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 군수공업의 성장과 군수광업의 발전
  • 1) 군문·영문에 의한 군수공업의 성장
  • (3) 군문·영문의 무기제조와 월과총약환의 방납

(3) 군문·영문의 무기제조와 월과총약환의 방납

 광해군대에 각읍월과군기법이 시행된 뒤 각 읍이 자체적으로 무기를 비축하고 관내 속오군의 총약환을 조달함으로써 각 도의 감·병·수영에서는 도회제하의 생산체제에서 벗어나 영내의 비축 무기와 군사의 상용 무기만을 자체 조달하는 소규모의 제조장을 운영하게 되었고1106)≪備邊司謄錄≫ 45책, 숙종 17년 12월 19일. 또 지방군의 무기조달에 상당한 부담을 지고 있던 軍器寺에서도 대량 생산이 요구되지 않았다.1107)≪宣祖實錄≫ 권 160, 선조 36년 3월 정묘. 군기시의 무기제조 기능은 왜란중 훈련도감의 도감제 생산체제에 흡수되었었고 광해군 연간에는 다시 서울에 개설되었던 각종 도감의 종속적 기능을 수행할 따름이었다. 이 당시에 정부는 황폐된 도성을 복구하기 위하여 宗廟宮闕營造都監·書籍校印都監·繕修都監·欽敬閣建設都監·祭樂器製造都監 등을 개설하는 한편 무기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火器都監·軍器都監 등도 개설 운영하였다. 곧 군기시의 무기제조는 각 읍으로부터 공물로 수취하던 철물에 의존해 왔었는데 화기도감 등이 개설되면서부터 그것이 모두 도감으로 흡수되었고,1108)≪火器都監儀軌≫, 광해군 7년 7월 26일. 이어 경기·경상·평안·함경도로부터 수취하던 공물가 마저 모두 삭감되었으므로1109)≪承政院日記≫ 414책, 숙종 22년 10월 15일. 이후 군기시의 기능은 유사시에 대비할 비축 무기를 보관하는 업무와 매년 정기적으로 왕실과 청나라에 封進하는 무기 등 극소수의 정교한 제품을 생산하는 한산한 기관으로 전락하였다.1110)≪承政院日記≫ 564책, 경종 4년 정월 21일.

 한편, 인조가 즉위한 뒤에는 내란의 공포와 외침의 위협이 증가하여 정부는 훈련도감에만 의존할 수 없었으므로 서울의 외각 수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인조 2년(1624)에는 摠戎廳을, 4년에는 守禦廳을 설치하였다. 총융청은 水原·南陽·通津·坡州·長湍 등 5개 營의 속오군을, 수어청은 廣州·陽州·竹山·原州 등 4개 영의 속오군을 각각 통할토록 하였다.1111)≪顯宗改修實錄≫ 권 10, 현종 4년 11월 무인. 그러나 인조 1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은 임란 중에 편성된 속오군 체제가 지닌 전략·전술상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왜란은 장기적인 전면전이었으나 병자호란은 불과 10여일 만에 서울이 함락된 단기적인 국지전이었다. 전면전에 대비하여 편성한 속오군의 동원 체제가 단기간에 서울을 급습했던 국지전에는 별반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정부는 서울의 수비를 강화시켜야만 하였고 동시에 북벌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정예 부대를 서울에 배치시켜야만 하였다. 효종 3년(1652)에는 어영청의 正軍을, 현종 12년(1671)에는 訓鍊別隊를, 숙종 8년에는 禁衛營의 정군을 각각 편성하였다. 이들 정군은 모두 각 읍의 속오군 중에서 富實하고 강건한 자들을 차출한 것이며 番次에 따라 교대로 서울에 올라와 근무하던 番上 정군들이었다. 훈련도감의 군사들에 이어 이들 정군에게도 資裝과 糧餉을 조달키 위해 給保法이 실시되었다.1112)≪顯宗改修實錄≫ 권 10, 현종 4년 11월 무인.
≪萬機要覽≫ 軍政篇 3, 御衛營.
따라서 군문의 戶·保數인 정군과 保人數는 엄청나게 불어났다. 곧 훈련도감은 馬·步兵 5,200여 명에 馬兵 714명이었고 평안·함경도를 제외한 6도의 砲保·餉保가 44,000여 명이었으며, 어영청은 標下軍·別破陣이 1,800여명에 鄕正軍이 16,700여 명이었고, 6도의 米布保人數는 50,000여 명이었다.1113)李瀷,≪星湖僿說≫ 上, 軍兵保.
≪增補文獻備考≫ 121책, 兵考 13, 總論軍制.
금위영도 標下馬兵 726명에 향정군이 16,300여 명이었고, 향정군의 보인이 49,000여 명1114)≪續大典≫ 兵曹 番上.이었는데, 이들 삼군문의 총 정군은 40,726명이며, 보인은 143,000여 명이었던 셈이다. 그 중 어영청과 금위영의 정군수는 훈련도감의 정군수에 비하면 거의 3배에 달하였다.

