 갔다. 정부가 처음에 각읍월과자초법을 택한 이유는 군기시의 무기 생산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안, 곧 정부의 재정적 부담을 덜 수 있는 대안을 찾는 데 있었다. 결국 각읍월과자초법의 실시를 통해서 정부는 중앙의 재정적인 부담을 각 읍으로 전가하였으며 동시에 각 도의 감·병·수영도 도회제를 통한 자체부담을 각 읍으로 전가할 수 있었다.

 정부가 각 읍으로 하여금 염초를 자체 생산토록 한 것은 亂後 5∼6년이 경과하여 농민들이 비로소 옛 터전을 되찾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 각읍이 염초를 자체 생산하지 않더라도 명의 요동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얼마든지 수입할 수 있었던 사정을 고려한 조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각읍월과자초법이 실시되기 전인 선조 34년에 이미 함경도가 염초 생산 실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명나라의 염초를 은으로 구입할 정도였고1077)≪宣祖實錄≫ 권 135, 선조 34년 3월 병진. 평안도에서는 納硝免役制에 편승하여 은 1냥 당 염초 20근씩의 싼값으로 요동에서 수입해 왔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1078)≪宣祖實錄≫ 권 134, 선조 34년 2월 정축.

 이처럼 요동의 염초를 수입하는 행위는 각읍월과자초법이 실시된 뒤에도 여전하였고 특히 평안·황해도 등 요동과의 거래가 용이한 지역의 각 읍에서는 연초의 자체 생산을 중지하고 수입품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염초 1근 價가 면포 2필에 달했었다.1079)≪宣祖實錄≫ 권 164, 선조 36년 7월 정축. 결국 각읍월과자초법은 각 읍에서 자체 생산토록 규정하였지만 정부로서는 그것을 각 읍에서 자체 생산하든 외부에서 구입하든 정부가 재정적 부담을 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재를 가할 필요가 없었다. 이처럼 각읍월과제는 정부의 재정적 부담을 각 읍에 전가한 조처에 불과한 것이어서 전술한 바와 같이 동년에는 弓箭도 각 鎭으로 하여금 월과제하에서 생산토록 강요한 것이다.

 각읍월과자초법과 각진월과궁전법이 실시된 뒤 광해군대에는1080)柳承宙,<朝鮮後期「都監」制下의 官營手工業에 관한 一硏究>(≪震檀學報≫ 69, 1990), 71쪽. 조총과 화약 및 연환마저 각 읍에서 자체 조달토록 하기 위한 各邑月課軍器法이 제정되었다. 월과군기의 각 읍 배정은 기준을 읍의 대소에 두지 않고 大府·都護府·府·郡·縣 등 관위의 차등에 두고 있었다.1081)柳馨遠,≪磻溪隨錄≫ 권 21, 兵制.

邑等\種別 鳥銃(柄) 火藥(斤) 鉛丸(箇) 年總價米(石)
大府·都護府 24 96 4,800 160
18 72 3,600 120
12 48 2,400 80
6 24 1,200 40

<표 1>각 읍의 연간 총약환 배정 정액표

 정부는 각 읍에 총약환의 월별 생산정액을 배정하는 동시에 총약환의 법정가도 일일이 규정하였다. 조총은 1柄에 米 5斛(1斛=10斗), 화약은 1斤에 미 1곡, 연환은 100箇에 미 5두였다. 이러한 총약환의 法定價는 당시 국내의 시가를 기준으로 한 듯하다. 그것은 각 읍에서 총약환을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조총의 경우 중앙의 훈련도감과 군기시, 그리고 왜란 중 도회제하의 조총 생산이 실시된 황해·충청도의 炭鐵産地를 제외한다면 당시로서는 고도의 기술을 요했던 조총을 각 읍에서 자체 생산할 수 없었으며, 화약의 경우 염초는 생산이 가능하지만 유황은 구입할 수밖에 없었고, 연환도 연광이 관내에 없는 한 구입 제작할 수밖에 없는 제품들이었다. 결국 총약환의 법정가는 정부가 당시의 시가를 기준으로 책정한 것이었다.

