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4. 금속화폐제도의 시행
  • 2) 금속화폐의 논의와 주조
  • (1) 인조대의 주전론과 동전 주조

(1) 인조대의 주전론과 동전 주조

 선조대에 실현을 보지 못한 주전 논의는 인조대에 이르러 다시 대두되었다. 선조대의 주전 논의가 명군 楊鎬에 의해 비로소 제기되었듯이 인조대의 주전 논의는 당시 椵島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毛文龍에 의하여 직접·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즉 인조 원년(1623) 5월에 호조판서 李曙는 국왕에게 중국 화폐인 大明通寶를 수입함과 동시에 私鑄錢을 장려해 화폐를 널리 통용시키자고 건의한 바 있는데1237)≪仁祖實錄≫ 권 2, 인조 원년 5월 병신. 이는 당시의 명장 모문룡이 조정에 대해 은 3만냥을 내어놓고 양곡과 교역할 것을 독촉한 데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모문룡이 직접적으로도 조정에 대하여 동전의 주조 통용을 요청하였음을 알 수 있다.1238)≪仁祖實錄≫ 권 7, 인조 2년 11월 신미.
≪仁祖實錄≫ 권 8, 인조 3년 3월 기유.

 이렇게 인조대의 동전 주조 통용 문제가 외부에 의하여 제기되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궁핍한 국가 재정의 타개가 주요 이유였다. 즉, 인조 3년(1625) 10월에 호조판서 金藎國은 궁핍한 국가 재정을 보완하고 민생을 돕기 위해 동전 유통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건의하였다.1239)≪仁祖實錄≫ 권 10, 인조 3년 10월 임인. 호조에서도 동년 11월에 仁慶宮에 鑄錢廳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여 마침내 주전사업을 착수하기에 이르렀다.1240)元裕漢,<官僚學者 金藎國의 貨幣經濟論>(≪車文燮敎授華甲紀念論叢 朝鮮時代史硏究≫, 1992), 238∼242쪽. 그러나 당시에는 匠人의 수가 적고 기술이 미숙한데다가 주전 원료인 동이 부족한 형편이었으므로 인조 4년 6월에 이르기까지 겨우 600관의 동전을 주조하는 데 불과하였다.1241)≪仁祖實錄≫ 권 13, 인조 4년 윤6월 무오.

 한편, 주조된 동전의 통용을 장려하기 위하여 조정은 인조 4년 8월에 형조와 한성부·사헌부 등의 徵贖을 동전으로 수납할 것을 결정하였다.1242)≪仁祖實錄≫ 권 14, 인조 4년 8월 신축. 그러나 그것이 미처 실현되기 전에 인조 5년 정월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중단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1620년대에는 소량이나마 모처럼 동전을 주조하고 그 보급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강구했으나 실제로는 그 유통은 보지 못하였다. 그 후 인조 6년 7월에 南以恭이 동전 통용을 건의했으나1243)≪仁祖實錄≫ 권 19, 인조 6년 7월 계유. 국가 보유의 동전 수량이 적고 더 주조한다 해도 국가 재정이 어려운 시기이기 때문에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정묘호란으로 중단되었던 인조대의 주전사업은 인조 11년 10월에 호조의 제의로 다시 재개되었다. 국민 생활과 국가 재정을 풍족하게 한다는 건의가1244)≪仁祖實錄≫ 권 28, 인조 11년 10월 갑술. 국왕의 허락을 받게 되자 인조 11년(1633) 11월에 상평청에서 관장하던 주전사업을 호조가 주관하고 중국 화폐인 만력통보의 모양을 본따 朝鮮通寶를 주조하였다. 이 때에 주조된 조선통보는 八分體의 글자로 바뀐 것으로 조선 왕조 전기의 그것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미곡과 동전의 교환 비율은 동전 1문으로써 미곡 반되와 교환하도록 규정하는 한편, 중국 화폐의 유통을 금지시켰다.1245)≪仁祖實錄≫ 권 28, 인조 11년 11월 임진.

 한편 조정에서는 화폐 보급책의 일환으로 조선통보를 중앙에서 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서도 주조하도록 조치하였다. 특히 교통과 상업이 발달하고 주전 원료의 공급이 유리한 지방을 선정하여 鑄錢所를 분설, 동전을 주조하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로서 처음에는 안동·개성·대구 등지에 주전소가 분설되었고, 후에는 해주·수원 등지에도 주전소가 설치되어 동전을 주조하기에 이르렀다.1246)元裕漢,<李朝 肅宗時代의 鑄錢에 대하여>(≪史學硏究≫ 18, 1964), 633∼634쪽. 이 때 주목되는 점은 수원의 동전 주조가 국가의 물력으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주전 즉 민간 물력에 의해 주조되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민간에 의한 사주조가 건의되기는 했으나 그것이 실제로 시행된 것은 수원의 경우가 처음인 것이다.

 또한 조정에서는 각종 賦稅에 대해 동전 수납을 실시함으로써 민간의 화폐 유통을 촉진하였다. 즉 국가가 수납하는 미·포 중에 1/3∼1/4을 동전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였으며 아울러 삼사에서 죄인에게 거두는 贖錢과 각사의 수수료도 동전으로 수납토록 하였다. 그러나 전세나 三手糧 경우에는 먼 지방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동전을 갑자기 마련하여 바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이의 실시를 보류하였다.1247)≪仁祖實錄≫ 권 28, 인조 11년 11월 임진. 인조 12년 2월에는 선혜청에서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8말씩 거두어들이는 곡식에 대해서 1/10에 해당하는 8되를 동전으로 수납하기도 하였다.1248)≪仁祖實錄≫ 권 29, 인조 12년 2월 경진. 그러나 아직도 화폐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백성들은 동전 사용에 소극적이었고 여전히 미곡 및 포화 등 현물 화폐만을 교환 수단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새로 주조된 조선통보 통용은 명목만 있을 뿐 실제로는 유통이 부진하였다. 따라서 인조 13년 7월에 상평청에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동전 유통 방안을 건의하여 국왕의 허락을 받았다. 그 내용은 모두 6개항으로 첫째, 市井人 중 원하는 자는 錢市의 설치를 들어준다. 둘째, 각사·각아문의 징속과 수수료의 동전 수납을 이제부터 다시 착실하게 거행한다. 셋째, 동전 통용은 저자의 자잘한 물건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므로 땔감·야채 등의 물건은 반드시 동전으로 매매하도록 5부와 평시서에 착실히 분부한다. 넷째, 京中과 지방에서 점포를 내려는 자는 그 소원을 들어준다. 다섯째, 경중에서 소를 매매할 때 오직 동전만을 사용하고 만약 어겼을 때는 동전으로 징속한다. 여섯째, 경성에서 8도에 이르는 길 주변의 각 관아에서는 반드시 점포를 설치하여 동전을 유통하게 하며 수령은 이를 착실하게 거행하도록 한다1249)≪仁祖實錄≫ 권 31, 인조 13년 7월 임술.라고 되어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동전 유통에 대한 국가의 노력은 인조 14년 12월에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말미암아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인조 22년 9월과 25년 12월에 金堉이 황해·평안도에 동전 유통을 건의했으나 국왕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250)元裕漢,<朝鮮後期의 金屬貨幣 流通政策>(≪東方學志≫ 13, 延世大, 1972),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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