 어떻든 훈련도감을 위시하여 17세기 초·중엽에 설치된 이들 총융청이나 수어청·어영청·금위영 등도 정부 예산상의 재정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정군과 보인만을 확보하였으므로 각 군문에서는 이들에게 지급할 각종 무기를 자체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처지는 각 도의 감영·병영·수영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들 각 영은 나름대로 관내에 수탈 대상으로서의 농민과 토지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서울의 각 군문과는 사정이 달랐다. 그런데 서울의 5군문 중에서도 총융청과 수어청은 경기도내 각 읍의 속오군을 장악함으로써 감영·병영·수영과 유사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1115)≪增補文獻備考≫ 121책, 兵考 13, 總論軍制. 따라서 영내 군사의 무기 조달에 급급했던 군문은 역시 훈련도감과 어영청 및 금위영 등이었다.

 효종·숙종 연간에 훈련도감의 군사수보다 각기 3배씩에 달하는 어영청과 금위영을 설치하면서도 정부가 무기 제조비를 별도로 책정하지 않았던 것은 삼남의 각읍월과총약환가를 대동미에 포함시킨 사실과 전연 무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효종 3년에 어영청의 설립과 동시에 충청도에 대동법이 실시되었고, 5년에 충청도의 각읍월과총약환가가 대동미에 산입되는 즉시 어영청은 훈련도감과 더불어 충청도의 각읍월과총약환을 방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당시 각읍월과총약환의 貢價는 생산비에 비해 2배 이상에 달하는 액수였으므로1116)≪承政院日記≫ 309책, 숙종 11년 6월 3일·497책, 숙종 42년 8월 2일 및 552책, 경종 3년 3월 6일.
≪備邊司謄錄≫ 39책, 숙종 11년 6월 4일·45책, 숙종 17년 12월 19일·69책, 숙종 42년 8월 3일·83책, 영조 4년 2월 9일 및 127책, 영조 30년 12월 10일.
효종 5년(1654)에 훈련도감·어영청 양국이 충청도의 각읍월과총약환가 2,653석 5두를 선혜청으로부터 반분해 가지더라도 최소한 각기 700여 석 이상의 餘分米를 갖게된 셈이었고 이 여분미로써 자체내의 필요한 무기 생산비로 충당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훈련도감과 어영청은 다시 현종 7년(1666)에 전라도의 월과총약환까지 방납하게 되었다.1117)≪湖南廳事例≫. 이처럼 훈련도감과 어영청이 충청·전라도의 각읍월과총약환의 방납을 통하여 엄청난 소득을 얻게 되자 다른 군아문에서도 욕심내게 되었다. 현종 11년에 정부는 충청·전라의 각읍월과조총가를 군기시와 수어청에도 일부를 분배하고 있었다. 양도의 월과조총 908柄(價米 3,026석) 중에서 훈련도감에 300병(1,000석), 군기시에 200병(666석 10두), 수어청에 108병(360석)을 각각 분급한 것이다.1118)≪備邊司謄錄≫ 29책, 현종 11년 4월 17일.