 이때 정부가 각 읍을 位差에 따라 차등 배정한 총약환수나 法定價米의 년간 총액이 얼마나 되었던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참고로 중종 25년(1530)에 증보한≪東國輿地勝覽≫ 중의 각 읍을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조총이 3,510병에 법정가미는 11,700석이며, 화약은 14,040근에 9,360석, 연환은 70,200개에 2,340석으로 年總月課米는 23,400석에 달하였다.1082)柳馨遠,≪磻溪隨錄≫에서는 大府·都護府는 大府·大都護府로 파악하였고, 牧의 경우는 大都護府使와 牧使가 다 같이 正三品이기 때문에 大府·都護府의 기준치로 환산하였다. 각읍월과군기법상의 총약환 법정가가 전국적으로 년간 23,400석에 달하지만 읍별로는 大府·도호부가 160석, 부가 120석, 군이 80석, 현이 40석이었다. 이 법정가는 총약환을 구입할 때 소요되는 법정가액일 뿐이며 자체 생산시에 소요되는 자금 액수는 아니었다. 만약 각 읍에서 총약환을 자체 생산한다면 工匠의 급료나 원료 구입비로서의 자금은 필요하지만 그 밖의 연료 조달이나 원료의 운반 및 제조과정의 잡역은 농민들의 부역노동에 의존함으로써 법정가액의 일부만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각 읍의 총약환 구입비이거나 제조비이거나 그것에 필요한 자금 부담을 정부가 농민에게 지우지 않고 각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자체 경비에서 마련토록 한 것1083)≪承政院日記≫ 1책, 인조 원년 4월 13일.은 총약환을 구입하면 수령의 부담이 클 것이므로 자연히 자체 생산을 도모할 것이기 때문이다. 곧 각읍월과군기법의 일차적인 목적은 각 읍의 자체 생산을 의무화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염초 외에는 유황이나 연철 또는 지역에 따라서는 조총까지도 구입하여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때 각읍월과군기법의 시행은 鐵鑛·硫黃鑛·鉛鑛 개발을 촉진하였고 銃·藥·丸의 상품화를 불가피하게 하였으므로 조선 후기 광공업 발전사상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고 하겠다.

 그런데 각읍월과군기법이 실시된 광해군 말년에는 이미 각 읍의 수령들이 총약환에 필요한 비용을 관내의 농민들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수령들은 농민들의 전결수에 따라 일정량을 징수하여 그것에 충당한 것이다.1084)≪備邊司謄錄≫ 13책, 인조 27년 3월 20일. 이에 각 읍의 농민들은 염초 등의 製造役 뿐 아니라 제조비 또는 구입비까지도 부담해야 하는 이중적인 세역을 지게 된 셈이었다. 따라서 부역농민들의 세역을 거부하는 피역 저항이 심화되었고 정부로서도 이를 강행할 경우 민심을 수습하기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인조가 즉위한 뒤에 정부는 각 읍의 月課軍器役을 4년간 중지키로 하였고, 또 인조 4년(1626)에 재개하려 하였으나 사헌부에서 民力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5년간 더 정지토록 요청함에 따라 다시 3년간을 정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1085)≪仁祖實錄≫ 권 14, 인조 4년 11월 갑오. 곧 인조초의 7년 동안은 각 읍의 월과군기법을 실시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인조 5년의 정묘호란과 14년의 병자호란 등 전란의 와중에서는 더욱 월과군기법을 시행하기가 어려웠으며 병자호란 이후에 이르러서야 겨우 재개할 수 있었다.1086)≪備邊司謄錄≫ 31책, 숙종 원년 11월 19일 및 40책, 숙종 14년 4월 4일.

 어떻든 전술한 바와 같이 광해군대에 각읍월과군기법이 제정되면서 각 읍에서는 월과군기가를 수령이 자체 경비로 마련하거나 농민들로부터 布를 징수하여 月定量의 軍器를 충당하여 왔다. 각읍월과군기법의 총약환 법정가가 당시의 시가를 기준으로 하여 책정되었지만, 실제의 생산가에 비하여 얼마나 높게 책정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17세기 중엽의 경우 대략 생산가의 2, 3배에 달했던 것으로 보아 17세기초의 책정시에도 2배 가까이 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결국 당시의 月課 鳥銃이나 화약 및 연환가는 상당한 이윤이 보장되는 상품이었고 전국 각 읍을 상대로 하는 넓은 판로를 갖는 物種이었다. 이 때문에 각읍월과군기법이 제정 실시된 후 서울의 富民들은 점차 총약환의 무기 제조장을 개설 운영하게 되었다. 이처럼 서울에서 부민들에 의한 무기 제조업이 성장함에 따라 지방에도 무기 제조에 필요한 원료를 생산 판매하는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동시에 서울과 지방으로 왕래하면서 제품이나 원료를 매매하는 상인들도 있었다.1087)≪承政院日記≫ 302책, 숙종 10년 2월 13일.
≪備邊司謄錄≫ 38책, 숙종 10년 2월 14일.
곧 각 읍의 수령들은 서울의 부민들이 생산한 총약환을 구입하여 월과군기에 충당하고 있었던 것이다.1088)≪備邊司謄錄≫ 13책, 인조 27년 3월 20일.

