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5. 중개무역의 성행
  • 1) 임진왜란의 발발과 조명무역
  • (2) 임진왜란 시기 중국 상인들의 조선 진출

(2) 임진왜란 시기 중국 상인들의 조선 진출

 임진왜란 시기 조선과 중국 사이의 무역활동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明 상인들의 활발한 조선 진출과 매매 활동이었다. 명에서는 당시 변방의 군대 주둔지에서 필요한 미곡·면포·소금·농기구 등의 일용품이나 화약원료인 硫黃 등을 전적으로 상인들을 통해 조달했는데 山西商人 등은 그 과정에서 물화를 운반·납품하고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1289)寺田隆信,≪山西商人の硏究≫(京都大 東洋史硏究會, 1972), 123∼124쪽 참조. 따라서 수많은 명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은 명 상인들이 눈독을 들이는 대규모의 ‘소비시장’으로 각광을 받았고 왜란 당시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명 상인들은 명 내지에서 군량을 조달하거나 조선으로 운반하는 과정에 개입하여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본토에서 수집한 곡물을 높은 가격으로 명군 진영에 납품하거나, 조선으로 군량을 운반할 때 곡가의 지역적 차이를 이용하여 많은 이익을 챙겼다. 일례로 명군 지휘부가 양곡을 현물로 조선으로 운반하라고 지시했음에도 상인들은 折價(銀)만을 들고 와서 조선에서 미곡을 구입하여 납입하는 방식을 통해 이익을 챙겼던 것이다.1290)≪宣祖實錄≫권 96, 선조 31년 정월 갑진.

 명 상인들은 또한 조선까지 직접 왕래하면서 명군과 조선인들을 상대로 상업활동을 벌였다. 매월 일정한 급여를 銀으로 받아 구매력을 갖춘 수만의 明軍이 주둔해 있던 조선은 그들에게 매력적인 市場이었거니와 명군 지휘부 역시 그들을 적극적으로 조선으로 유치하려고 시도하였다. 당시 은화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고, 酒肉 등을 구매할 수 있는 점포가 갖추어지지 않았던 조선의 상황 때문에 애로를 느끼고 있던 명군 지휘부가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려고 遼東商人 등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였던 것이다.1291)왜란 시기 명 상인들의 활발한 진출과 상업 활동에 대해서는 韓明基, <明의 派兵과 경제적 영향>(≪宣祖代 후반∼仁祖代 초반 對明關係 연구≫, 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7), 50∼54쪽 참조. 이 같은 배경에서 조선에 들어온 명 상인들의 수는 점점 증가하여 선조 33년(1600) 무렵까지도 그들이 서울과 지방에 퍼져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1292)≪宣祖實錄≫권 124, 선조 33년 4월 병신. 명 상인들이 의주부터 부산까지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온갖 물건들을 모두 판매하기 때문에 명군이 들여온 은의 대부분이 다시 명 상인들의 차지가 되어 조선에서 유출된다고 지적될 정도였다.1293)≪宣祖實錄≫권 134, 선조 34년 2월 병자.

 명 상인들이 무엇보다 관심을 가졌던 것은 조선인들에게 직접 중국산 물화를 판매하는 것이었다. 명 상인들은 조선인들을 상대로 곡물 등 생필품 뿐 아니라 명주와 같은 사치품을 판매하였다. 특히 당시 조선 사람들이 靑藍布나 絹織物 등을 선호하는 것을 알고 이들 품목을 대량으로 반입하여 서울의 鍾路 등지에 점포를 열고 판매하였다. 이렇게 명 상인들을 통해 견직물을 비롯한 각종 唐物이 유입되면서 “조금이라도 容儀를 꾸미는 자들은 전부 비단과 羊裘를 착용한다”고 지적될 정도로 전란 중 조선에서는 사치 풍조가 사회문제가 되기에 이르렀다.1294)尹國馨,≪大東野乘≫권 55, 甲辰漫錄.

 명 상인들은 이 밖에도 조선에서 새로운 利源이 될만한 것을 찾는 데 골몰하였다. 그들은 명군과 함께 조선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은광을 찾아 개발을 시도하였고, 명으로 가져가면 이익이 될만한 물자를 수집하여 명으로 반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상인들 가운데는 조선 각지에서 막대한 양의 무쇠(水鐵)를 수집하여 중국으로 실어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명으로 가져가 江南 등지의 농기구 제작소에 판매하려는 목적이었다.1295)韓明基, 앞의 책, 52∼53쪽 참조. 요컨대 왜란은 요동상인을 비롯한 중국 상인들에게 커다란 경제적 기회였다.

 임진왜란은 또한 명의 은화가 조선에 대량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은본위의 경제구조를 지녔던 명은 원정군에게 소요되는 군량과 군수물자를 은을 풀어 조달하였고, 장병들의 급여 역시 은으로 지급했기 때문이었다. 명이 왜란 시기 지출한 은의 총액은 약 900만 냥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 가운데 대부분은 본토에서 지출되었지만 조선으로 유입된 양도 적지 않았다. 은의 유입은 조선 사회에 여러 가지 영향을 끼쳤다. 조선 사람들은 명군이나 명 상인들과의 잦은 거래를 통해 은의 화폐로서의 기능에 주목하게 되었고, 조선 각지에서 은을 찾으려는 열풍이 불기도 하였다. 실제 임진왜란 말기인 선조 31년경에는 酒肉·두부·땔감 등의 물자를 거래할 때 은을 사용하는 것이 습속으로 굳어졌다는 지적이 나타나고 있었다.1296)≪宣祖實錄≫권 99, 선조 31년 4월 임술. 이처럼 왜란 시기 명나라 은의 유입과 은을 이용한 거래의 활성화를 통해 조선은 명의 銀經濟圈으로 편입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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