 한편, 숙종 7년(1681)에는 경상도의 각읍월과총약환가가 대동미에 포함되었고1119)≪嶺南廳事例≫. 8년에는 禁衛營이 설치되었다. 금위영이 설치되면서 삼남의 각읍월과총약환은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의 삼군문에서 방납하게 되었다.1120)≪備邊司謄錄≫ 39책, 숙종 11년 3월 22일. 그러나 숙종 10년에는 삼남의 각읍월과총약환을 江華府가 관내 4,000명 군사의 무기를 마련할 목적으로 전액 방납하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금위영도 강화부 예에 따라 삼남의 각읍월과총약환을 수년간 독점 방납토록 요청하여 논란을 거듭한 끝에 숙종 12년부터 삼군문이 균분 방납토록 결정되었다.1121)≪備邊司謄錄≫ 39책, 숙종 11년 3월 28일.

 이처럼 삼군문은 종래 각읍월과군기법하에서 서울의 富民들이 방납해 왔던 전국 각 읍의 월과군기 중 삼남의 각읍월과총약환 방납권을 모두 빼앗은 셈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대동법이 적용되지 않았던 다른 도에서도 월과군기가와 생산가간의 엄청난 차액을 수취할 목적으로 당해 도의 감영에서 관내 각 읍의 월과군기를 방납하기 시작하였다. 일례로 황해도와 평안도의 경우만 하더라도 각 읍의 년간 月課價가 매우 높이 책정되어 있어 1년분의 월과가로도 2년분의 월과군기를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감영에서는 값이 후한 것을 탐내어 각 읍의 월과군기를 모두 영문에서 방납하였다.1122)≪備邊司謄錄≫ 45책, 숙종 17년 12월 19일. 이처럼 서울의 삼군문과 각 도의 감영들은 종래 민간 제조업자들이 장악했던 각읍월과군기나 각읍월과총약환의 방납권을 탈취함으로써 영내 군사들의 무기를 자체 조달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마련한 셈이지만 한편으로는 각 읍의 월과군기를 생산할 수 있을 만큼 工匠이나 시설 및 원료나 연료 등을 구비해야 하는 부담도 컸다. 우선 당시 서울의 삼군문에서 균분 방납한 삼남의 각읍월과총약환 중 각 군문에 할당된 양만해도 상당량에 달하기 때문이다.<표 3>에서 볼 수 있듯이 조총이 1,525병(5,083석 5두), 화약이 6,044근(4,029석 5두), 연환이 457,250개(1,219석 5두)였다. 그러나 이 중 연환은 숙종 12년부터 常平廳에 이관되었으므로 조총과 화약만으로 보면 각 군문은 대략 조총 508병(1,675석)·화약 2,015근(1,343석)을 매년 생산해야 하는 셈이었고 거기에다 군문소속 군사의 조총·화약·연환도 제조해야 하였다.

 삼군문 중 가장 정군의 수가 적었던 훈련도감의 경우만 하여도 조총과 環刀를 매년 각각 300병씩 제조 또는 개조하여 군사들에게 지급토록 되어 있었다.1123)≪萬機要覽≫ 軍政篇 2, 訓鍊都監 財用 鳥銃色. 화약과 연환수는 기록되지 않았으나<표 1>의 조총·화약·연환 비율이 1병:4근:200개란 사실을 고려할 때 매년 조총 300병을 新造한다면 화약 1,200근과 연환 60,000개를 제조해야 하였다. 따라서 삼남의 各邑月課銃藥과 합치면 년간 조총 808병과 화약 3,215근을 제조하고 그 밖에 자체 조달을 위한 연환 60,000개와 환도 300병을 생산해야 하는 셈이었다.

 이상과 같이 17세기의 각 軍·營門에서는 자체 내의 수용 무기뿐 아니라 각 읍의 월과총약환까지 방납함으로써 매년 상당량의 무기를 정기적으로 제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내에는 대규모의 제조장을 설치하였고 수백명의 工匠과 助役軍을 모취하였으며 단기간에 우수한 제품을 대량 생산하기 위하여 공정을 세분화한 분업적 협업형태의 생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군문·영문의 무기생산 규모가 커짐에 따라 그것에 소요되는 제조원료였던 鐵·硫黃·鉛 등의 광물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각 군문·영문에서는 자체 소유의 광산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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