 결국 각읍월과군기법은 시행되는 즉시 守令 부담·자체 생산이란 본래의 입법 취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에는 각 읍 수령들이 월과군기가를 전적으로 농민에게 부과하였으며 자체 생산을 기피하고 서울의 민간 제조업자들로부터 구입 충당하는 실정이었다.1089)≪承政院日記≫ 302책, 숙종 10년 2월 13일.
≪備邊司謄錄≫ 38책, 숙종 10년 2월 14일.
이처럼 각읍월과군기법은 비록 월과군기가가 대동미에 포함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수령들이 민결에서 염출하였고 민간 제조업자들이 월과군기가를 받고 정기적으로 총약환을 제조 납품하는 등 사실상 공물의 방납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하에서 정부는 효종 3년(1652)에 이르러 충청도에 대동법을 적용하면서부터 관내 각 읍의 월과군기가를 대동미에 산입하는 이른바 各邑月課銃藥丸法을 제정 실시하였다. 정부가 이때 각읍월과총약환법을 제정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상정할 수 있다. 첫째는 종래의 각읍월과군기법이 각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월과군기가를 부담토록 규정하였지만 점차 民結에 부과함으로써 농민들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아 왔기 때문에1090)≪備邊司謄錄≫ 13책, 인조 27년 3월 20일. 정부는 수령들이 비합법적으로 월과군기가를 민결에 부과했던 행위를 합법화시킬 명분을 마련하기 위한 한 조처로서 취해졌으리라 여겨진다. 둘째 각읍월과군기법은 각 읍의 월과군기수를 官位의 차등에 기준하여 일률적으로 배정했기 때문에 민호와 전결이 부족한 읍의 농민 부담은 상대적으로 가중되었을 것이다. 또 수령이 월과가를 전결에 부과했다고 하지만 당시 수령으로서는 양반이나 토호의 전결에 균등히 부과했을리가 없을 것이므로 그에 따라 빚어졌을 농민들의 불만도 함께 해소하는 방안으로 모색되었을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17세기 중엽인 효종·현종·숙종초에 걸쳐 대동법이 실시된 도는 충청도와 전라도 및 경상도 등이었다. 효종 3년 충청도에, 8년에 전라도의 沿海邑에, 그리고 현종 3년(1622)에는 전라도의 山郡에, 숙종 3년(1677)에는 경상도에 각각 대동법이 적용되었다.1091)≪新補受敎輯錄≫, 史典 京官職 宣惠廳. 그러나 대동법이 적용된 시기와 각읍월과총약환가가 대동미에 計上된 시기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것은 각읍월과총약환가를 대동미에 포함시켰어도 그것을 지출하는 데 필요한 시행세칙인「事目」이 완성되기까지 시일이 걸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효종 3년(1652)에 대동법이 적용된 충청도의 사목은 동왕 5년 3월에 재가되었고,1092)≪湖西大同事目≫, 順治 11년 3월(효종 5년 갑오). 효종 8년 연해 읍과 현종 3년 산군에 대동법이 적용된 전라도의 사목은 현종 4년에 재가되었으며,1093)≪全南道大同事目≫ 康熙 2년 3월(현종 4년 계묘 계하). 숙종 3년에 대동법이 적용된 경상도의 사목은 동왕 7년에 재가를 받았다.1094)≪嶺南廳事例目錄≫ 外官會滅, 各邑月課外邑措置 今廢.

