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4. 금속화폐제도의 시행
  • 3) 화폐정책의 난맥과 폐단
  • (2) 주전 원료의 부족과 사주전

(2) 주전 원료의 부족과 사주전

 주전 원료인 銅의 공급 부족은 조선 중기의 화폐경제 발전을 저해한 주된 요인의 하나였다. 따라서 당시의 화폐정책 담당자들은 동의 공급 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으며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다. 동전 통용을 시도하던 인조·효종 연간은 물론 동전 유통이 비교적 원활하게 전개되던 영·정조 이후에 있어서도 정부의 가장 큰 고심은 주전 원료난의 해결이었고 상평통보를 주조하기 시작한 숙종 연간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숙종대에 주전사업을 개시한 지 1년만인 숙종 5년(1679) 1월에 이미 동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주전사업은 중단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좌참찬 吳挺緯는 국왕에게 궁중에 저장된 동을 주전청에 보내자고 하였으며 국왕도 이를 받아들여 동 100근을 진휼청에 내려 보냈다.1270)≪肅宗實錄≫ 권 8, 숙종 5년 정월 임자.

 그리고 동년 2월에는 비변사에서「鍮器禁斷事目」을 제정하기에1271)≪備邊司謄錄≫ 35책, 숙종 5년 2월 4일. 이르렀는데 이는 두 가지의 목적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그 하나는 시급한 주전 원료의 공급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동전 가치가 하락할 경우 동전을 녹여서 유기를 제조하는 폐단을 방지하는 데 있었다. 유기금단사목의 주된 내용을 보면 일상 생활에 필요한 식기·수저·촛대 등 15개 품목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유기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궁중의 동 하사나 유기 사용의 제한 등으로 만성적인 주전 원료의 공급 부족 현상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었다. 즉, 이웃 나라로부터 동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특히 당시에는 일본 동이 주전 원료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 동의 수입량은 연간 3천여 칭(稱)에 달하고1272)≪備邊司謄錄≫ 47책, 숙종 19년 7월 4일. 있었으며 倭館에서의 동철 100근은 은 10냥이고 서울에서는 운반비 명목으로 은 2냥이 더 붙었다.1273)≪備邊司謄錄≫ 57책, 숙종 32년 4월 29일. 또한 부연 사행을 통하여 중국의 동도 수입하였는데 그 수입은 간헐적이었으며 수입량도 대단치 않았다. 이에 대하여 일본 동의 수입은 꾸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수입량도 상당히 많았으므로 주전 원료의 주된 공급원은 일본이었다.

 한편, 국가에서는 국내 동광을 채굴하여 부족한 주전 원료를 보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채광과 제련 기술의 부족, 채산성의 결여, 민폐 발생 등의 이유로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1274)元裕漢, 앞의 글(1964), 652∼654쪽.

 국가의 주전사업이 본격화됨에 따라 모리를 꾀하는 私鑄行爲가 문제점으로 제기되었다. 동전의 사주는 官鑄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관주가 합법적인 동전 주조인데 반하여 사주는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국법에 저촉되는 커다란 범법행위로서 무거운 처벌을 받는 것이 통례였다. 조정에서는 화폐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주가 끼치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하여 동전 사주를 엄금하였다. 인조 11년(1633) 11월에 호조에서 제정한 동전 유통방안을 보면 동전 사주자는 大明律에 따라 주전 기술자와 함께 교수형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1275)≪仁祖實錄≫ 권 28, 인조 11년 11월 임진.

 그러나 동전 유통에 급급했던 17세기 전반기에 있어서는 동전 사주가 별로 일어나지 않았고 또한 그것을 규정대로 엄격히 처벌할 필요도 없었다. 사실상 이 시기에는 동전 유통에 대한 국가의 의욕이 강렬하여 동전 유통책 수행에 필요한 동전을 얻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민간인에게 동전 사주를 허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일반적으로 동전을 사주하는 목적은 모리에 있고 그 모리욕은 동전의 명목 가치가 소재 가치 이상으로 통용될 때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1276)宋贊植, 앞의 책, 156∼173쪽.

 그러나 17세기 전반기의 동전 유통책은 주전 원료의 부족과 정책 운용의 불합리성 등으로 말미암아 동전 유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동전의 명목 가치의 보장이 이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종 13년(1672) 12월에 동전 사주자를 엄하게 다스린다는 종래의 처벌 규정이 폐기되기에 이르렀다.

 17세기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는 동전이 법화로서 그 유통 영역을 점차 확대해 나가자 숙종 7년 3월에 전주 판관 沈揖이 동전 수천 관을 사주하여 모리하는 행위가 나타났고 관찰사가 진휼을 빌미로 하여 부당하게 동전을 주조하거나 심지어는 前職 判書의 曾孫婦인 士族女가 사주 행위를 저지르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처럼 숙종대에는 사회적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주 행위를 자행하는 자가 많았고 그 장소도 깊은 산골이나 섬, 해상의 배가 이용되어 저질러졌다.1277)元裕漢, 앞의 책, 133∼134쪽.

 그리하여 숙종 21년(1695)을 전후로 하여 사주자에 대한 처벌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그 이전에도 사주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마련되어 있기는 했으나 주전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이의 보완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종래에는 사주한 匠人은 사형, 그를 보조한 奉足은 정배로 다스리던 것을 이 때에 와서는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숙종 22년에는 接主人도 사형에 처하고, 사주를 하려다 미수에 그친 자도 사형 아래의 벌을 적용하였다.1278)≪備邊司謄錄≫ 49책, 숙종 21년 10월 25일.
≪肅宗實錄≫ 권 30, 숙종 22년 3월 병인.

<權仁赫>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