 이때 각 읍의 월과총약환가를 대동미에 포함시킨 三南이 경우 각읍월과총약환법은 종래의 각읍월과군기법과는 각 읍의 分等 기준부터 확연히 달랐다. 각읍월과군기법에서는 분등 기준을 大府·都護府·府·郡·縣 등 관위의 차등에 두고 있었지만 삼남의 각읍월과총약환법에서는 전결수를 기준으로 大·中·小·殘邑 또는 대·중·중소·소·잔읍 등으로 나누어 충청·전라도는 대·중·소·잔읍으로 분등하였고, 경상도는 대·중·중소·소·잔읍으로 분등하였다.1095)≪湖西大同事目≫, 順治 11년 3월(효종 5년 갑오).
≪全南道大同事目≫ 康熙 2년 3월(현종 4년 계묘 계하).
≪嶺南廳事例目錄≫ 外官會滅, 各邑月課外邑措置 今廢.
이처럼 전결수를 기준으로 월과총약환을 배정함으로써 각읍월과군기법에서의 불합리한 배정 비율을 크게 개선하였다. 그리고 다음<표 2>에 나타난 충청·전라도의 각 읍에 배정된 年總 월과총약환수를<표 1>의 각읍월과군기수에 비교해 보아도 이미 어느 정도 실정에 맞도록 감액 책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일일이 예시하지 않더라도<표 1>에 최소 읍인 현에 배정한 월과군기수가<표 2>에서는 소읍의 그것과 일치하고<표 2>에는 다시 잔읍을 설정하여 극소량을 부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縣 중에서도 민호나 민결이 적은 현은 잔읍으로 분등하고 월과총약환수를 보다 적게 배정한 것이니 종래 현이면 일률적으로 월과군기수를 배정한 데 비해 훨씬 합리적인 것이다.

  鳥銃(柄) 火藥(斤) 鉛丸(箇)
大 邑 24 96 4,800
中 邑 12 48 2,400
小 邑 6 24 1,200
殘 邑 2 8 400

<표 2>충청·전라도의 연총월과총약환수

 충청·전라도보다 늦게 대동법이 적용된 경상도의 경우는 각 읍의 대소 분등과 월과액의 차등 배정이 더욱 세분화되고 있었다. 각 읍을 대·중·중소·소·잔읍으로 분등하여 대읍은 매월 조총 2柄·화약 8斤·연환 400箇를, 또 매 3朔마다 조총 4병·화약 15근·연환 750개를 각각 마련토록 배정하였으며, 중읍은 조총 1병·화약 4근·연환 200개를, 중소읍은 매 3삭에 조총 3병·화약 2근·연환 450개를, 소읍은 매 2삭에, 잔읍은 매 4삭마다 각각 조총 2병·화약 4근·연환 200개를 마련토록 규정하였다.1096)≪嶺南廳事例目錄≫ 外官會滅, 各邑月課外邑措置 今廢.

 이처럼 삼남의 각읍월과총약환법이 제정되어 전결수에 기준한 월과액이 책정됨으로써 비로소 각 읍의 읍세에 준하는 세역 부과가 이루어졌고 또 종래의 각읍월과군기법에 비하면 배정액도 전반적으로 차감 책정되었다.1097)일례로 忠淸道의 月課鳥銃量만 비교해 보아도 종전에는 年間 468柄(米 1,560石)이 할당된 데 비하여 대동법 실시 이후에는 불과 398柄(米 1,326石 10斗)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총약환의 법정가는 종래와 다름없이 조총은 1병에 米 3석 5두였고, 화약은 1근에 미 10두, 연환은 100개에 미 5두였다. 이중 연환가는 숙종 7년에 충청병사의 건의로 100개에 5두를 4두로 인하하고 1두를 감한 대신 연환의 배정량을 늘렸다.1098)≪嶺南廳事例目錄≫. 따라서 각 읍은 연환의 경우 매년 대읍은 1,344개, 중읍은 672개, 소읍은 332개, 잔읍은 112개가 각각 증가 배정된 셈이다.1099)≪湖南廳事例≫, 月課銃藥丸. 숙종 7년 당시의 三南月課銃藥丸 배정액과 그것의 價米數는 다음<표 3>과 같다.1100)≪湖西大同事目≫, 順治 11년 3월(효종 5년 갑오).
≪全南道大同事目≫ 康熙 2년 3월(현종 4년 계묘 계하).
≪嶺南廳事例目錄≫ 外官會滅, 各邑月課外邑措置 今廢.
필자가 작성한 표의 통계는 전적으로 各大同事目에 의거한 것이나 湖西와 湖南의 약환가가 일부의 다른 기록과 약간의 차이가 있어 부언해 두려 한다. 湖西銃藥丸價는 忠淸道大同事目의 기록과≪備邊司謄錄≫ 18책, 효종 7년 4월 13일조의 기록이 일치한다. 그런데도 火藥과 鉛丸의 합계가≪萬機要覽≫ 賑恤廳事例에는 1,346석 9두 8승이라 기록되어있고,≪六曹條例≫ 戶典 宣惠廳條에 또한 1,346석으로 기재되어 있어<표 3>의 1,326석 10두와는 약 20석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湖南藥丸價도≪備邊司謄錄≫ 28책, 현종 10년 정월 3일조에 1,680석이라 기록되어 全南道事目과 일치되지만≪賑恤廳事例≫나≪六典條例≫ 戶典 宣惠廳條에는 1,688석으로 기재되어 있어 8석의 차이가 난다.≪賑恤廳事例≫나≪六典條例≫는 훨씬 뒤에 쓰여진 기록이고 그간에 月課表의 변동이 있었는지, 아니면 기록상의 차이가 발생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필자가 集計하는 과정에서 느낀 바인데 우연인지는 혹 모르겠으나 湖南과 湖西의 경우 조총가가 반드시 약환가의 합계와 일치되고 있었다. 이것은 당초 月課價를 책정할 때 계산상의 편의를 얻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나 싶다. 이것이 사실이라면<표 3>은 정확한 것이다.

  忠淸道 全羅道 慶尙道
鳥銃 鳥銃數 389柄 504柄 623柄 1,525柄
月課米 1,326石 10斗 1,680石 2,076石 10斗 5,083石 5斗
火藥 火藥量 1,592斤 2,016斤 2,436斤 6,044斤
月課米 1,061石 5斗 1,344石 1,624石 4,029石 5斗
鉛丸 鉛丸數 99,500箇 126,000箇 231,750箇 457,250箇
月課米 265石 5斗 366石 618石 1,219石 5斗
道別月課米 2,653石 5斗 3,360石 4,318石 10斗 10,332石

<표 3>삼남월과총약환수 및 가미량

 삼남의 각 읍에 매년 배정한 월과조총은 1,525병에 월과미가 5,083석 5두였고, 화약은 6,044근에 4,029석 5두며, 연환은 457,250개에 1,219석 5두로써 총월과미는 10,332석에 달하였다. 이처럼 삼남 각 읍의 월과미를 효종 5년(1654)에는 충청도, 현종 4년(1663)에는 전라도, 숙종 7년(1681)에는 경상도의 대동미에 각각 포함시킴으로써 조총·화약·연환이 새로운 물종의 공물로 확정되었다.

 충청·전라·경상도를 제외한 다른 도의 경우, 경기도는 일찍이 정부가 인조 2년(1624)에 摠戎廳을, 4년에 守禦廳을 설치하면서 관내 각 읍의 속오군을 양청에 분속시킴에 따라 자연히 각읍월과군기법은 혁파되고 소속 군문에서 제조 분급케 되었으며,1101)≪備邊司謄錄≫ 31책, 숙종 원년 정월 19일·40책, 숙종 12년 9월 20일 및 42책, 숙종 14년 4월 4일. 그 밖의 황해·강원·평안·함경도 등은 확인할 수 없으나 종래의 각읍월과군기법이 준용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종래의 각읍월과군기법에서는 월과가의 부담이 수령에게 지워져 있었고 농민들의 전결에 기초한 收布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하였지만, 삼남의 각읍월과총약환법이 제정 실시된 뒤부터는 그것이 정당화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삼남의 각읍월과총약환법과는 월과가의 수취형태가 달랐지만 일종의 공물로서의 성격을 띤 것이기 때문에1102)≪備邊司謄錄≫ 45책, 숙종 17년 12월 19일. 정부는 숙종 34년에 황해도·강원도의 월과가도 詳定價에 포함시켰다.1103)≪備邊司謄錄≫ 18책, 효종 7년 4월 15일 및 45책, 숙종 17년 12월 19일.
≪六典條例≫ 兵典 軍器寺.
황해도의 각읍월과총약환가는 大小米 각 420석 13두 9승 8합 2작이었고1104)≪江原廳事例≫, 附海西公剩.
≪海西廳事例目錄≫, ‘肅宗三十四年戊子創設 初付於湖西廳矣 英廟三十四年戊寅 移屬江原廳’.
강원도의 각읍월과총약환가는 大米 24석, 田米 8석, 錢 982량 9전 6분이었다.1105)≪江原廳事例≫, 詳定恒式會減, ‘有逐年會減者 有間年上下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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